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태원이한테 들은 말로는 그렇다더군."
"고마워요, 레이나드 씨."
"이런 거 밖에 못 도와주는 게 부끄럽지. 감사하고 말고 할 것 없어."
로마이어에게 제안이 들어온 그 날. 확인할 것이 있어 레이나드에게 통화를 해본 셀레나는 간단히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어땠어?"
"음~. 예상했던 대로?"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며 대답한 셀레나는 간단히 터치펜을 이용해 즉석에서 ppt를 만들어 빔으로 띄웠다.
"지금 R.D.C상황을 정리해보자면 대충이래. 일단 분배의 경우 이전까지 B랭크가 반. C랭크가 반을 먹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전체의 3/4이 '멸급 디제스터 대비 예치금'이란 명목으로 빠지고, 나머지 1/4이 분배되고 있어."
"멸급 디제스터 대비 예치금?"
"응. 뭐 말장난이지."
셀레나가 어깨를 으쓱하는 것과 동시에 천후의 입에서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렇게 속 보이는 짓을.
일리미네이터는 몸으로 일한다. 몸 외의 다른 장비는 서포터, 오퍼레이터의 지원장비들이나 마도병장 정도. 그 외에 드는 자금이라면 의료비 정도가 있겠다.
이 중에서 가장 크게 드는 비용은 보통 의료비다. 직업 특성상 부상을 달고 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다쳤다 하면 보통 큰 부상이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유그드라실의 마법 치료를 받는데, 그 치료비가 엄청나다.
천후야 이미연과의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오랜 시간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로 일한 것도 있어서 할인을 받고 있지만, 일반적인 일리미네이터들에겐 대단히 큰 부담이다. 그들이 서브 퀘스트에만 매진하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의료비 명목으로 빼돌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3/4라니. 유그드라실 치료비가 비싸긴 해도 저 정도는 아니다. 키메라를 잡으면 190억 가까이 빼먹는다는 거니. 하지만 셀레나는 쯧쯧하고 혀 차는 소리를 내며 검지를 샥샥 저었다.
"에구. 우리 사장님 아직도 순진하네."
"응?"
"혹시 지금 그래도 치료비는 저 예치금에서 빠지고 있겠지~. 뭐 이런 생각한 건 아니지?"
"……."
그럼 아니냐? 입을 쩍 벌리고 물어보자 셀레나는 에효 하고 숨을 내쉬며 천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지금 로마이어는 국가의 지원을 업고 있다고. 치료비 전액은 국가에서 내주고 있어. 저건 어디까지나 순수한 포상금."
"……."
"그 외에 서포터는 몰라도 오퍼레이터는 완벽하게 군용장비로 대체. 민간장비 중 더 좋은 게 있으면 그걸 국가에서 사서 쓰게 해주고 있고. 유그드라실 위성 서포트도 키메라 출현 때마다 신청해서 지원 받고있고."
유그드라실 위성 서포트는 유그드라실 자신들이 나서서 하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 수십억 단위 돈이 까인다. 그래서 기업에서 레이드를 할 땐 자청할 때를 제외하곤 위성 서포트는 생각도 안 하는 편이다. 키메라를 예로 들자면 삼학도에서 있었던 그 교전 이후론 위성 서포트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럼 저건 완전…."
"딩동~. 축재. 자기 재산 불리기.”
“…….”
“뭐 로마이어는 굳이 이런 짓 안 해도 돈 많은데 왜 이러는지까진 모르겠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던 다른 사람이 보기엔 축재로 보일 수밖에 없지?”
"일리미네이터들이 뛰쳐나오지 않는 게 용하네."
셀레나의 말대로라면 로마이어 한 명을 제외하면 평소보다 다들 훨씬 손해를 보는 구조다. 치료비가 안 빠진다 해도…. 파급이라면 1억을 네 명이 쪼개 먹는 건데. 이건 기존의 서브 퀘스트보다 안 벌린단 소리다.
하지만 셀레나는 살며시 그의 왼쪽 허벅지에 앉으며 말했다.
"어떻게 뛰쳐나오겠어. 그 아래에 안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뼈가 있다.
"일이 끊기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 국민 여론에서 R.D.C에서 함부로 빠져나가면 멸급 사태가 끝나도 활동하기 힘들걸. 매국노 소리 듣기 딱 좋으니까. 로마이어가 머리는 잘 썼어. 일리미네이터들을 국가에 반쯤 귀속시킨 거니까. 이래선 함부로 국내를 뜰 수도 없지."
이전. 일리미네이터들이 하다가 안 되면 외국으로 도망가면 그만이라는 식의 설명을 했지만, 지금은 약간 상황이 다르다. 자국이 정말 존망의 위기에 빠졌던 상황에서 도망갔던 놈에게 누가 신뢰를 줄까?
