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1차 트라이 당시에도 이 용오름 페이즈까진 도달했었지만, 그 뒤에 치렀던 것은 제대로 된 교전이라고 할 수 없었다. 거의 데미지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이 지나자 귀찮아져서 발동한 것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드래곤 입장에선 그때까지 별 피해도 못 주던 놈들을 가지고 놀다가 방심해서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트라이를 시작한 지 3분이 채 지나지 않아 몸의 45%가량이 날아가, 구멍이 숭숭 뚫린 몸이 된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야말로 놈의 진정한 제 2 페이즈를 볼 수 있으리라. 레이나드는 그렇게 판단했고.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번쩍! 먹구름 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빛의 속도로 바닥을 내리친 그것은 여러 번 하늘과 땅을 오가며 전격을 그렸다. 여섯 줄기 소용돌이 사이로, 그런 번개들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느 것이든 하나같이 거슬리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주특기도 아닌 강화마법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이걸로 확실하게 드래곤에게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한정되었다.
"보조팀, 전원에게 전격 보호 처치. 영천후 제외 전원, 산개비행하며 패턴을 확인합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몰아쳐서 놈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이 상태에서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판별이 되지 않는다. 입맛을 다신 레이나드가 그렇게 지령을 내릴 때였다.
"쿠워어어어어어어!"
순간적으로 드래곤이 포효했다. 이미 로어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별 영향은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레이나드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서 현실로 나타났다.
드래곤의 포효와 함께 주변 공간이 일그러진다 싶더니만, 키메라와 그렘린 페이스들이 나타난 것이다.
'근접 소환!?'
이건 확실히 처음 보는 패턴이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있었던 멸급 디제스터 전투 기록 전체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문에 대비할 수 있었다.
"포메이션 C!"
파팟. 사전에 정해둔 진형 중 하나를 취할 것을 명령한다. 간단하다. 멸급 디제스터가 소환하는 하수인들, 쫄에 대비하는 진형.
40인의 전투 팀 중 두 개 팀, 16명을 떼어내어 따로 상대하게끔 하는 진형이다. 키메라를 상대하는 이들 중 핵심에는 이강호가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놀고 있기 그랬는데, 잘됐군."
청색 빛줄기가 하늘을 갈랐다.
*
<키메라 추가 등장.>
"젠장! 최소 인원만 남고 연속 트라이합니다!"
1 공격대가 드래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2 공격대라고 놀고만 있지 않았다. 드래곤이 내륙에 내려앉은 그 순간부터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경, 파급 디제스터와 끊임없이 연전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 두 마리는 여유롭게 잡았다. 하지만 그 뒤 다시 나타난 두 마리부터는 슬슬 힘이 부치기 시작한다. 영체 복구 패턴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C랭크 3명 이상은 필요한데, 그렇게 3명씩 계속 빠져나가기 시작하니 전력이 계속 누수 되는 것이다.
복구 모드가 끝나면 합류하겠지만, 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거기다 문제는 키메라만이 아닙니다.
<중국 일리미네이터 4명 부상. 2명 사망.>
로마이어가 돈을 주고 고용한 중국인 일리미네이터들의 수준이 낮았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그렇게 낮은 건 아니지만, 지난 두 달 동안 그렘린 페이스와 페이스리스에 완전히 특화된 한국 일리미네이터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페이스리스는 별것 아니지만, 그렘린 페이스는 파급 디제스터 중에서는 퇴치 난이도가 최상급이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분 단위로 계속해서 연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중국인들이 버텨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 사람들이 죽지만 않았어도!"
1차 드래곤 레이드에서 사망한 13명이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있었다면 최소 파급 전담반 3개가 한국 일리미네이터로 돌아갈 테고, 훨씬 원활했을 텐데! 하지만 우는소리를 할 시간은 없었다.
2 공격대장을 맡은 정태원은 최대한 빠르게 파급 전담 4인 파티마다 1명씩 한국인을 섞어 넣었다. 다행히 통역은 미미르 쪽에서 실시간으로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대응력이 일취월장했다.
<키메라 추가 등장.>
"아아아아악!"
