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정태원의 이야기를 듣고서 천후는 고민했다.
드래곤이 잡히기 전이라면, 천후는 대통령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었으니 아예 따로 불러서 챙겨달라고 엄포를 놓았으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드래곤은 잡혔다.
나라를 위협하던 디제스터는 없어졌고, 그것을 유일하게 잡을 가능성이 있던 초인의 필요성도 사라졌다.
그에 따라 천후의 가치도 크게 달라졌다.
더는 천후에게 완전히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 대통령과 정부는 이제 그의 말 한마디에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설령 이런저런 축사를 하느라 해명진 대통령을 직접 만날 기회를 얻더라도, 그것은 정말 정치적인 쇼에 가까운 형태를 띨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착각을 고쳐줘야겠지.'
아직. 아직은 관계가 역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도.
전 국민이 알고 있는 그의 인지도.
디제스터를 잡은 지 이제 열흘이 조금 지난 지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아직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기 밖에서 기자들이 인간 덩굴줄기처럼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국민들 입에 한참을 오르내릴 영웅이자 초인이 된 입장. 거기에서 나오는 힘은…. 그가 갑자기 가지게 된 큰돈보다도 훨씬,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그걸 이용해야겠지."
방법과 대본을 준비해줄 사람들은 이미 있다. 여기서부터는 결단의 영역.
천후는 영웅의 가면을 썼다.
*
"대한민국 정부는 사망한 병사들을 전사자로 인정하라!"
"인정하라! 인정하라!"
"괴물에게 죽었는데 순직이 웬 말이냐!"
"웬 말이냐! 웬 말이냐!"
서울광장 한편. 100명이 간신히 될까 말까 한 이들이 피켓과 영정사진 등을 들고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디제스터에게 희생당한 군인들의 유가족이었다. 대부분의 디제스터들이 해상과 내륙을 통틀어 큰 피해 없이 정리되었지만, 희생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키메라, 그렘린 페이스 모두 비행하는 특성상 방공장비로 공격했는데 그 중 맨패즈MANPADS, 그러니까 휴대용 방공장비를 투발하는 도중 노출되었던 병사 몇몇이 반격을 피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이다. 또한 참수리급 고속정 두 척이 공격을 받아 침몰하면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들은 여론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다. 당장 발생한 축제 분위기의 가려져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드래곤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에 의해 발생한 피해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했다.
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정부도 그들에 대한 보상책을 빠르게 정한 후, 마치 그들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많은 독립 언론들이 그들의 존재를 조명하려고 노력하고 애썼지만, 마이튜브 조회 수 2, 3만을 간신히 찍을까 말까 한 영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유가족들은 천천히 지쳐갔다.
바로 그때였다.
피켓을 들고 있던 사망한 병사의 어머니가 저편에서 엄청난 군집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응? 저게 뭐지? 사람이 왜 저렇게 많아?"
"우리 이야기 듣고 오는 거 아닐까?"
"후우…."
옆에서 말해오는 희망적인 관측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난 열흘간 진저리치게 느껴왔다. 이 붕 뜬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는 자신이 역적이 되는 듯한 기분을.
심지어 가까운 친척들 가운데서도 그만 접고서 가슴에 묻으라는 피눈물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과는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인파들은 천천히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어?"
갑자기 너무 많은, 정말 너무 많은 사람이 다가오자 유가족들은 되려 당황했다. 우리들을 조명해달라.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달라며 시위를 시작했지만, 막상 서울 광장이 가득 차버릴 정도로 사람이 몰려들자 덜컥 겁이 났다.
저게 만약 지지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하러 온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슬프게도 안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유가족들의 시위를 반대하러 온 이들이 아니었다.
넥타이 부대에서 여고생까지.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열 명 정도의 사람에 둘러싸인 채로 걸어 나왔다. 그는 파김치가 되어버린 그들에게 잠시 비켜달라고 부탁하고는 앞으로 나왔다.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본 여성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곱은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말했다.
"너무 늦게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 아아아…."
"이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TV에서만 보던 영웅의 얼굴을 본 여자의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렀다.