마법사도 결국 인류, 사람이다.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이상 그 나라 사람의 감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손에서 불 나가는 것 빼면 똑같은 인간이다. 이 때문에 그들도 보통 사람들보단 약하더라도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
즉, 극도의 부유층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도망친 이들은 마법사 사이에서도 소외당하게 되리라.
"그래도 R.D.C 내부엔 불만이 쌓여있긴 하단 거네?"
"응. 대신 터질 수 없는 불만인 거지. 그리고 그걸 공론화시킬 힘이 있는 사람도 내부엔 없고. B랭크들이 있긴 한데…. 로마이어가 최근에 조금 당근을 줬다나 봐."
"당근?"
"응. 지금까진 키메라가 나타날 때마다 B랭크 전원출동이었는데, 이제 다시 로테이션 돌린대. 그리고 자기가 참가 안 하는 레이드에선 예치금을 B랭크가 나눠 먹고."
"……."
왜? 그냥 예치금이란 이름 때고 자기 돈이라고 광고를 해라. 어처구니가 없네. 하지만 B랭크들이 저렇다면 정말 대항할 사람이 없으리라.
B,C랭크만 있을 때, 경급 레이드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C랭크다. 그들이 없으면 B랭크의 화력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 부분을 언급하며 C랭크 전원이 들고일어나면 로마이어도 조금 발을 뺄 수밖에 없겠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로마이어 입장에선 그들 중 몇 명 쳐내는 것은 일도 아니고, 여론도 등에 업고 있으니까. 막말로 지금 C랭크들이 분배문제로 파업한다면 로마이어가 제압하기 전에 전 국민 시위가 일어날 판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는데 돈이 중요하냐는. 되지도 않는 말이지만, 그 되지도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이 수천만쯤 되면 대통령도 기게 하는 절대적인 언령이 된다.
"그러니까. 좀 다른 이벤트가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터질 수가 없거든. 대안을 줄 수 있는 누구 씨가 없으면."
살살. 목을 간질여오는 손길에 천후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는 거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빔이 꺼지고 거실 불이 다시 들어오는 그 잠깐의 어둠 동안 그녀와 입을 겹쳤다.
입술만 간신히 닿았다 떨어진 거지만,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마주 봐오고 있었다.
'집 안에 아이들만 없었어도….'
자기도 모르게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천후는 흠흠 하고 그녀를 들어 옆자리에 앉혔다.
"보고 고마워."
"아녜요. 사장오빠."
꺄르르 웃은 그녀는 그의 등을 슥슥 쓰다듬다가 물었다.
"그래서…. 어쩔 꺼야? 80억 받고 움직일래?”
"이게 참 유그드라실이 설득이 안 먹힌단 말이지…."
로마이어를 경유하지 않고 일을 따내려고 해도, 유그드라실 쪽은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대표자가 생겼다면 그쪽에 올인하겠다는 태도였다. 단순히 대한민국 정부의 청원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것이 유그드라실이 세계에 내비치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마법사 간에 일어난 문제엔 간섭하지 않는다.
"결국 이번 한 건만이라도 로마이어를 통해서 받아야겠지. 적어도 경쟁자라는 걸 유그드라실에 보여야 해."
그렇다면 유그드라실은 비율에 차이는 있겠지만, 이쪽에도 일을 돌려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다시 최종승자를 선택하고, 최종승자가 재편한 구조에 맞춰서 중계하리라.
"그리고 그러려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야겠지."
그것도 조금 공을 들인 압도적인 모습을. 화면을 보고 주판을 좀 튕겨보던 천후는 결정을 내렸다.
"친란 씨와 레이나드 씨에게 연락 좀 해줘. 레이드를 뛰겠다고."
*
로마이어는 영천후에게서 다음 출현할 키메라 퇴치를 수락했다는 말에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토론회에 같이 참석했던 B랭크 남자, 차성준이 물었다.
"로마이어. 너무 많은 금액을 제시한 건 아닌가?"
현재 R.D.C는 키메라를 퇴치했을 경우 62억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그러니 천후에게 제시한 80억은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마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크진 않아. 솔직히 딜을 해오면 좀 더 올려야겠지. 120까진 물러날 생각이야."
"그 정돈가?"
"당연하지. 너나 나나 솔직히 꽤 지쳤잖아. 쉬는 날도 없이 키메라를 잡았는데…. 놈을 돌려서 우리 전투 피로를 풀 수 있다면 120억이면 싼 비용이지."
영천후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 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조 3단계에 이르고 나서 R.D.C, 그중에서도 B랭크의 전투 피로는 극에 달했다. 키메라는 이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타나고 있었다. 어떤 날엔 하루에 두 마리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들에 B랭크 전원이 투입하는 건 슬슬 한계였다. B랭크를 로테이션으로 돌리기 시작한 건 보상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가장 컸지만, 이 부분도 크게 작용했다.
