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23화 (123/324)

123화

<시작의 장소>

뉴타운과 학교 건설 관련 일정, 그리고 약속했던 대통령과의 일정 소화를 마치느라 천후는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홍역을 치르고 난 다음에야 시간이 조금 났지만, 그때부턴 조금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휴~. 드래곤 잡고 나니까 디제스터가 안 나타나네."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던 현상인데, 멸급이 한 번 잡히면 한동안 디제스터가 안 나타나더라고."

드래곤을 잡고서 뜯어낸 돈이 워낙 거액이긴 했지만, 그래도 주수입이 되어야 할 디제스터가 안 나타나는 것은 조금 타격이 있었다. 특히 이제부턴 수도꼭지, 아니 아예 하수관 밸브 연 것처럼 돈을 쏟아버릴 생각이었던 천후에게 있어서는.

"뭐. 안 나오는 건 별수 없지. 어차피 잠깐이야. 그리고 디제스터가 한국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 동안 다른 것들을 해결보자."

그렇게 주변을 환기한 천후는 문득 달력을 바라보았다.

"아…."

그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오자 희주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 그게."

희주의 물음에도 한참을 달력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천후는 조용히 답했다.

"얼마 안 남았네요. 그날이."

"아아."

천후의 말에 같이 달력을 바라보던 희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그의 팔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기대온 그녀의 몸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가만히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던 천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올해는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주인님?"

알 수 없는 혼잣말에 희주가 고개를 올려 마주 봐왔다. 천후는 부드럽게 웃었으며 말했다.

"희주 씨. 저 잠시 유그드라실에 다녀올게요."

귓가를 쓸어넘기는 손길에 스르륵 눈을 감은 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말에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다. 그것이 고마워 천후는 살짝 그녀의 이마에 입을 대며 생각했다.

'잘된 걸 수도 있어. 어차피 한번은 만나봐야 했으니까.'

*

마법기관 유그드라실. 하늘에 떠 있는 이 불가시 공중요새는 천후에겐 참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장소였다.

기억이 존재하는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온 장소. 고향이기도 했으며.

그를 인간으로도, 마법사로도 받아들이지 못해 가둬놓고 실험을 자행했던 교도소기도 했다.

지상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그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과 잘못 대해주는 사람이 있었고.

둘이 혼재된 복잡한 인간관계는 제외하고 보더라도 이곳은 그에게 만족스러운 환경은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큐브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유그드라실에 오를 땐 만감이 교차하곤 했다. 아래로 보이는 지상이 점점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기도 모르게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저 아래에서 자신은 이제 영웅취급을 받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위에선 어떨까?

인간의 인지를 넘어선 진정한 초인들. 어디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 SA랭크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이 인공구조물 안에서 그는 한없이 작은 존재가 되었다.

그럴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아이여도 용서받는 장소.

"후…."

유그드라실에 들어와 아래를 내려다보면 첫 외출…. '방 밖으로의 외출'을 허가받았을 때. 한참을 매달려 내려다보곤 했던 광경이 지금도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이곳을 자신의 있을 곳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리라.

"가자."

목적을 상기한 그는 거대한 구체형의 요새를 돌고 돌아 목적지로 찾아갔다. 그동안 지나치는 사람들, 마법사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호의와 두려움으로 각각 양분된 시선을 그것에 맞게 대응해준 천후는 어느새 한 방 문 앞에 도착해있었다.

'유그드라실 대한민국 지부장 최완'

미리 약속은 되어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 그는 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벽면처럼 보이던 문이 열렸다. 천후는 그것에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두웠다. 복도로 내져있는 창에도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지, 불이 꺼진 방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천후는 문 바로 앞에 멈춰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완전한 암흑 속에 갇히면 시간 감각을 쉬이 잃는다. 하지만 천후는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게 초를 새며 기다렸다.

그렇게 5분가량이 지나자 방에 불이 들어왔다.

"왔구나."