이제 저 소리는 듣기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정태원은 소리를 지르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이미 4체의 키메라를 잡으면서 12명이 시체에만 매달려있었다. 38명으로 다시 추가로 나타난 2체의 키메라를 상대할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해내야 한다. 아니 겨우 이 정도로 징징대선 곤란하다. 드래곤과 교전하고 있는 쪽의 어려움은 겨우 이 정도가 아닐 터.
"후우우우. 작업 반복합니다!"
이제 뭐 해야 한단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일 지경이 되었다. 그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짓는 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하늘에서 20m짜리 거구의 괴물들이 날갯짓을 하며 다가온다. 하지만 정태원은 꼿꼿이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복제 괴물 주제에 까불지 마라. 이미 우리는 너희를 상대하기 위해 완전히 특화됐다고."
후오오오오! 그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오오라가 일렁였다. 그의 손이 위로 들리자,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38인이 다채로운 궤적을 그리며 놈들을 교란했다.
그 현란한 움직임에 키메라가 당황하여 빽빽하고 초음파를 내질러보지만, 이미 놈들이 도착하기도 전부터, 아니 '이놈들 이전의 놈들'을 상대할 적부터 그 대비는 끝나있었다.
"키메라 제 3 웨이브 퇴치 시작!"
*
"키메라 육안으로 확인. 이제부터 교전을 시작한다."
드래곤이 비와 회오리, 번개를 불러낸 이후. 서해안에서는 디제스터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육, 해, 공군이 총동원되어 육지에 올라오기도 전에 수많은 놈들을 피거품으로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전부 다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애초에 그렘린 페이스는 워낙 그 크기가 작고, 키메라는 완전히 죽였다 생각해도 되살아나 버리니 상대가 지극히 어려웠다.
결국, 전부 막아내지 못한 디제스터들은 육지로 올라와 설쳐대기 시작했다. 국내 모든 일리미네이터들이 투입되었지만 그들의 수는 전부 합쳐봐야 110명 안팎. 아무리 큐브 엘리베이터를 사용한다 해도 서해안 전역을 뚫고 들어오는 놈들을 전부 막는 것은 어려웠다.
"역시 전부 대응하진 못했나?"
그러는 와중, 결국 파급인 페이스리스나 그렘린 페이스뿐 아니라 키메라 하나까지 빠져서 연안에 상륙했다.
최초 목포에서 국군과 교전하여 전차 여러 대를 멈춰 세워버린 놈. 두려워해 마땅할 괴물.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병사들의 입가엔 웃음이, 눈에는 전의가 들끓었다.
"이 새끼. 대한민국 국군을 우습게보지 마라고!"
씨유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앙! 키메라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먼 거리에서,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고속으로 날아온 미사일이 놈의 몸에 틀어박혔다. 그 순간, 그 거구가 기우뚱하다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전처럼 무슨 시야에 전차라거나 그런 게 보이지도 않는다. 키메라는 당황하며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있고 말았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콰아아아앙! 천지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키메라가 서있던 도심지 한가운데에 불꽃이 피어오르며, 동시에 같은 자리에서 불기둥이 계속 치솟았다. 좌표를 받은 전장의 신. 포병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105mm, 155mm 견인 곡사포, K-9. K55, 다련장이 보이지도 않는 저편에서 불을 뿜으며, 건물이 있건 말건 조까라고 쏴 재끼기 시작한 것이다.
도망치려고 날갯짓해보지만 이미 놈 자체가 아니라, 그 ‘지역 전부’가 포격의 대상. 회피행동은 의미를 갖지 못했다.
"씨발 못 잡고 있던 게 아니라, 안 잡고 있던 거라고오오오오!"
대한민국 육군이 이딴 괴물 하나 못 잡을 거 같냐! 미사일, 대포 안 박히는 드래곤이면 몰라도!
좌표를 보낸 관측병이 장관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화력의 폭풍을 바라보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앞뒤 안 가리는 폭력의 현현에 괜히 키메라 근처에서 알짱대던 파급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키메라 역시 순식간에 기화되어버렸다.
