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하렘-114화 (114/324)

114화

<너머로>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흰 천장과 거기에 박혀있는 LED 등이었다. 그것들을 보고서 천후는 자신이 병원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심하면 병원에 드러눕는구만.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으…."

"주인님!"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니 바로 몰려오는 통증에 천후는 털썩하고 다시 드러누웠다. 그 순간,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희주가 가슴에 얼굴을 묻어왔다.

"아…. 희주 씨. 괜찮아요. 이제 일어났으니까…."

"네…. 네…."

딱히 그녀의 얼굴을 들게 해서 확인해보지 않아도,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을 시켜버렸다. 천후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뒷머리를 천천히, 정수리부터 허리까지 쓰다듬었다.

그 덕분인지,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놀렸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야. 왜 이제야 일어나는 거야?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기나 해?"

"아. 셀레나."

조금 주위를 돌아보니, 침대 옆에는 셀레나, 강호, 이브, 에바 모두가 모여서 글썽거리고 있었다. 지금까진 통증과 희주의 기색에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의 몸에는 링거뿐 아니라 수많은 검사 장비들이 붙어있었고, 침대 왼편에는 심박 수 측정기가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정말 심각했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마지막에 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며칠이나 지났지?"

"나흘이야, 나흘! 우린 다 네가 식물인간이 된 줄 알았다고!"

"……."

할 말이 없다. 내가 잘못했네. 입을 다문 천후는 역정을 내는 셀레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가만히 눈가가 새빨개진 그녀의 볼을 훑었다.

"미안해. 걱정시켰다."

"…알면 일찍일찍 일어나란 말야."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를 낸 그녀는 그의 손 위에 양손을 겹치며, 그의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갔다.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던 천후는 한참이 지나서야 물었다.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된 거예요, 희주 씨? 드래곤을 퇴치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미미르의 퇴치 보고까지는 기억이 남아있어, 드래곤을 잡은 것까진 알겠다. 그러니 이제 그 뒤에 있었던 일들을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희주는 지난 4일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드래곤 레이드가 끝난 후. 영천후를 비롯한 모든 일리미네이터들이 유그드라실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의 인원은 당일 완치가 됐다. 하지만 천후는 회복을 시켜도 회복이 더딘 데다가, 깨어나질 않아 미연이 그에게만 집중 치료를 하겠다고 미쳐 날뛰는 것을 막느라 고생했다고 말했다.

"누나가…."

"네.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년간 자식같이 길러왔던 애-그녀에게 천후는 애다-가 팔이 날아가고, 드래곤과의 충돌로 인해 척추가 찌그러져 키가 줄어들 정도로 몸이 개박살이 나서 와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질 않는다면 누구라도 제정신이 아니리라.

그러나 그녀는 유그드라실 전체에서도 가장 강력한 회복마법사. 그녀가 천후 한 사람에게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일리미네이터 외에도 다른 사유로 유그드라실을 찾는 환자들도 얼마든지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전담으로 붙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행히 천후의 몸 자체는 이틀 차에 대부분 회복되었고, 의식만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뒤로는 지상으로 이송되어 이렇게 병원에 내려와 있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매일 한 번씩은 꼭 문병을 오십니다."

"…나중에 꼭 한 번 사과해야겠네요."

유그드라실에 친한 사람을 손에 꼽자면 다섯쯤 있지만, 미연은 그중에서도 그에게 있어 가장 특별한 사람이었다. 누나이자 어머니와 마찬가지인 존재로, 양아버지인 최완보다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뭔가 손해를 끼쳤다거나 그럴 때만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처럼 다쳤을 때도 천후는 그녀에게 사과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법이나 규칙 같은 명시적인 의무가 아니라…. 자식의 의무라고나 할까? 몸을 함부로 굴려서 죄송합니다 하는.

"그 뒤로는…. 분배작업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영천후 주도하에 이루어졌어야 할 그것은 그가 크게 위독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강호가 대신 치렀다.

기본적으로 천후의 대변인은 홍희주였지만, 일리미네이터 간에 일어나는 문제는 그들끼리 처리하는 것이 상례인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다들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R.D.C 해제도 선언했으니 심적인 여유도 생겼을 테고."

