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온천을 끝내고 나온 그들은 적당히 근처 영화관에서 하는 영화를 보고 시간을 때우다가 저녁식사를 끝냈다.
지방에 있는 호텔 식당이라 그런지, 나온 것들이 보양식에 가까운 것들이 많았는데 그 중 녹용이라던가 자라라던가 하는 것들은 극구 죄다 사양하고 무난하게 먹었다.
“왜. 또 드시지 그러세요? 응?”
“인삼도 아직 남아서요….”
“우와……. 변태 진짜.”
자기가 먹여놓곤! 하여간 여기에 저런 걸 먹었다면 어휴 그냥. 어휴 아주 그냥이 될 지경이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자니 밤이 되었다. 역시 반쯤 망한 상가이다 보니, 온천과 영화관 말고는 갈 곳도 없어서 셋은 굳이 나가서 돌아다니지 않고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어? 봉식이형 번혼데?”
TV를 틀어놓고 맨몸 스쿼트를 하고 있던 천후는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따로 전화번호 교환까지 했어? 너도 참.”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무슨 일이시지?”
“설마 새 디제스터 등장? 이번엔 얼마를 주시려나?”
“…넌 진짜 좀 바랄 걸 바래라.”
으이그 하고 학을 뗀 천후는 방문을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아. 형. 무슨 일이세요?”
<오! 동생! 티켓 잘 쓰고 있나?>
“네. 온천 엄청 좋던데요?”
<그래? 다행이네! 하하하!>
뭔가 좋은 일이 있었는지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가 밝았다. 3억짜리 비닐하우스가 날아가고, 의뢰비용으로 추가 3억을 지불한 후다. 장난으로라도 웃기 힘든 심정일 텐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으하하하! 들어봐 동생! 숙자 그년이 나한테 다시 시집온다네? 껄껄껄. 썅년. 그럴 거면서 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지랄이여, 아주.>
“어? 진짜요? 와! 축하드려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숙자는 그의 비닐하우스가 날아가자 다른 남자와 선을 보려고 했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선자리가 있단 것은 둘의 결혼이 지지부진하자 집안에서 던져본 유인구였고, 막상 결혼 이야기가 깨지자 숙자네 집에서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사실 그도 그럴게 숙자도 이제 나이가 꽉 찼다. 서른 중반이 넘은 여자다. 잡고 싶어서 집안 재산을 내놓겠단 남자가 하나 더 나올 거란 생각은 하기 어렵다.
봉식이 비닐하우스 하나를 날려먹고, 한해 특화작물 농사를 망치게 생겼다지만 그는 여전히 그 지방 최고의 영농업자다. 농담이 아니라, 읍, 아니 면에서도 손에 꼽히는 재산가인데 그걸 차고 왔다니 정신 나간 년이라고 온갖 욕을 먹고 왔더란다.
거기다 봉식이는 결혼 전부터 예비 장인 장모랍시고 그들에게도 온갖 것들을 해서 바쳤다고 하니, 딸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으리라.
집안 눈살뿐 아니라, 숙자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이번만은 봐주겠다느니 하면서 재결합을 맺기로 하였다.
<그래서 이 형님이 고년을 어제 저녁에 아주 반쯤 죽여 놨지. 암 것도 못하고 앙앙거리는데 고년이….>
“아. 네에….”
신이 나서 어젯밤 있었던 열사까지 늘어놓는 봉식의 말에 천후는 힘겹게 답하다가, 뭔가를 퍼뜩 떠올리고는 심각하게 말했다.
“아. 그럼 이 티켓 돌려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응?>
한참 말하다가 천후의 이야기를 들은 봉식은 껄껄 웃으며 답했다.
<아따. 동생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티켓 좀 값이 나가긴 해도 하나 다시 사면 돼. 벌써 놀고 있는데 그거 다시 가져오라고 하겠어, 내가 설마. 으하하하.>
“…….”
그건 그렇네. 할 말이 없어진 천후는 괜한 말을 했단 생각에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한편, 크게 웃던 봉식은 곧 나지막하게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뭐 하여간 그건 됐고…. 동생. 내가 말야. 일부러 미리 연락해서 방을 두 개 중 하나만 침대방으로 내주게 해놨어. 뭔 소린지 알지?>
“네?”