*
<드래곤 슬레이어, 영천후 씨가 의식을 되찾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디제스터에게 희생당한 국군 장병들의 유가족 곁이었습니다.>
<정말 된 사람인 거 같아요. 어쩜 여기부터 올 생각을 했는지…>
<정치인 중에서도 도와준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눈물이 나와서….>
회복한 그의 첫 행보는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용도 잡은 초인이 이제부터는 무엇을 할까. 어떤 전설적인 일을 할까에 대한 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전설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보듬었다. 사람들이 연상하던 현인신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유가족 앞에 그들을 어머니, 아버지라 칭했다.
<드래곤과 교전할 때. 저도 정말 무서웠습니다. 어느 사람이라고 무섭지 않겠습니까? 디제스터와 맞서 싸웠던 '형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분들이 전사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하철에서부터 유가족 시위 캠프까지 그를 '호위'했던 베테랑 기자들은 긴 시간 그의 인터뷰를 따낼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일관적으로 마법사가 아니라 병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전사자로 인정하고 그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 위대하신 분들이다. 입이 닳을 정도로, 어떤 질문이 오더라도 이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것이 매스컴을 타고 나가자, 단숨에 이슈화되었다.
전역자들과 앞으로 입영해야 할, 투표권을 가진 전 성인 남성들이 격노했다.
"이런 병신 같은 정부. 미친 거 아냐?"
"전사자 처리가 아니었다고? 진짜네? 와. 제정신이신가?"
"좆같이 구네. 이 나라 남자 전체랑 한 판 해보자고?"
기쁨으로 붕 떠 있던 열기가 단숨에 분노가 되어서 정부의 반응에 집중되었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의 태반이 군필자인 만큼, 이것이 이슈화되어버리자 그 화력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에게 입은 피해가 워낙 크다고 판단한 정부는 이번 사태로 일어난 피해보상액을 낮게 설정할 생각이었다.
이번 교전 사망자 순직 처리를 그 시발점으로 삼아, '직접 교전한 군인들도 순직자로 처리했으니, 자연재해로 처리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논리로 여론몰이를 할 생각이었다.
사망자 유가족들의 시위가 있긴 했지만 그들의 수는 어디까지나 소수. 이 전국민적인 축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지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터전을 잃은 연안지방 사람들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크게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파문을 누가 일으키느냐의 차이가 너무 컸다. 지금 이 정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간이 저렇게 나서자 단숨에 그것은 파도로 변했다.
영천후는 지금 그냥 백화점에서 옷만 샀다 하더라도 그 옷의 브랜드 가치가 변할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천후 자신은 전사자 문제밖엔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 뒤부터는 언론과 여론이 알아서, 혹은 친란을 통한 삼각 로비가 작용해 움직여서 그의 행동을 가공, 확대해석해 퍼트렸다.
'왜 저렇게 교전 사망자에게 심각하게 반응하는가?'
'사실 그는 이번에 사망한 일리미네이터들을 국가유공자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그가 나오기 직전에 일리미네이터가 그의 집에 출입했었다.'
본인은 입에서 내지도 않은 말들이 살을 붙이기 시작해, 어엿한 여론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첫행보에서만은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다들 그런 갑다 할 상태.
저것조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솔직히 북한이 쳐들어온 거보다 위기상황이었는데 국가유공자 못 해줄 거 없지 않냐? 마법사면 어때. 대한민국 국민인데."
“야. 거 일리? 어쩌구 그거 드래곤이랑 싸울 때는 일단 군 편제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는데? 그럼 해줘야지. 반 군인이었단 거 아냐.”
"이거 반대하는 사람은 진짜 양심도 없는 거다."
포털 사이트를 위주로 설득 조의 댓글들이 베스트를 먹고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여기서부터는 돈의 영역. 고용한 댓글 부대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이들의 공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지금 이 여론은 순수한 '마법사의 인권'에 대한 여론이라기보단, '드래곤 슬레이어 영천후의 쾌차 이후 최초 발언'에 대한 여론이 되었다. 감히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내심 이번 일을 계기로 마법사에 대한 규제를 풀어달라거나, 개인특권 확대에 대한 욕망, 혹은 정권진출을 노릴 거란 생각을 하고 있던 정부 관계자들은 대응하기 힘들어할 수밖에 없었다.