목소리는 그의 코앞에서 나고 있었다. 천후는 그리 놀라지도 않고 남자를 바라보며 답했다.

"여전하시네요. 아저씨. 명상에 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반응 안하는 거."

"후. 네가 내 명상시간에 온 거잖냐. 난 잘못 없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어깨를 으쓱한 천후는 방을 돌아보다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방석을 집어서 깔고 앉았다. 남자, 최완 역시 침대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이 방. 처음 와보네요."

"그랬나?"

"그래요."

담담히 말한 천후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남자 혼자 사는 방 아니랄까 봐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개어둘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이불에, 흐트러진 옷들에, 온갖 책들에, 산처럼 쌓인 설거지거리까지. 막장 독신생활을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습이다.

"정리 좀 하고 사세요. 벌레 나오겠네."

"유그드라실엔 벌레 안 나와. 누가 지상에서 가지고 올라오지 않는 이상."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요. 아저씬 좀 새장가 좀 가세요. 뭐야, 이게."

"야. 소개나 좀 해주면서 말을 해. 그리고 누가 나 같은 애 딸린 남자한테 붙겠어."

핑계도 가지가지다. 헛웃음을 지은 천후는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럼 그냥 호적에서 파세요. 저 이제 별로 양자 할 필요도 없으니까."

"와. 이놈 보게. 싸가지 없는 새끼."

쯔쯔하고 혀를 찬 남자는 시가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그와 동시에 마치 자동으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끝머리가 잘렸다.

"후우…. 그래서. 무슨 일로 왔냐. 여기까진."

이전에 선물 받은 라이터로 불을 붙인 최완은 깊게 빨아들였다 내쉬며 물었다. 방안이 금세 너구리굴로 변했지만 천후는 그다지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원랜 아저씨가 내려와야 하는데 올라와 드린 거잖아요."

"……."

"우리. 서로 좀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아닌가요?"

"하…."

쓰게 웃은 최완은 한참 동안 시가를 빨다가, 몇 분이나 더 지나서야 그것을 재떨이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마를 한 손으로 내 짚으며 말했다.

"대체…. 내려간 지 넉 달 만에 아주 대단한 사람이 돼버렸더구나, 너."

"……."

"안 그래도 지부장회의에서 난리다, 아주. 등쌀에 죽겠어. 사주가 몇 개씩 들어오는지 알기나 하냐?"

"뭐라는데요."

"뭐긴 뭐야. 네 이름 빨 빌려서 한국 마법사들 대우 올려보자 이거지. 앵무새도 아니고 지겨워 죽겠다."

최완이 우는소리를 하자 천후는 쓰게 웃다가…. 천천히 웃음을 지우고 물었다.

"…정말 그거뿐이에요?"

"……."

최완의 얼굴에 엄살 특유의 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무표정이 자리를 잡다가… 그것을 모두 몰아내고 피로함이 깊게 새겨졌다.

"조금 더 시간을 들이면서 컸어야 했는데…."

"……."

"넉 달은 너무 짧았어."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래도 짧았다."

"정말 어쩔 수 없었잖아! 아저씨도 마지막까지 나서지 않았으면서!"

쾅! 쩌렁쩌렁하게 외친 천후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의 눈에는 노기가 들이차 있었다.

"대체 뭐냐고요! 이제 와서! 이런 식일 거면 아저씨가 내려와서 드래곤이고, 그레이트 드래곤이고 다 잡아 치웠으면 됐을 거 아니야! 신선처럼 하늘 위에 떠 있다가 왜 그런 소리나 하는 거냐고요!"

그의 외침에 최완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천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을 해요, '아버지'! 대체 뭐냐고! 당신 S랭크 마법사잖아! 그중에서도 거의 최강이잖아! 왜 개입을 안 하는 거야! 한국 지부장이니 해놓고 나라가 결딴날 때까지 왜 나서질 않았던 건데!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게 해놓곤 왜 이제 와서 내 탓을 하는 거냐고!"

천후의 입에서 감정이 거칠게 쏟아져나왔다.

