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결국 가버렸어…. 저 바보.”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천후가 나가버린 사무실 안. 희주는 늘 변화 없는 그 표정 그대로 그녀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차가운 손. 하지만…평소보단 차갑지 않다.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희주도…겁나지?”
“…….”
“이번에…만약 천후 죽으면…나 이쪽에서 손 땔까봐.”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오빠도 그도 말리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의 말에, 희주는 느릿하게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그때는…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응.”
그 손길에 몸을 맡기며 셀레나는 눈을 감았다.
아아. 나는 왜 저런 바보를 마음에 두고 만 걸까? 구해진 날? 아니야…. 분명 그날도 있었지만…그 뒤로 점점 깊어졌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걸. 그러면서도 올곧은걸. 가끔 기특한 소리를 하잖아.
그런 게 쌓이고 쌓여 가슴에 맺힌다.
특별해지고 만다.
그것이…조금은 일그러진 형태라 할지언정. 마음을 허락하고 말아.
“돌아오면…가만 안둘 거야.”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치?”
후후 하고 마주보고 웃은 셀레나는, 무의식적으로 TV화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모습이 보였다. 입이 다물어지며 몸을 돌려 뚫어지게 보게 되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희주는 언제까지고 꼭 감싸 쥐어 주었다.
*
“―강화 주문 봉인 해제. 마력 완전 개방.”
번쩍. 던전에 들어오는 즉시 강화주문의 봉인을 푼 천후는 천천히 사방을 돌아보았다. 오퍼레이터의 지원이나 기기적인 도움이 없지만, 이곳은 천후의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TV화면에서 마지막으로 보인 건물을 외워 둔 천후는 레이나드와 합류를 꾀하려 했다. 핏빛 안개가 껴있긴 했지만, 지리에 익숙한 천후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 츠르륵 츠르륵 소리를 내며 온 사방 땅바닥에서 검붉은 실선과도 같은 것들이 꿈틀대며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화면을 통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진작에 파악하고 있던 천후는 작게 코웃음 쳤다.
“그러고 보니 아직 신고식을 안 치렀었지.”
그것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천후는 오히려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자살행위에 가까운 행동.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냥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사람의 인기척을 포착한 실선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몰려들어, 이윽고는 파도와 같아져 그에게 쏟아져 날아왔다.
슈르르륵.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에워싼 그 실선의 파도는 그대로 인간의 피를 빨아들이기 위해 피부를 파고들려했다. 그러나….
들어가지지 않는다.
온몸이 시꺼메질 정도까지 수많은 실선들이 모여서 달려들었건만, 이 인간의 몸을 파고들 수가 없었다. 그것에 당황한 걸까? 실선들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졌다 모인다 싶은 그 순간.
“하아아아아아!”
순간적으로 무릎을 치켜든 천후는 그대로 몸 전체를 아래로 가라앉히며 발바닥으로 땅을 찍었다.
꽈르르르릉! 그러자 지면이 요동치며 그의 몸을 중심으로 아스팔트와 보도블럭들이 요란하게 깨져나갔다. 그 사이사이 틈새를 통해 면밀히 깔려있던 실선들은 그와 동시에 체내에 보관한 피들을 토하면서 괴사했다.
그것에 놀란 걸까? 그의 몸에 붙어있던 실선들이 물러나며, 제들끼리 꼬이면서 약간 더 두꺼운 촉수를 만든다.
하지만 천후는 그것에조차 눈길하나 주지 않고는, 그대로 ‘배틀 시그널’이 새겨진 오른팔을 치켜들어 하늘 위로 쏘아냈다.
콰앗…! 그의 몸에서 흰색 빛 무리가 터져 나와 저 하늘 위 던전 경계까지 닿는다. 나는 여기 있다. 너의 상대는 나다라고 모든 수단을 다 발휘하여 디제스터에게 고한다.
슈르르르륵 슈륵 큐르르르…. 그에 응하듯, 자신에게 위협한 존재가 이곳에 등장했다는 것을 감지한 디제스터는 주변의 실선을 모두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뭉치고 뭉쳐 5,6m높이에 이르자, 천후는 그제야 얼굴을 폈다.
“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그렇게 말한 천후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시야의 사각인 후방에서 검은색 촉수가 날아와 그가 있던 자리를 스쳐지나가 땅에 꽂혔다.
B랭크 일리미네이터를 리타이어 시켰던 기습공격. 하지만 그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천후는 빙긋하고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럼 어디…!”
주변을 빠르게 돌아본 천후는 근처의 상가건물 사이를 삼각차기로 뛰어서 차고 올라 옥상으로 올라가고선, 그대로 몸을 돌려 6미터 크기가 된 촉수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피육! 퓨퓻! 공기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에게 검은 촉수가 날아왔지만, 천후는 돌아보지도 않고 방향을 바꿔가며 뛰면서 그것들을 전부 피해냈다.
