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늦은 새벽.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셀레나는 전화 진동음을 듣고서 발신인을 확인했다.
"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그녀는 하루하루가 바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새벽엔 몸 관리를 위해서 무조건 수면을 취하곤 했다. 저쯤 되면 컨디션 관리야말로 진정한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 그녀가 이 시간에 연락이라니? 처음 있는 일이라, 셀레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전화를 받았다.
"란. 무슨 일이야?"
분명 큰일이 있겠거니 해서 먼저 물었는데 수화기 너머에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덜컥 놀란 셀레나는 녹음기능을 켜고, 다른 손으로는 메모장을 열어 전화를 받은 시각과 정황 등을 빠르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게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전화를 받은 지 30초쯤 지났을 즈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셀레나….>
"란! 목소리가 왜 그래?"
언제나 자신감으로 넘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은 엿가락처럼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란은 후후후하고 웃음소리를 흘리며 말해왔다.
<네 남자는…정말 굉장하군…. 이거에 반한 게냐?>
"……."
우뚝. 그 말에 순간적으로 모든 걸 파악한 셀레나는 자판을 두드리던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희이주우우우우우우야야아아아아아!!!!!'
강호 씨만이 아니었어! 하지만 하필이면 란이라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 셀레나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넌…."
<아니. 난 진심이다만. 음…. 아직도 꼼짝을 못하겠군. 약을 먹어두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천후 쪽에서 덮쳐오기 시작한 이후. 친란은 신세계를 체험했다.
단순히 짐승처럼 뒤를 점해지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건 시작에 불과할 뿐.
지금까지 위를 점해왔던 그녀의 태도를 철저히 부숴주겠다는 듯이, 그는 그녀를 아래로 깔아뭉개고, 입에 스스로 물게 하고….
마치 사람이 아니라 처리용 인형처럼 붙잡힌 채 거칠게 해대서, 그녀가 그저 아래에 깔리는 몸임을 각인시켜 버렸다.
온몸이 삐그덕 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나가 굴복하겠다고, 용서해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새하얘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이었다.
침대와 다리 사이에선 흩어져 내린 액체들이 굳어있었다. 그 양도 엄청나서, 항상 사회활동을 하느라 경구피임약을 상시 복용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오늘 이걸로 생겨버릴 뻔했다.
온몸에서 난 땀을 씻어내려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 순간 그녀는 다리와 허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음…. 큰일이군. 이래선 다른 남자는 생각도 못 하게 되어버리잖나?>
간신히 근처에 놔뒀던 핸드폰까지는 침대 위를 기어 간신히 손에 쥔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셀레나에게 연락을 하고 말았다. 그녀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나 다를까 셀레나는 볼멘 목소리를 냈다.
"너…. 정말로 천후를 채갈 셈이야?"
친란은 욕심쟁이였다. 특히 셀레나에게 한정해선 특히. 어릴 때부터 잘해주는 척하면서 가장 많이 골렸다.
오빠인 황정태와는 달리, 좀 더 인연이 있어 10년 전부터 그녀를 알고 지냈던 셀레나는 그녀의 본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지독한 욕심쟁이. 셀레나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탐을 내는 여자. 입으로는, 그리고 진심으로도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지만 결국 죄다 빼앗아가는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 친란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답했다.
<응? 내가? 이 남자를? 하하. 그럴 리가. 나는…. 셀레나 너에게는 욕심쟁이이긴 했다만 그래도 분수는 아는 여자다.>
"응?"
<빼앗다니. 그가 나를 가지는 것이지. 처음이구나, 셀레나. 너와 공유하는 것이 생긴 건.>
"야, 너…."
한숨을 푹 내쉰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목소리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게, 아무래도 꽤 단단히 꿰인듯했다. 하지만 친란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흠. 나는 진심이다만…. 아. 그는 나 혼자선 받아내기엔 너무 큰 그릇이군.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다.>
"……."
대충 이야기의 맥락이 짚인 셀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다 조심스레 되물었다.
"혼자?"
<음. 어리석었다. …굉장하더군.>
경험자인 셀레나는 신음성을 흘렸다.
<자기 말로는 다쳐서 전력이 아니라던데….>
"아마…. 맞을껄."
시간을 확인해본 셀레나는 그렇게 답했다. 만전 상태였다면 그녀가 이 시간에 이 정도로 말짱하게 대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 한창일 테니까.