<크흐흐흐. 둘 중에 맘에 드는 년 있으면 하나는…. 알았제? 형 전화 끊는다. 낭중에 식 올릴 때 연락 할게잉?>
“형? 형?”
뚝. 무심하게 전화가 끊기자 천후는 식은땀을 흘리며 방을 확인했다. 이 호텔은 일부는 서양식, 일부는 일본식으로 해서 침대가 있는 방과 이부자리를 깔아주는 방을 복도를 사이를 두고 선택할 수 있었는데 봉식이 그걸 미리 지정해둔 모양이었다.
“아 진짜….”
천후는 곤란해 하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일이 잘 해결되었다니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번에 그가 본 손해는 상당하지만, 본인이 가장 힘겨워하던 혼사문제를 해결했다니 이 이상의 성과가 있을까?
천후는 문득 별빛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아무래도 이 세상이 악의로만 가득 차 있진 않은 모양이다.
*
전화를 마치고 들어온 천후는 잠들 때 쯤 되어서 방 사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응? 그럼 내가 침대방!”
그러자 셀레나가 냉큼 손을 들면서 외쳤다. 그게 지금 무슨 의민지 알고 하는 소리인걸까? 천후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희주를 바라보았다.
“저는 주인님이 있는 방이라면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
이건 이것대로 식은땀 나는 발언이다. 과연 손을 들고 있던 셀레나도 얼굴을 붉혔다.
“희…희주 씨. 그래도 저랑 같이 온 건데 여자끼리 자면 안되요?”
“…더 이상 섬기는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스산한 기척을 내뿜기 시작하는 희주의 모습에 셀레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요….”
천후에게서 그녀를 오랫동안 떼어놓았을 때 그녀가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떠올린 셀레나는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어젠 그렇게 해서 분노가 향한 대상이 멧돼지였지만, 그게 자신에게 향할 걸 생각하니 감당이 안됐다. 아니 무서웠다.
하지만 그때, 천후가 웃으면서 희주에게 말했다.
“에이. 아무래도 셀레나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니까 오늘은 그냥 둘이서 주무세요. 제가 이불 방에 가서 잘 테니까.”
“…….”
입을 다물고 천천히 눈을 몇 번인가 깜빡인 희주는 슬쩍 셀레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눈이었지만, 셀레나는 그것이 마치 ‘너 때문에 주인님이 저런 소리를 하시잖아’라고 화를 내는 것으로 느껴져서 움찔했다.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 두려움을 느낀 셀레나는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아, 아냐. 그냥 내가 혼자 자도 돼. 둘이서 마음껏….”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셀레나 씨의 말도 맞는 것 같으니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희주는 셀레나의 말을 중간에 툭 자르고는 천후의 말을 확정 시켰다. 그러자 천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다행이다. 그럼 그렇게 하죠.”
“네. 마침…그녀에게 확인해봐야 할 것도 있었으니.”
천후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마친 희주는 셀레나에게서 시선을 치우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느라 그 말을 듣고 만 셀레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냥 둘이 잠을 자던, 무슨 짓을 하던 내버려둘걸!
“그럼 전 먼저 나가볼게요. 내일 봐요.”
“네. 편안한 밤 되세요.”
“아…. 잠깐….”
셀레나는 후회했지만, 이미 모든 것은 늦어있었다.
천후가 안심했다는 기색으로 방을 빠져나가자마자, 희주가 스르륵 하고 몸을 돌려서 마주봐왔기 때문이다.
*
야심한 밤. 불침번을 서며 지냈던 마을회관만큼 외진 곳은 아닌지라 드문드문 들려와 무서운 뻐꾸기 소리는 이제 없었지만, 셀레나는 지금 그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둘만 남았군요.”
스르륵. 호텔에서 받은 잠옷 대용 가운을 입고 있는 희주가 움직이자 옷가지가 시트를 훑으며 소리를 냈다. 그것에 처음으로 놀라고,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희주에게 두 번 놀랐다.
“네? 아, 네에….”
셀레나는 문득 그녀가 이런 기회를 벼르고 있던 게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 태도는 설명이 되질 않는다.
