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유일최약의 일리미네이터>
두근.
‘또다.’
두근.
‘또 이 꿈이다.’
매일같이 보아왔던 광경. 매일같이 보아왔던 꿈. 매일같이 반복되는 결말.
이제는 그 전개의 과정까지 모두 꿰뚫어서 입으로 읊어 설명할 수 있는 지겨운 꿈.
그리고 그 꿈은 다시 찾아와 과거의 기억을 되새긴다. 실제로는 꿈으로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은 당시의 기억을.
이제는 몸조차 알고 있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그저 중간에 의지로 깨어날 수 없기 때문에, 심장 고동소리를 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꿈의 현실성은 완전하게 붕괴되어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꿈은 찾아온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지겨울 정도의 아지랑이. 키가 작기 때문에 더욱 심하게 영향을 주는 방해. 꿈이면서도 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현실성은, 분명 이 아지랑이에서 오는 것이리라.
눈에 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이국(異國)인 인도, 뭄바이의 풍경. 사람들은 이국의 언어를 사용하며 주변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손에는 차가운 사탕수수 주스. 그 시원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꿈이면서도 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현실성은, 분명 이 촉감에서 오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손에 잡아보았던 기억조차 없는 부모의 손의 따스함은, 다시 한 번 이 꿈의 현실성을 완전하게 무너뜨려 버린다.
왜냐하면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자신이 겪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티끌만치도 기억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 자신은 꿈에서밖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아. 또 다.’
양친과 과거의 자신은 시장가의 중심에 다다라 있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수백, 수천 마리의 새 때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철창에 가두어져 얌전히 사람의 손을 기다리던 동물들이 갑작스레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한다. 소리를 낼 수 있는 동물들은 자신의 발성기관이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끊임없이 울부짖는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 코끼리까지 섞여있는 동물들의 갑작스러운 발광이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양친과 자신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아아아.’
눈을 감고 싶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이것은 꿈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자신은, 눈을 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볼 수밖에 없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대참사를.
‘하아…. 하아….’
인간이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사라진다. 건물이 사라지고, 옷이 사라지고, 새장이 사라지고, 음식이 사라지고, 시장이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진다. 모든 인간에 의한 것들이 사라질 때에. 그 어떤 인간의 창조물보다 소중할 인간 그 자체의 생명 역시 사라져버린다.
‘하아…. 하아….’
인간은 자연 본연의 모습이 되어서,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육신이란 그릇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사라져버린 인간은 하나의 고깃덩이가 되어서 뜨거운 땅 위에 그 몸을 누인다. 그 모습에 생명의 모습은 터럭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하아…. 하아….’
지평선 저 끝까지 늘어진 인간의 시체. 먼 곳에 있는 것은 그저 적갈색의 무더기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죽음의 모습. 시야를 흔드는 아지랑이에 비취는 세계는 지옥보다도 정감 없는 인육의 벌판이다.
‘아아아아아아.’
어린아이였던 자신은 이러한 광경을 계속해서 보고 있다. 인간으로 매워진 땅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보고 있다. 뜨거운 땅 위에 인간의 살이 아무렇지도 않게 익어 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크으….’
괴롭다.
이 꿈을 보는 것은 괴롭기 짝이 없다. 당시의 자신은 죽음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것을 그냥 계속해서 보고 있을지 몰라도, 지금의 자신은 그렇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죽어있는 시체의 산을 바라보는 것은 사양이다. 토악질을 하지 않는 건 순전히 꿈이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그래. 이 꿈은 이것으로 끝이다. 언제나 저렇게 가만히 서서 바라보다가 끝난다.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지면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인간이 모두 죽어버린, 도시였던 이곳에는 아무 움직임도, 아무 소리도 없다. 시간이 흐르는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는 끝없는 정적. 천후는 그 속에서 그저 있다가, 그래. 그저 서있는 것으로 정적에 짓눌려 기억이 꺼진다.
그랬어야 했는데.
‘어?’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다. 느낄 수밖에. 시각을 희롱하는 아지랑이의 저편에서 13개의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느낄 수밖에. 지금 꾸는 이 꿈은, 얼마 전에 꾼 꿈의 연속이었으니까.
‘대체….’
인영들은 다시 눈앞에까지 다가와 버렸다. 그리고 치솟아 오르는 불쾌감. 보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이 화가 난다.
‘대체 뭐야…?’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는데도,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검게 보일 뿐이다. 모습의 윤곽선으로 가려낼 수 있는 것도 한계.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 이상은 구별할 수가 없다.
‘이런…. 젠장….’
어째선지, 그것 때문에 더욱 화가 난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감정이 멋대로 꿈틀대며 분노를 표한다.
왱왱왱왱-.
매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눈앞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외치고 있는 말. 하지만 그 소리는 먼먼 매미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왱왱왱왱-.