R.D.C 발족 이후. 대부분의 일리미네이터들이 강제적인 분위기에서 일해야만 했다. 돈은 되지만, 하기 싫은 고난도의 일에 억지로 투입되는 마음이란 뭐. 헤아릴 것 없이 최악이리라.

"그 외에 따로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면…. 미안하지만 네가 몸을 추스르고 직접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음…. 그렇겠죠."

이강호가 대리인 명분으로 아무리 말해봐야, 당장 정점인 영천후는 몸져누워서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사람들이 제대로 말을 들어 먹을 리가 없다. 당연한 부분이라 천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친란과 레이나드 씨도 거의 매일 찾아오고 있다."

"흠…. 친란 씨에겐 날을 잡아서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사례를 해야죠."

드래곤 트라이가 혹시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천후는 친란에게 부탁해 희주 일동을 그녀에게 맡겨두었다. 그 트라이 시간 동안 친란과 희주들은 엔체스터 가문의 전용 비행기에 탑승, 그 안에서 트라이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혹시나 실패할 것 같으면 바로 중국이든 미국이든 날아가, 친란의 힘으로 신분을 보장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선 지극히 힘든 일인데 그녀는 군소리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게다가 천후의 신변을 보호해주기로 했던 정부들. 미국 중국, 일본 정부는 그가 만약 레이드 도중 죽었다면 그의 일가족을 거침없이 내버렸을 테지만, 그녀라면 끝까지 돌봐주었으리라.

천후에게 있어선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퇴치금으로 트란제비야는 60억 달러를 받았습니다."

희주가 조용히 한 말에 천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46억 얼마 아니었어요?"

"60억입니다."

갑자기 확 늘어난 금액에 천후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희주가 부연설명을 해왔다.

“정부와의 두 번째 거래 때 공격대원들의 퇴치보상을 협의하면서 추가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드래곤 레이드 성공 이후, 주인님이 대통령님과 정부지지 발언, 그리고 대통령님과의 몇몇 일정을 소화하는 조건을 포함한 가격입니다.”

“…그걸로 그렇게나 올려 받을 수가 있어요?”

천후가 놀라 물었지만 듣고 있던 셀레나는 오히려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답했다.

“지금 해명진 정부는 정말 최악의 레임덕이니까. 원래부터 심했는데 이번 드래곤 사태로 정점을 찍은 거지. 임기 마지막까지 네 이름 위에 올라타서 버티려는 게 눈에 훤한걸. 그런 상태에서 우리 쪽 퇴치금은 공표를 안 한 상태였으니까 여지가 있었어. 원래 돈으로 받아주는 거 자체가 대폭 할인가였으니까. …그래도 희주가 진짜 올려달라고 말했을 땐 좀 놀라긴 했지만.”

“이 나라 정말 망하는 거 아냐?”

60억 달러, 6조 원쯤 되면 이제 받는 사람이 덜컥 겁이 나는 액수다. 하지만 셀레나는 빙긋이 웃으며 그의 볼을 검지로 쿡 찔렀다.

“네 걱정이나 하세요. 네 걱정이나. 너 이제 퇴원하면 큰일 났다.”

“응?”

“후후후. 뭐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그리고 그 이후론…. 국가 총력이 서부 재건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잦은 키메라 등장 때문에 서해 연안의 상황은 심각했다. 일리미네이터들의 공격은 군의 그것에 비해 훨씬 섬세하지만, 그 빈도가 이렇게까지 늘어나면 별수가 없다.

뭣보다 드래곤 레이드 당시의 웨이브를 막는 과정에서 일어난 피해가 대단히 끔찍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피난해있는 도시까지 디제스터들이 침범했으리라.

드래곤 등장부터 퇴치까지. 채 1주일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전 국민이 모두 부산까지 남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부조차 세종시에 임시로 머무르지 않았던가? 상당수의 시민은 충북, 충남지역 이남으로는 내려가지 못했다.