영웅의 감투를 쓰고 저런 순수한 의도를 내지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죄다 넘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깨어나면 바로 그를 포섭해서 다음 정권까지 그의 이름에 업혀갈 생각이었잖습니까?"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넥타이 부대까지 나선 이상 방안을 철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젠 이러면 줄줄이 보상 내용이나 보상액이 인상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정부는 뜻밖의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 예산이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특히 인천은 인천 아시안 게임 유치 및 여러 가지 문제로 애초부터 빚덩이 도시였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했다.
“흐으음….”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해명진 대통령도 살짝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그는 꼭두각시지만 썩어도 나라의 대표자.
“일단 사전에 협의한 게 있으니 그와 한 번 만나보지요.”
귀에 바람을 집어넣던 가신들이 흔들리자 홀로 판단을 끝낸 그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
그리하여 다시 며칠 후.
청와대에선 만찬회가 진행되었다. 원래는 드래곤이 퇴치된 다음날 진행하려 했지만, 가장 중심이 될 하객인 영천후가 의식불명이었기 때문에 미뤄지고 있다가 이제야 다시 날짜가 잡힌 것이다.
몇몇 식순이 끝나고, 기자들이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마주 서게 된 영천후는 그를 담담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하하하! 나라를 구한 영웅이 할 말이 아니지요.”
“아닙니다. 그런.”
겸손을 떠는 모습을 보이던 천후는 그러다 그와 악수를 나누며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이번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국가유공자’분들의 넋을 꼭 기려주셨으면 합니다.”
“…….”
회장 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많은 매스컴에 노출되어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뜻을 직구로 밀어붙인 것이다. 여기서 보이는 행동에 따라서 얼마간의 관계가 확정되리라.
해명진은 악수한 손과 등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해명진 대통령뿐만이 아니라 정부인사 모두 방심하고 있었다. 차라리 사리사욕으로 움직이는 인간이었다면, 어떻게든 흠결을 잡아서 깎아낼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영천후도 정치적으론 약점이 많은 인간이었다. 제3 인류이며, 마법사고, 양친조차 없이 자랐으며, 여자관계도 문란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그의 행동으로 덮여버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대통령과 정부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한 가지 선의가 백 가지 악의를 찢어발겨 버린 수준이다. 해명진 대통령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답했다.
"무, 물론이네. 이번 일을 잘못 처리한 이들은 반드시 책임을 지게 하지."
"하하. 용단이십니다. 저는 정말로 해명진 대통령님과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합니다. 교전에 직접 참가한 당사자로서, 지켜낸 보람이 있는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이 기쁩니다."
"…….”
준비해온 게 분명한 멘트에 대통령은 입술을 씰룩씰룩 대면서 악수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둘은 그날 앙금님과 심수찬이 찍은 사진만큼이나 작위적인,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
그날 이후.
각 언론은 이것이 영천후가 요구하던 조건들을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분석하여 보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순직자들은 전사자로, 일리미네이터들에 대해선 국가유공자 처리가 이루어졌다. 그들의 시신 역시 국립묘지에 재안장되었다.
특히 일리미네이터들의 경우 이후로도 ‘멸급 디제스터 사상자 한정’으로 그렇게 처리하겠다는 법 제정안이 국회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이 이상은 이끌어내기 힘들었어요.”
감사를 위해 다시금 천후의 자택에 모인 C랭크들은 그의 말에 손을 붕붕 내저었다. 이것만 해도 전례가 없을 정도의 성과였다.
일리미네이터가 돈을 좀 버는 일이긴 했지만, 그 외적 측면으로는 지금까지 사람취급을 못 받고 있었다. 국립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데 이런 성과를 내니 태원은 눈물마저 흘릴 뻔했다.
그 뒤.
손님들이 떠나고 뉴스를 확인하고 있던 셀레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해명진 정부 일 처리는 어떻게 보면 진짜 일관적이다. 이걸 이렇게 처리하네."
“그러게.”
천후도 어이가 없어져서 그저 웃었다.
화면에서는 해당 사건의 총 책임자인 국무총리가 해임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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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진 찍은지도 그러고보니 몇 년이나 됐구나. 둘 다 팀도 달라지고 참.
적당히 별명, 이름은 변경해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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