그 마을회관에서는 밤엔 둘만 있었다곤 해도 불침번을 서느라 계속 엇갈렸으니 길게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다.
그 기회를 얻은 희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사실은…셀레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름 끝에 붙이던 ‘씨’자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셀레나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녀의 뒷말에만 집중했다.
“네, 네? 뭔데요?”
셀레나가 말을 더듬으며 되묻자, 희주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대답하는 순간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읽어버리겠다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흰 얼굴로 희주는 속삭였다.
“그 날…즐거우셨습니까?”
“네?”
흠칫. 순간적으로…같은 여자의 감으로 희주가 말하는 그 날이 어떤 날인지 깨달은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모르는 척 소리를 냈다.
그러자 희주는 다시금, 천천히. 이번에는 좀 더 확실히 풀어서 물었다.
“저를 돌려보내고…주인님과 함께 자택으로 향하셨던 날 말입니다…. 즐거우셨습니까?”
쿵쾅쿵쾅. 순식간에 심장박동이 빨라져 귓가에 가득 울렸다. 셀레나는 순간, 이 거리라면 이 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덧 희주는 그만큼이나 다가와 있었다.
입이 귀에 닿을 듯 하다.
호흡이, 가빠졌다.
“즐겁고 말 것도 없었어요! 그냥 아버님이 집에 계셔서 식사하고 이야기 좀 하다가 온 게 끝이에요!”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면…이 홍희주란 여자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무서웠다. 하지만….
“샤넬….”
“에?”
“샤넬 샹스 오 땅드르.”
“…….”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셀레나는 평소에…NO. 5를 쓰지만, 그 날은 달랐죠.”
쿵. 쿵. 심장의 울림과 함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썹이 떨린다.
알고 있다.
이 여자는 그 날 있었던 일을…이미 알고 있다.
“평소에 NO. 5는 외부 사람을 상대할 때…조금이라도 나이를 있어보이게 하기 위해서. 정장도 마찬가지…. 알고 있어요. 셀레나.”
“아….”
한국 사람들은 이상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인을 실제 나이보다 훨씬 나이 있게 본다. 10대와 20대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거기에 셀레나와 같은 금발에 미모까지 조합된다면…놀랍게도 그녀는 어딜 가서도 어린애 취급받지 않았다. 어떤 의뢰주나 은행에서도. 이번 일처럼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노인들이 아닌 이상.
하지만 실제의 그녀는 어리다. 그래서 그녀는, 무장을 했다. 정장이라는 갑옷과 향수라는 방패로.
셀레나는 지금껏 그것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홍희주는 그것을 얼마 안 되는 시간에 짐작해낸 것이다.
셀레나는 자신을 뚫어보고 있는 이 유리세공 같은 눈이 지금껏 자신을 얼마나 세밀하게 관찰해왔는지 절감했다.
통하지 않는다.
거짓말 따위는.
“그날 다른 걸 쓴 이유는…여자가 되기 위해. 여자로 보이기 위해”
“그만! 그만해요! 맞아요! 다 맞으니까…. 잘못, 잘못했어요.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울먹이며 외친 셀레나는 눈가를 양손으로 비볐다. 흐르지는 않을 정도의 눈물이 조금씩 묻어나왔다.
“그치만…자진 않았어요. 중간에 부모님이 왔단 말야. 그래서…. 미안해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인데 제가….”
포기해야한다.
그의 곁에는 늘 이 사람이 있으니까.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가 될 줄은 몰랐다.
차라리 그에게 잘려졌으면, 좀 더 마음이 나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차가운…하지만 날카롭지는 않은 흰, 흰 손길이 그녀를 대신하여 눈매를 닦아주었다. 그 부드러움에 놀라, 셀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희주는 아주 작게…정말로 아주 작게, 웃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저는…당신을 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네…?”
흐릿하게 흩어질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희주의 말에, 셀레나는 홀린 듯이 그녀를 올려보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붉은…홍희주라는 이름만큼이나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달싹였다.
“주인님께서 여자를 품고 싶어 하시는 건…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네?”
셀레나의 몸은, 이제는 다른 의미로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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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운영엔 관리자가 필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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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익...1시 10분...!
내일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