‘아아….’
왱왱왱왱-.
‘시끄러워-!’
귀를 막고 싶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은 막지 않는다.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은 듣고 있다.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은 보고 있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온다. 마치 인간이 사멸하여 적막에 빠진 세계를 자신들의 목소리로 구원하려는 듯하다. 그 때문일까? 그들의 업을 칭찬하기라도 하듯, 세계에 현상이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체가 사라져간다.
‘그…그만둬!’
양친을 시작으로 인간이었던 것들이 흰색의 기체로 기화하여 사라져간다. 소리는 그것을 환영하듯이 더욱 더 세차고 거세게 울려 퍼진다.
‘너희들! 무슨 짓이야!’
인간의 생명이 허무하게 화학적으로 치환되어간다. 그것을 아무리 바라보며 외쳐도, 세상은 전혀 변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지켜볼 수만은 없기에 소리친다.
‘그만둬어어어어어어!’
*
“으아아아아아악!!!!”
아직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이른 새벽.
천후는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 몸의 땀구멍에서는 홍수라도 난 듯이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시트를 짚어보니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하아…하아….”
숨을 몰아쉰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머리를 양 손으로 쥐어뜯었다. 입에서는 무언가가 새어나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인님….”
그의 곁에서 함께 잠들어 있었던 희주는 급히 일어나 침대 곁에 가져다 두었던 수건을 가져와 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 미안해요, 희주 씨.”
“아닙니다. 또…그 꿈을 꾸신 건가요?”
“네.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천후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건 누가 봐도 어색하게, 무리하게 웃음이었다. 희주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 했지만, 그의 얼굴이나 몸을 닦는 손길에선 걱정이 가득 느껴졌다.
“좀 더…자주 편히 주무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가 부족한 탓에….”
“아니에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절대 희주 씨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희주 씨가 와주셔서 제가 얼마나 나아졌는데요.”
그녀와 함께 잠자리를 하게 된 이후로, 천후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날에는 해가 중천이 될 때까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곤 했다.
그것만 해도 천후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호전된 것이었다. 때문에 천후는 그런 것 때문에 그녀가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길 바랐다.
때문에 천후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양 볼에 아주 살짝 입을 대었다 때며 웃었다.
“그리고 이제 일어났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미안해요. 매일 같이 희주 씨도 깨워버려서….”
“아닙니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청년의 입술을 보며,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사이에 그녀의 어깨까지 이불을 올려 덮어준 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일어난 김에 좀 달리고 올게요.”
“또 나가시나요?”
“거르면 안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천후는 갈아입기 편한 위치에 걸어둔 트레이닝 복을 걸치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는 이렇게 악몽을 꾼 날이면, 이른 아침부터 운동을 하러 나가곤 했다.
그 나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희주는 조용히 눈을 감고는 자리에 누웠다.
*
“후우….”
새벽 조깅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조금 이른 시간. 주택단지에서 나와 대로를 따라 달려 근처 강가에 이른 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희주와 함께 지내고 나서 악몽을 꾸는 횟수가 줄어든 것은 너무나 기쁘지만, 이렇게 일어날 때면 그녀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 악몽은 일상이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할,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무언가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새벽 4시, 5시에 매일같이 함께 잠에서 깨버리는 그녀에게 적응해라 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아니겠는가?
그녀는 괜찮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었지만…천후로선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대체 뭐지…. 그 꿈.”
천후의 악몽은…10년간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그드라실에서 막 나오던 날 조금 이상하더니, 오늘도 꿈의 내용이 좀 더 진행되고 말았다.
천후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당일 일어났던 실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왜? 무슨 이유로 10년간 멈춰있었던 꿈이 점점 더 드러난단 말인가? 나이를 먹어, 그 내용에 점점 적응이 돼서? 아니면….
“불길하군….”
천후는 처음으로 꿈이 진행됐던 날…. 유그드라실에서 나왔던 날을 떠올렸다. 최악의 날이었다. 그나마도 희주를 만났기에 망정이지…안 그랬다면 정말 인생 최악의 날로 삼아도 될 날이었다.
면접엔 떨어졌지, 취업사기는 당했지. 하지만 오늘은…왠지 그 날보다 더더욱 느낌이 안 좋았다. 한 여름이라도 이 시간대에는 쌀쌀한 게 당연하지만,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으슬으슬했다.
막 동이 틈 즈음인데도 태양이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두운 구름들이 하늘을 가득 메꾸고 있었다.
비가 올 지도 모르겠군.
천후는 트레이닝 복 모자를 뒤집어쓰며, 좀 더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어째서인지, 심장이 평소보다 격하게 뛰었다.
*
같은 시각. 천후가 달리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의 커다란 지하철 역 인근 골목.