‘얼른 눈치채야하는데….’
일전 상대한 블랙 레오파드 수준까진 아니지만, 이 공격들도 충분히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놈은 날리는 숫자가 많지 않은가? 절대 혼자서 상대해서 어찌 될 녀석이 아니다.
천후는 그렇게 결론지으면서 레이나드 공격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
“하연 씨. 지금 저희 부상자가 얼마나 되는 거죠?”
“24명중 18명이 부상이에요. 남은 사람 중 두 명은 마력이 거의 다 소진되어가고요. 저는 아직 마력을 온존하고 있지만….”
하연이라 불린 공격대의 두 명 뿐인 B랭크 일리미네이터 중 하나인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레이나드의 물음에 대답했다.
교전을 시작한지도 30분 이상이 지났다. 주변 지역 전역에 촉수를 깔아놔 숨거나 멈추는 족족 포착당하고 마는 상황에서 사망자가 아직까지 안 나온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순전히 레이나드의 지휘 덕이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그들의 여력은 한계에 치달아있었다.
결국 유그드라실에 요청한 증원은 오지 않았다. 하긴, 누가 오려고 할까? 목숨을 내놓는 짓이다. 예상은 했었다. 예상은 했었지만…와주길 바랬다.
그들이 와주지 않은 30분 동안, 공격대 전력 대부분이 사실상 리타이어 당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학교 건물 안에 사람들을 눕혀놓고 광역방어막을 펼쳐서 버티고는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계란껍질처럼 깨져나갈 것만 같다.
“공대장님. 저도 방어주문을 도우면….”
“안됩니다. 그러면 끝장입니다. 바로 총력을 이곳에 집중할 겁니다. 지금 놈이 이곳을 건드리고만 있는 건 당신이 숨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예요.”
이런 상황에서 하연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풀 캐스팅 주문을 외워보지 못했다. 그녀까지 노출당하면 어쩌면 있을지 모르는 단 한 번의 반격기회까지 날아가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그 희망의 촛불이 꺼지기 직전이라 하더라도!
‘흑…!’
하연은 이미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선글라스가 깨져나가 버린 레이나드의 얼굴을 보고선 눈물을 삼키며 집중했다.
어느 시점부터 레이나드는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던 기재들이 파손되어 유그드라실의 보조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통신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사람들을 수습하고, 죽지는 않도록 최대한 보호해서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버틴 이유는 마지막 반격을 위해. 자신은 그때를 위한 단 한 자루의 창. 어쩌면 그것을 써보지도 못할 수도 있지만…기회를 노리지 않으면 온 찬스도 포착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하연은 결연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어? 공대장님. ‘텐타클 뱀파이어’의 공격이 좀 약해진 것 같지 않아요?”
“그런…가요?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방어막 위를 기어오르고 검은색 촉수로 두드려대던 것들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없어져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레이나드는 잠깐 생각하다가,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가 학교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저편에서 공기를 통해 작은 폭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설마!”
폭음 소리는 작지만, 간헐적으로 여러 번 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 한편에서 두꺼운 촉수가 건물 사이로 치솟아 오르다가 터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걸 한 주체도.
“트란제비야! 트란제비야의 일리미네이터군!”
장대비 사이로 건물 옥상 사이를 뛰어다니는 인영만 보고서도 천후를 알아본 레이나드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천후는 그대로 뒤따라 날아오는 후속 촉수들을 손날로 쳐내면서 그의 옆에 내려섰다.
“후우! 아! 생각보다 시간 오래 못 끌었네요! 원래는 다른 분들이 회복하는 시간을 벌 생각이었는데.”
“됐어! 그런 건 이미 다 끝장난 판이야! 18명이 리타이어. 그것들 안 죽게 하려면 회복마법 요원은 못 빼. 나, 당신, 그리고 B랭크 한 명! 이게 전부다!”
“깔끔하네요.”
쓰게 웃은 천후는 비에 홀딱 젖어버린 앞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운동장 쪽을 내려 보았다. 그 곳에는 더 이상 실선 크기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1m 두께는 되어 보이는 촉수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어 더욱 합쳐지고 있었다.
“세상에…! 여길 정말 들어온 건가요? 당신 미쳤군요?”
“안 그래도 욕을 바가지로 먹고 왔죠.”
뒤따라 옥상으로 올라온 하연이 놀라며 하는 말에 웃으며 대답해준 천후는 촉수들이 모여드는 곳을 가리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덤비는 걸 죄다 작살냈었거든요. 제일 컸던 게 한 8m였나…. 거기에 제가 여러분과 합류한 걸 알아챘을 테니, 이번엔 본체로 덤빌 겁니다.”