키메라 하나 잡는데 20분이면 충분해졌지만, 키메라와의 교전은 부상당하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크게 지치게 만든다. 패턴을 완전히 암기하고 있는 작업이라 해도 그렇다. 까딱 실수하면 죽는다는 환경이 변한 건 아니니까.
C랭크들이 불만이 쌓여있는데도 터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었다. C랭크들은 그래도 경급 레이드는 매일 투입되고 있지 않았으니까. 공격대장을 제외하면 말이다.
"어차피 판도는 나에게 넘어왔어. 놈이 아무리 충격적인 짓을 하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야."
"그렇긴 하겠지만…."
"그놈이라면 일부로 떨궈둔 20 몇 명만 다 끌어모아도 키메라를 잡을 수 있겠지. 그놈들을 돌려서 R.D.C 전체 키메라 레이드 빈도를 줄일 수 있다면 이득이야."
그 말에 남자, 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이제 키메라라면 지긋지긋했다. 멸급 등장을 대비한 훈련이니 어쩌니 했는데, 이제는 훈련할 건덕지도 없을 정도니까.
그래도 위험한 구간은 종종 나오니 집중하지 않을 수 없고, 연일 전투 투입은 정신력을 갉아먹는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러니 지금은 좀 쉬라고. 뭐야? 이런 거 처음 보나?"
"…좀 그렇지."
성준은 로마이어의 호텔에서 헐벗은 여자들이 따라주는 술잔을 떨떠름하게 받으며 답했다. 죄다 백인 금발 여자들인데,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여성의 중요한 부분이 전부 드러날 듯한 복장들이었다.
토론회에서 입안의 혀처럼 굴어준 이후, 그는 로마이어의 새로운 수족이 되었다. 딱히 이렇게까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정신 차려보니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다.
'안 좋은데.'
그도 남자이니 주지육림에 빠지고 싶단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굴리고 있는 걸 보니 부러움보단 환멸이 든다.
로마이어는 마치 자신의 이해자를 찾는 듯이 그에게 날마다 자신이 대외적으로 보여주지 않던 모습들을 오픈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부담감이 날로 더해져 갔다.
로마이어가 대한민국 일리미네이터의 정점에 섰으니 그 꿀을 빨고자 한 건 사실이지만, 그라는 인간 자체의 인간성엔 의문부호가 많다.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모습들만 보더라도 그가 한참 일그러져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총애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성준의 생각과는 달리, 로마이어는 여간 그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물심양면으로 그를 챙겨주고 있었다. 박찬휘가 워낙 모자란 놈이었다 보니, 그 대체재가 평타만 쳐도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적당히 붙어있다 빠지려고 해도 입장이 난처해진다. 재수 없으면 원치 않는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생겼다. 성준은 엉겨붙어 오는 여자를 밀어내면서 안색을 굳혔다.
"뭐야. 서양인은 취향이 아닌가?"
"아니…. 난 이런 방탕한 거 그렇게 안 좋아해."
"하하하! 그런 소리를. 아직 젊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지. 좋아하게 되게끔 해주지."
로마이어가 껄껄 웃으며 고갯짓을 하자, 금발 여성들이 꺄르르 웃으며 남자의 사지에 달라붙어서 침실 쪽으로 데려갔다. 성준은 당황하며 발버둥 치려 했지만, 수가 너무 많아서 여자들인데도 빠져나올 수가 없다.
마법을 쓰면 죄다 날려보낼 수 있었지만, 성준은 일반인에게 마법을 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잠깐! 로마이어!"
그의 이름을 외쳐보지만 이내 방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바지 버클이 풀리고 바지가 흘러내려 갔다. 그는 기겁했다. 그때. 바지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중요한 전화야! 꺼내서 줘!"
한참 그의 몸을 물고 빨아대던 여자들은 서로 마주 보다가,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자 공손히 그것을 바쳤다.
로마이어와 같이 있던 남자니, 그도 VIP다. 무슨 높은 분인진 모르지만, 이럴 때 눈치 없이 계속했다가 봉변을 당한 직업여성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기에, 그녀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전화를 받았다. 편해진 얼굴은 곧 심하게 일그러졌다. 성준은 눈치를 보고 있는 여자들을 피해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로마이어!"
다급한 목소리에 슬슬 자신도 여자를 안으러 갈까 생각하고 있던 로마이어의 움직임이 멈췄다. 차분한 편인 저 남자가 언성을 높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왜?"
"좋지 않아. 그가…. 영천후가…. 키메라 10인 레이드에 성공했다는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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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 : (이새끼가 좀 적당히 또라이면 따까리짓도 할만한데...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