영체 복구 패턴에 들어갔지만, 그때부턴 이미 고정 좌표다. 부담 없이 105mm 3문이 번갈아가면서 쏘면서 놈이 재생될 틈을 주지 않았다. 위치를 알고, 움직임이 묶이고, 패턴을 아는데 대한민국 국군이 질 리가 없다!
얼마가 더 지나 불지옥이 된 중심부에서 꿈틀대던 육편조각이 이윽고 완전히 멈추는 것을 보고서 관측병이 외쳤다.
"씨발! 어떠냐! 어떠냐고!!!"
드래곤 등장 후, 놈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 때부터 군인들은 국민들에게 무시당했다. 존재가치를 의심받으며 비웃음 당해왔다. 디제스터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있냐고.
하지만 그런 게 아니다. 드래곤은 그래. 못 잡는다 치자. 하지만 다른 놈들은 아니라고. 얼마든지, 화력만 풀어주면 다 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군의 화력이란. 대포와 전차의 화력이란 그렇게 섬세한 것이 아니다. 쏘기 시작하면 건물을 부수고, 도시를 날려버리는 화마로 변신하는 것이다.
일리미네이터들에게 디제스터의 처리를 맡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런 면에서 그들이 우수하기 때문이지, 단순 화력에선 어디 감히 비교 할 수 있단 말인가? 현대 문명이 이룩한 병기의 힘은 위대하다.
디제스터가 꼼짝도 못 하고 작살나는 꼴을 보며 희열의 고함을 내지르던 병사는 그렇게 한참 미친 듯이 웃다가, 천천히 그 기세를 가라앉혔다.
"어떠냐고, 이 씨발 괴물새끼들아아아아!!! 씨바아아알!"
놈은 시체가 되었다. 하지만 시체가 된 자리 주변. 수십, 수백 미터가 초토화되어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아파트단지와 상가, 학교, 놀이터들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곳은 그가 2년간 군 생활을 해온 부대의 위수 지역이였으며, 외박을 나와 pc방을 다니고, 술을 꼴아 마시고, 모텔에서 잠을 자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 도시가 이딴, 나타나기 시작한 지 10년이나 지났음에도 그 정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괴물을 잡겠다고 박살 나버린 꼴을 보고 그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씨바알…!”
그는 우리나라를 지키는 강한 병사임과 동시에, 이제 막 20대를 시작한 한 명의 젊은 청년이었기에.
*
"2 공격대가 흘린 키메라들의 처리는 순조롭습니다."
"서해안 연안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방장관의 보고를 들은 해명진 대통령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순조롭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중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드래곤을 쳤던 그 날. 해군은 드래곤 브레스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지만, 복구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드래곤에 대한 재래식 병기 공격은 자제해왔기 때문에 육군 전력은 보전되어있었고, 공군 역시 그랬다.
그래 왔던 보람이 있어서, 현재 벌떼처럼 날아드는 디제스터에 대한 대응은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포탄이 떨어지는 연안 지역의 실제 상태는 어떨까? 대통령이라지만 자국 무기에 대한 실제 위력을 직접 본 경험은 흔치 않았다.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하더라도 엄청나리라는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건물들이 남아있기나 할까? 피난했던 사람들이 돌아갔을 때 초토화된 도시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그에 대한 대비책 역시 부실했다. 당장 눈앞의 괴물들 처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덕에, 처리한 후에 대한 것은 전부 나중으로 미뤄지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크게 작용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1 공격대 쪽 상황은?"
"현재 드래곤 육체 손실 50%를 넘었다는 보고입니다."
"으음…!"
고개를 끄덕인 해명진 대통령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드래곤의 퇴치였다. 놈이 사라져주지 않으면, 뒷일이 어쩌네 하는 생각은 할 수도 없다. 만약 트라이에 실패한다면 이 나라의 명운은 그걸로 끝이다.
그는 영천후를 떠올렸다.
당돌한 청년. 20대임에도 앞뒤 생각 안 하고 자신을 모독하고, 국무총리에게 상처를 입혔던 버릇없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생각했다.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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