“하. 젠장! 우리가 30분 동안 빌빌 싼 놈을 혼자서 본체가 드러나게 했다고? 못해먹겠군, 정말!”
“그래도 8m가 넘어가니 수복과 함께 공격까지 해오니까 저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니까…도와주세요.”
천후가 깔끔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레이나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놈은 시작부터 갈려나간 B랭크랑 경력도 똑같은데 하는 행동이 왜 이리 하나같이 맘에 드는지 모르겠다.
그 때문일까?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공격대장으로서 딱딱한 말투를 유지해왔던 그가 실실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자기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너 그거 뻥치는 거 아냐? 저번처럼 혼자 다 때려잡을 수 있는데 공 나눠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아, 아녜요! 이번엔. 웁!”
“하하하. 역시 그땐 넘겨준 거 였구만! 뭐 좋아. 좋다구. 어차피 뒈질 거면 여기서 멋지게 싸우고 죽어보자. 트란제비야, 우리 털리는 거 유그드라실에서 잘 찍고 있던가?”
“아. 네. 지금도 아마 찍고 있을 걸요?”
“그래?”
껄껄 웃은 레이나드는 깨져나가서 있지도 않은 선글라스 있던 자리에 손을 치켜 올렸다가 내리고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좋아. 그럼 잘 찍어두라고 해. 우리 셋이 영웅이 되는걸! 트란제비야, 내 명령 시키는 거 다 들어줄 수 있겠어?”
“네, 공격대장님! 아 그리고 제 이름은 영천후입니다.”
명령을 받들겠단 의미로 척 하고 자신의 왼쪽 가슴에 주먹을 가져다대는 모습에 의젓함을 느낀 레이나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좋아. 영천후! 작전은 간단해! 유그드라실의 분석으로는 놈은 본체로 돌아오면 핵이 생성된다. 그 핵을 파괴하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 그걸 위해 나와 하연 씨는 원거리에서 닷지&딜링. 너는 근거리로 파고들면서 시선을 끌고, 공격을 다 받아내다가 핵이 노출되면 그걸 부순다!”
“후…. 그럼 뒤에서 날아오는 아군 공격도 제가 알아서 피하는 걸로?”
“잘 알아듣는군. 바로 그거지.”
“간단하네요!”
“그렇지?”
낄낄낄 하고 남자 둘이서 배가 맞아 웃어대는 광경을 하연은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게 작전이라고? 미친 소리지, 저게 무슨 작전이야? 이런 짓을 할 거라면 진작에 23명의 전력이 남아있었을 때 총력을 때려 부어서 놈과 정면승부를 해야 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이런 짓을?’
그만큼 저 남자를 신뢰하고 있다는 건가? 하연은 당황해서 더듬으며 외쳤다.
“무, 무모해요! 근거리로 파고들라니! 게다가 우리 셋의 전력으론―”
「무모하지 않아!」
「무모하지 않아요!」
대도를 휘두르듯 그녀의 말을 단언하며 잘라낸 두 남자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면서 몸을 풀었다. 그 중 레이나드는 팔을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어차피 지금 안 싸우면 전멸이야. 아래에 있는 놈들 끌어올려봐야 전력 안 돼. 지금 이 인원이 최상이지. 하연 씨도 이건 동의할 걸?”
“그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대충 알겠어. 그렇지만 생각해봐. 23명 일 때도 반격을 안 해본 게 아니었잖아. 그때 내가 내린 판단은 이 전력은 목숨 걸고 동귀어진 해도 우리들만 다 죽는단 거라서 버티기로 바꿨던 거야. 그 애송이가 당한 이상 놈의 재생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어.”
“…….”
“공격 대장인 나를 믿어줘. 지금이 최상이야. 그리고 나는 하연 씨와 이 친구를 믿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천후 씨가?”
“그럼.”
굳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나드는, 서른 중반이 더 넘은 나이임에도 소년과도 같은 동경의 빛을 띤 눈동자로 천후의 옆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분명…이 업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큼.”
“…….”
“그러니까, 그 목숨. 지금 우리에게 걸어줘. 죽으면 저세상에서 한잔 쏘지.”
“…됐어요. 삼십대 꺾인 아저씨하곤. 저 친구면 몰라도.”
“푸하하하!”
배를 잡고 웃은 레이나드를 보며 하연은 그들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자, 어느새 모여든 촉수들이 점점 뭉치더니 어느 순간 불쑥 하고 땅에서 솟아올라왔다.
그렇게 나타난 모습은 학교 건물 높이보다 한참 높은 15미터.
텐타클 뱀파이어의 본체의 모습.
놈은 그 상태에서 온몸에 꿈틀거리는 검은 촉수들로 세 사람을 겨눴다.
쭈뼛하고 살의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세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신호로 삼아―
“온다….”
“아니지, 오기 전에.”
“갑니다!”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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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