<그렇군. 다시는 시도할 게 못 되겠어. 흠…그래서 말이다만 셀레나.>
"아…. 정말 그 이야기 그냥 그쯤 하면 안 돼?"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너무 뻔해서 그냥 전화를 끊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친란은 웃으며 계속했다.
<혼자 대적할 수 없으면 둘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잖나? 부끄러워할 필요야.>
"부끄러워! 언제 들어도 부끄럽다고 그거! 아, 정말 짐승 진짜!"
왜 그렇게 센 거야! 상식을 부술 수밖에 없잖아, 이러면!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자존심 강하던 애를 저렇게 만들어 놨어?! 입을 우물거린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렀다.
"희주는 몰라도 너, 너랑은 정말 부끄럽다고! 열 살 때부터 알았는데!"
<후후. 뭘. 그런 너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니냐? 난 이것도 인연으로 생각한다만. 그리고… 아마 본부인 마님께서도 서로서로 친밀했으면 하실 테고.>
그녀가 말하는 본부인 마님이 누군지야 너무 뻔하다. 그리고 그 명칭에 대해선 솔직히 셀레나도 부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으…."
<뭐냐? 싫은 거냐?>
"싫은 건 아니지만…. 아 정말. 몰라!"
<후후. 승낙으로 알지.>
셀레나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무음으로 몇 분이 지났을까?
<그런데 셀레나. 목소리가 멀쩡하던데. 원래부터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군. 뭘 하고 있었지?>
나른한 음성으로 물어오는 말에 셀레나가 컴퓨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냥 이것저것. 천후가 생각하는 걸 진행하면서 이익이 날 만한 구체적인 사업안 좀 생각해보고, 진행방향. 리스크 같은 걸 수치화하고 있었어."
그가 앞으로 걸으려고 하는 길은 단순히 숫자로만 판단할 수 없는 세계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넘어야 할 것이 너무 거대하다. 어떤 때는 아무리 강경하게 밀어도 넘어서지 못하리라.
그게 과연 어느 정도 선에서부터 크게 발동할 것인가? 인식 그 자체와 싸우기 위한 초안을 그녀는 잡고 있었던 것이다.
"뭐 우회적인 조사방법론이라 데이터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긴 해도, 근사치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
<과연. 이제 좀 머리가 맑아졌나 보군.>
친란의 말에 셀레나는 핏 하고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거 아냐. 그런데 친란. 아무래도 내가 지금까지 다뤘던 자금 규모가 작았잖아. 그래서 조금 확신하기 어려운 면이 있거든? 좀 물어봐도 되겠어?"
<음. 물어봐라.>
"이거 말인데. 결국 최종 목표를 대한민국으로 둘 수가 없는 게 맞는 거지?"
<하하.>
셀레나의 물음에 친란은 웃음으로 답했다. 맞군. 여기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는단 건, 어디까지 의견일치를 하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그녀 특유의 제스쳐였다.
"이 나라. 작단 말이지, 결국. 이익으로 연결되는 사업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큰 소비시장을 얻어야 해. 그러니까."
""미국. 중국. EU."
"
순서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셀레나는 웃었다.
"5천만 상대로 장사하기엔 손해 보는 프로젝트야. 초기비용이 더 들어. 그러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스테이지 업을 위한 발판. 프레젠테이션."
<그래.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대화는 이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말을 받쳐주는 것으로 변화한다.
"대한민국에 구성된 시스템을 선보여서, 세계에 파는 것이 최종 목표."
<그것도 독점으로.>
"우리만이 허가를 받은 상태로."
<그러는 동안 일어날 일은>
두 사람의 입이 잠시 멎었다. 그러다, 동시에 내뱉어진다.
""대한민국의 마도 국가화."
"
<절대. 텔레포트 공식화로 끝날 리가 없다.>
"유그드라실이 결코 그 수준에서 끝나는 걸 바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확산 속도를 통제할 사람을 필요로 하지.>
"그게 천후고."
<우리들의 왕.>
츱 하고.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에 닿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셀레나가 인상을 썼다.
"너어…!"
<후후. 부러운가?>
"으…! 하여간 우린 거기에서 천후가 바라는 만큼만 제어 가능 하게끔 도와주려는 거잖아."