며칠이나 면도를 안 하면 저렇게 될까 싶을 정도로 마구 자란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아니, 비단 수염뿐 아니라 온 몸이 꼬질꼬질하고, 옷가지도 헤질 대로 해져서 볼품없기 그지없다.
그저 서있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썩은 체취가 뿜어져 나오는 그는 실제로 노숙자였다.
무료급식소와 지하철 역, 정부에서 보조해주는 구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일정 시간 대여해주는 숙소를 오가며 간신히 연명만 하는 삶을 산지도 몇 년이나 지난 사람이었다.
“후우…. 후우….”
그런 그의 눈은 지금 조금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숨결도 여느 때보다 몇 배나 거칠다. 지하철역에서 강제로 쫓겨나기라도 한 걸까? 아니, 이미 몇 년이나 겪은 익숙한 일이다. 겨우 그런 일로 감정이 격해지지 않는다.
그의 숨이 거칠어진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바로 그의 손에 쥐여져있는…작은 병.
그나 그의 동료들이 늘상 들고 다니는 소주나 맥주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실에서나 볼 수 있을만한 플라스크였다. 투명한, mL당 눈금이 그어져 있는 평범한 플라스크.
남자는 그것의 입구를 막고 있는 고무마개에 손을 대고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 이 일만 한다면….
“10억…. 10억이라고…?”
중얼중얼.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며칠 전.
언제나처럼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얼마 전에 일하고서 남아있던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술을 사마시고 있었던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한 가지 거래를 해왔다.
‘이 플라스크 안에 들어있는 것을 풀어놓으면 10억을 주겠다.’
터무니없는 거래였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걸렸다.
대체…뭐하는 물건 이길래? 왜 굳이 부랑자에게 거금을 쥐여 주면서 타인에게 열게끔 하려고 한단 말인가?
그 남자는 빙긋이 웃더니, 자신의 사정을 담담하게…아무런 거짓도 섞지 않고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죽으면…10억….”
부랑자는 플라스크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부정형의 검은색의 무언가를 보면서 중얼 거렸다. 그랬다. 그 남자는 말했다.
이 플라스크를 열면 당신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대신에…당신의 목숨 값으로 10억을 주겠다고.
남자는 그 말과 동시에, 그의 가족의 유일하게 막히지 않은 계좌에 선 입금으로 3억이라는 돈을 실제로 박아 넣어주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10억. 누구에겐 작은 돈 일지 몰라도…인생의 낭떠러지에 봉착한 사람에게는 전부 이상의 가치가 있다. 당장 장기라도 내다팔까 생각하던 인간에게 그것은 하늘 위에 떠있는 금액이다.
아니, 사회인이라도 마찬가지. 일반적인 월급쟁이가 10억이란 돈이 일시불로 오가는 광경을 평생 몇 번이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돈만 있으면…아내는 필요 없다. 내가…. 내가 사랑하는 딸.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할 것 같은 그 아이가 평생 살아갈 뒷받침이 되는 돈이 생길 것이다.
“후욱. 후욱….”
남자의 숨소리가 더욱 가빠지며, 손이 고무마개에 닿았다. 그것을 느낀 것일까? 엄지 한 마디 크기였던 플라스크 안의 검은 무언가가 갑자기 확대되더니, 플라스크 전체에 가득 찼다.
갑자기 형태가 말도 안 되게 변한 것이다. 그것을 보자, 과연 이걸 열면 죽게 될 거라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순간, 공포가 찾아왔다.
“으으으….”
남자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래. 이미 3억은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먹고 살 정도는 충분히 되잖아. 그러니까…입 씻고 도망가면 어떻게든 딸과 둘이서 살 수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용직 일이라고 꾸준히 하면…!
마음을 정한 남자는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푹.
“억….”
살을 파고들어오는 작은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덜컥하고 멈춰 섰다. 아니, 멈춰 세워졌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슴에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에 남자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저 간신히 고개만 돌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러자 그의 눈에는 자신의 손에 플라스크를 쥐어줬던 남자가 플라스크를 열어서 그 입구를 자신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플라스크 속에 있던, 검은색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길쭉하게 뻗어 나와 그의 심장을 꿰뚫어버린 것이다.
“하아…. 거금을 준다는데도 죽을 용기 하나 없다니.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란 건가. 재미없군.”
남자는 쓰게 웃고는 플라스크 병을 그대로 골목 밖으로 내다던졌다. 그러자 플라스크에서는 끊임없이 어둠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남자는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자…. 그럼 이건 나를 재미있게 해줄 수 있을지…한번 보도록 할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부랑자의 심장을 꿰뚫은 검은 무언가가 울컥댔다. 그러자 부랑자의 몸이 바람 빠진 풍선이나, 미용 소품용 가면마냥 쪼그라들더니, 이윽고 거죽과 뼈만 남으며 바닥으로 가라 않았다.
그와 동시에 플라스크가 깨졌다.
아비규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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