도로는 피난을 위해 타고 나온 차들로 꽉 차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 이런데 디제스터가 내륙으로 조금 더 들어왔었다면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이제 드래곤은 퇴치되었다. 시민들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러나 드래곤과 처음 교전한 덕모도 인근, 강화도, 파주, 화성, 그리고 서해 연안에 거주지를 두고 있던 이들은 망가져 버린 자신들의 터전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임시 집단 거주지를 만드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천후는 잠시 찬휘에 의해서 날아가 버린 트란제비야 사무실과 그 상가 건물을 떠올렸다. 그나마 상가의 형태가 남아있는 상태임에도 굉장한 분노와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완전히 초토화된 집과 거리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지. 천후로선 상상도 가지 않았다.

"……."

천후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은 덕에, 뭘 해야 할지도 대충 감이 왔다.

"기회라고 해야 하나, 이걸."

"무슨 말씀이신지요?"

희주가 조용히 묻는 말에 천후는 그저 살짝 웃었다. 하긴. 이 부분에 대해선 구상만 하고 있던 거니까. 그녀와도 깊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냥 아이디어 수준인 이야기이긴 한데…."

천후는 조용히 입을 벌려, 그동안 자신이 틈틈이 생각해왔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 몇 마디가 나왔을 땐 셀레나가 고개를 살짝 저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희주가 말했다.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네."

고개를 끄덕이는 희주를 보며 천후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옆에서 같이 듣던 셀레나는 당황하는 목소리를 냈다.

"잠깐 희주. 가능성이 문제가 아니라…. 어휴. 대체 초기에 얼마나 고생을 하려고…? 넌 어떻게 목돈을 얻자마자 바로 그걸 쓸 방법을 생각하니?"

"하하."

할 말 없는 이야기라, 천후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었다.

“바보. 너 정말 고생길로 가는 거야. 제대로 인지는 하고 있어?”

“에이. 너무 그렇게 과장해서 말하지 마. 그리고 어차피 확장은 하려고 했잖아.”

“아니…. 어휴. 널 말리느니.”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린 셀레나는 그의 손에 볼을 대면서 그 손등 위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써내려갔다.

"그럼 일단 포섭이 쉬운 사람부터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그동안 희주는 바로 폰을 꺼내서는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뻥 하고 열리며 한 남자가 달려 들어왔다.

"천후! 일어났다며!"

"아. 레이나드 씨."

"진짜 일어났네! 잘됐어! 잘됐다고!"

발에서 불이라도 날 것 같은 속도로 달려온 그는 천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미 병원으로 오고 있던 도중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천후는 손을 내밀어 굳게 악수를 했다.

"윽…."

"뭐야? 아직도 아픈가? 치료를 그렇게 받았는데?"

"조금…. 안쪽이 아직 상했나 보네요."

"자네도 무적은 아니구만."

"누가 무적이겠어요."

쓰게 웃은 천후는 잠시 그와 일리미네이터들의 근황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숨을 살짝 헐떡였다. 정신을 차린 것까진 좋은데, 이 이상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즉각 그것을 포착한 희주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쉬셔야 합니다."

단박에 사람들은 그것이 천후에게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나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임을 알았다. 하지만 천후는 그녀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누우면서도 말했다.

"잠시만요. 희주 씨. 레이나드 씨를 부른 이유는 끝까지 말씀을 드려야죠."

"……."

모두에게 축객령을 내리던 그녀는 주인의 말에 잠시 기세를 죽이며 물러났다. 한빙설원에라도 선 듯한 느낌에 나가려고 했던 레이나드는 그의 말에 움찔했다.

"무슨 소린가?"

"일단 먼저…. 제가 형님 되시는 분에게 실례를 범하는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불쾌하시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내가 자네에게 불쾌할 일은 없어.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니니까."

단호하게 답하는 레이나드의 말에 천후는 살짝 미소 짓고는, 다시 통증을 이겨가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레이나드 씨. 트란제비야의 공격대장이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연봉은 빌라이저의 배로 드리겠습니다."

"!"

레이나드의 선글라스가 흘러내렸다.

============================ 작품 후기 ============================

한참 진지했으니 당분간 다시 좀 헐렁헐렁하게. 아이고야.

선작, 추천, 쿠폰,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검사기 돌렸는데도 오타가 왤케 많아; 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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