<그렇지…. 유그드라실의 최대 비원은 전 마법사의 사회 대두. 하지만 그건 결국 전 세계가 마도 국가화 된단 의미이기도 하지. 마법사의 마법이 개인이 가진 '정당한 힘'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 파급력이란 재화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과연 그 단계까지 가면 유그드라실이 저 스텐스를 유지할 수 있을까?>
"못할걸? 방황할 거 같은데. 타락하거나. 마법사 전원이 사회에 튀어나오면 인간과 마법사의 입장이 뒤집히는 건 순식간이야. 그때까지 유그드라실이 마법사의 인권 어쩌네를 운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복잡한 문제야. 내가 보기엔 이런 이야기에 천후가 아예 얽히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의 순수한 선의가 그걸로 그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리라.
디제스터에게 고통 받는 세계에 좀 더 빠른 구조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건 아주 숭고한 뜻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마법사들이 인정받는 세상을 바라는 유그드라실, 마법사에 대한 규제가 풀리지 않았으면 하는 인간 세상. 이 사이에 끼어서 부딪히게 되면 그라는 인간 자체가 망가질 가능성이 컸다.
<그런 면에서 최초 프레젠테이션 레벨에선 큰 문제는 없겠지.>
"응.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었으니까."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어버린 천후의 구국 행동이란 건 아주 직관적인,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이루어졌다. 저 먼 전쟁터에서 일어난 병사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를 파탄의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거대 괴물을 상대로 맞상대하는 위업을 펼쳐 보인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신위와 브레스가 맞부딪혀 드래곤의 목을 날려버리는 광경까진 못 본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인간이 되었다. 그냥 이 상태로도 그의 발언력은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리라.
<그래도 사전공작은 좀 필요할 테지만, 그것에 대해선 그에게 말해두었고…. 당분간 걱정할 거리는 아니군.>
"미리 걱정해둔 거뿐이야. 이런 거 걱정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까. 잡일 담당이라니까, 아주."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친란은 잠시 웃다가,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후후…. 또 모르지. 여기로 오면 그가 고생하고 있던 너에게 상을 내려줄지.>
"…농담하지 마."
<그래? 뭐 필요 없다면야…. 쪽…. 나는 좋은 일이다만.>
빠직. 자기도 모르게 이마에 실핏줄을 세운 셀레나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리다가, 컴퓨터 전원을 꺼버리곤 물었다.
"….너 지금 어딘데?"
<올라올 수 있도록 말해두지.>
초조해 하는 기색에 즐거이 웃은 친란은 잠든 그의 입술을 맛있게 탐했다.
*
악몽에서 깨어난 천후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끈적끈적한 느낌. 부드러운 것이 몸을 스치고 있는 느낌. …아래쪽이 따뜻한 것에 감싸여있는 듯한 느낌.
"……."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나서 이런 건 다 사라졌어야 할 텐데. 아니면 잠이 얕았나? 몰려오는 두통을 이겨내며 상체를 일으킨 천후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쉬이 파악할 수 있었다.
"……."
흑발과 금발의 뒷머리가 그녀의 양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어 그것을 경쟁하듯이 핥고, 물고, 빨아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듯, 가슴과 허리와 둔부를 세게 만져대며.
한 명은 어제의 반쯤 찢어졌던 옷을 벗은 나신이었고, 금발 쪽은 팬티만 입은 채로 엉덩이를 씰룩이고 있었다.
단숨에 안 그래도 굵어져 있던 것이 일어났다. 그것을 보고서야 그의 기상을 알아챘는지 두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 천후. 일어났어?"
"이런. 숙면을 방해했나?"
벌써 한참을 그러고 있었는지, 둘의 입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연결되어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하. 이 음탕한 것들이….
천후는 무심코 창밖을 보았다. 이미 해는 떠올라 있었다.
"란. 여기 체크아웃이 몇 시까지지?"
"음? 여긴 내 방이나 마찬가지니 체크아웃 같은 건 없다만?"
"그래?"
톤 변화 없이 대답한 천후는 그대로 두 여자를 들어 친란을 아래로 두고, 그 위에 셀레나를 얹었다.
"꺅!"
"아!"
둘의 비명을 듣고도 아랑곳하지 앉은 그는 위쪽에 드러누운 금발의 단 하나 입고 있는 속옷마저 벗겨내 버리며 말했다.
"그럼 오늘 아예 못 내려갈 줄 알아."
2주 넘게 쌓였던 것들이 전력으로 해방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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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미숙한 부분을 많이 보이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성장하는 과정이라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써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