*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최완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미안하다."

"그런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설명을 하라고! 대체 유그드라실은 뭐하잔 거야? 진심으로 마법사 인권을 생각하고는 있어?"

"……."

최완의 말문은 완전히 닫혔다. 그 모습을 보며 천후는 좀 더 소리치려다 간신히 속을 가라앉히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시선은 더는 최완에게 향하고 있지 않았다.

방안에서는 시간만 흘렀다. 두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몇십 분을 보냈다. 먼저 입을 다시 연 것은 최완이었다.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

"다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들의 활동에는 제약이 걸려있다는 거다. 유그드라실 총력이 직접 나설 수 있는 사건은 한정되어있어."

"…디제스터는 그게 아니다?"

"……."

최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영천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간신히, 정말 간신히 감정을 수습한 천후는 이를 악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알겠어요. 더는 묻지 않죠. 제가 물어볼 수 없는 내용인 거죠?"

"그래."

"지금 제 위치에 다른 마법사가 도달했었다면 좀 더 공개를 해줬을 거고?"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긍정이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미쳐버릴 것 같은 절망감에 천후는 허우적거렸다.

이 빌어먹을 유그드라실. 대체 어디까지 나를 엿먹여야 기분이 풀리려는 거지?

나라를 개박살 낼 괴물이 날뛰어도 그것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그걸 잡지 못하는 무형의 제약, 내규가 있어서 나설 수 없다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이놈들은 마치 세계를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걸 지켜보고 있는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입으로는 그렇게 왈왈 짖어대면서 하는 소리가 기껏 이거란 말인가?

"미안하다."

"…하아."

그 안에 묶여있는, 지상에 있었다면 문자 그대로의 현인신일 남자가 내는 소리에 천후는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그는 자신과 정으로 묶여있는 사람이기에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리라.

"됐어요. 그래, 뭐 사정이 있다니 별수 없지. 그래…. 별수 없는 거야."

"……."

"우리 사업 이야기 하죠, 사업. 네? 아저씨. 이쪽은 좀 이야기 할 수 있겠지."

"그래."

천후가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기색에 최완은 애써 웃음 지으며 다시 천후를 마주 봤다.

"친란에게서 들었어요. 일정 자격조건을 갖추고 유그드라실의 허락을 받으면 마법사용을 좀 더 할 수 있게 도와줄 거라고."

"너 정말 아래에서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그 여자하고도 안면이 있어?"

3년 전쯤 디제스터 방위 체계를 만들겠다고 접촉해온 여자를 떠올린 최완이 놀라자, 천후는 살짝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아, 뭐. 좀 있죠."

"응? 아하! 와…. 이 새끼."

"하. 하여간 그런데. 아이디어는 거의 비슷해요. 안보 용도로 텔레포트를 풀어보려고 하는데 도와주시겠어요?"

"음…. 너라면 아마 괜찮겠지. 그 부분은 정말 사람만 생기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허가가 내려질 거야. 청탁이 들어왔었단 것도 일단은 사실이라고. 귀가 아플 정도야."

"일단 유그드라실이 뭐라고 해도 전 이 이상 용도 확장을 할 생각은 없어요. 더 풀어봐야 좋은 꼴 못 볼 거 같고."

"흐… 뭐 좋다. 다음에 한 번 의견 타진을 해보지.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결과가 나오면 따로 연락을 해주마."

"좋아요. 아. 그리고…."

"음?"

말을 멈춘 천후는 잠시 그의 눈치를 보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개인적인…. 요청을 하나 하고 싶어요."

"음?"

"이제…. 괜찮겠죠? 10년이나 지났으니까. 이젠 가봐도."

"……."

최완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고개를 돌려 달력을 확인해본 최완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군…. 벌써 그 날인가?"

"네."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다시 한 번,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저는 뭄바이에…. '대참사'가 일어났던 그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 작품 후기 ============================

이쪽 이야기로 오는데도 좀 걸렸군요.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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