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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4화 (14/324)

14화

마트 내 방송 직원이 명백하게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치는 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고객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카트를 버리고 출입구를 향해서 내달렸다.

평일 아침. 가장 한가한 시각이라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출입하던 통로를 셔터로 차단하고 직원용으로 쓰이던 내부 계단으로 인도하니 이것만으로도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그 광경을 멀찍이서 확인한 천후는 턱을 괴고는 장고 하다가 말했다.

“희주씨. 일단 먼저 이…셀레…씨를 데리고 밖으로 탈출해주세요.”

“하지만 주인님께선….”

“아. 그게. 아무래도 연락이 올 것 같아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후의 휴대폰이 울렸다. 너머에서는 익숙한 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후야. 너 지금 I마트 안에 있는 거 맞지?>>

“네.”

천후는 자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별 내색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연락하신 이유는 대충 알 거 같네요. 파급 디제스터라고 하던데. 제가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거죠?”

<<응. 퇴치 업체 쪽에서는 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 빨라도 15분. 그동안 인명피해가 날까봐….>>

“그럼 일단 제 선에서 손을 써볼게요. 디제스터 사체 회수나 뒤처리는 평소처럼 유그드라실 쪽에서 해주세요.”

<<응? 그래도 되겠니? 너 이제 취직한 거…. 아. 설마….>>

미연은 말하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유추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제 그녀가 보았던 이력서가 그대로 전산공유 처리되어 내려간 결과를 눈치 챈 것이다.

“하하. 음. 좀 그렇게 됐어요. 평소처럼 혼자서 하면 되는 거죠?”

<<그래.>>

“알았어요. 그런데 디제스터 위치가 정확히 어떻게 되죠? 지금 오퍼레이터 지원은 받질 못하는 상태라서 잘 모르겠는데.”

<<발현장소는…마트에 연결된 건물의 2층 주차장이야. 위치상 마트 1층 정문 셔터까지 그리 멀지도 않으니까 내부도 조금 위험해.>>

“네. 그럼 그쪽으로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야 된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급하니까 끊습니다.”

물 흐르듯이 대화를 끝낸 천후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몸을 풀었다. 한편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셀레나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다, 당신 무슨 생각이야? 설마 진짜 디제스터와 싸울 생각은 아니겠지? 혼자서?”

디제스터는 그 위험도에 따라서 신神, 천天, 멸滅, 경驚, 파破의 5개의 등급으로 나뉜다. 이 중 신급이 가장 강하고 파급이 가장 약하다.

지금 나타난 것이 바로 파급. 하지만 가장 약하다고 해도….

“그럴 생각인데.”

“말도 안 돼! 파급 디제스터라고 해도 보통은 4명은 모여야 잡는다고! 그렇게 가도 한 명이 죽기 직전까지 몰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뭘 믿고 저렇게 태연히 혼자서 상대하겠다느니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아연실색하던 셀레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지금 방금 저 통화했던 것도 전부 거짓말? 설마 자기 자신이 정말 일리미네이터라고 믿고 있는 거야?’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계속 하다보면, 스스로 그것을 진짜로 믿게 되는 경우가 있다. 셀레나는 지금 천후가 그런 상태인 것이라 생각하고 걱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건 자살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살을 방조하고 싶진 않았다.

“그만 둬! 그러다 진짜 죽는단 말이야! 자기 거짓말에 자기가 속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내 눈앞에서 그 꼴은 못 봐!”

찢어져라 소리친 그녀의 말에 몸을 풀던 천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인가?

나도 참…정말로 우습게 보였나보군.

양 손을 들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천후는 표정을 바꿨다.

“미안하지만 오해를 풀 시간은 없어서. 그렇게 걱정되면 오퍼레이터로 참관하던가.”

“뭐?!”

“일리미네이터는 자신 포함 3명의 인원과 함께하지. 생활에서 전투까지 전방위를 지원해주는 서포터와 전투 상황을 파악해주는 오퍼레이터. 당신은 당신네 기업 오퍼레이터라며. 그럼 그걸로 날 지원해줘.”

“나, 날 말려들게 할 참이야?”

“…….”

셀레나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지한 천후는 눈을 낮게 깔았다. 그 순간, 위층에서 커다란 충돌음이 들려왔다.

“들어오겠군. 가야겠다.”

“아…. 잠까….”

“그것도 못할 거면 당장 여기서 꺼져! 방해만 되니까!”

매몰차게 끊어 말한 천후는 그와 동시에 1층으로 통하는 정지해버린 무빙워크 쪽으로 달려갔다. 그 속도는 가히 섬광. 셀레나로서는 쫒아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 등 뒤로 멍하니 손을 뻗고 있던 그녀는 그 손을 꾸욱 하고 쥐었다.

“우, 웃겨. 뭐가 그렇게 당당해. 사기꾼 주제에?”

기껏 내가 자살하는 걸 막아주겠다고 나선건데…. 하지만 떠나기 전 보였던 그의 등. 싸움에 익숙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그 담담함을 떠올린 셀레나는 생각했다.

혹시…. 지금까지 그가 말했던 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는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고, 무언가 착오가 있어서 그의 경력이나 마력 랭크가 재대로 확인되지 않은 거라면?

‘그, 그럴 리가 없어!’

그럼 내 입장이 대체 뭐가 돼!

고개를 크게 붕붕 내저은 셀레나는 양 주먹을 꾸욱 쥐고는, 자신을 끌고 가려고하는 희주에게 확 돌아섰다.

“당신! 저 사람의 서포터라고 했죠! 이제부터 제가 그를 오퍼레이터로서 지원하겠어요!”

“주인님께선 당신과 대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오퍼레이터를 한다면 같이 따라와도 된다고 했었잖아요! 어서 쫒아가요!”

“…….”

그녀의 말에 표정변화 없이 살짝 고개만 기울였던 희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주인, 천후님의 명령에 상충된다. 분명 그렇게는 말했지만, 그의 진의는 그녀를 겁먹게 하여 이곳을 떠나게 하려는 것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강경한 태도의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물론 작정하면 못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희주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쓱 훑어보았다. 상당히 좋은 소재. 일이 잘 풀린다면….

이 여자로 주인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인님과 합류하지요.”

일단은 합류해서,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를 호위해야겠다. 판단을 마친 희주는 더 이상의 말을 아끼고 천후가 달려간 길을 그대로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후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속도에 놀란 셀레나는 급히 그 뒤를 쫒았다. 그녀는 사실 방금 전 그녀가 쓱 훑어볼 때 묘한 불안함을 느꼈지만, 숨이 차다보니 그런 생각은 어느새 싹 사라지고 본래 목적만이 머리에 남았다.

“확인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시체치우기 싫어서 가는 거니까…!”

절대. 결단코. 요만큼도 그의 말이 진짜라는 생각 같은 건 하는 게 아니니까! 말리지 못해서 죽어버리면 꿈자리가 사나워질까봐 가는 거니까!

그녀는 그렇게 끊임없이 되뇌이며 하이힐 차림으로 무빙워크를 힘겹게 걸어 올라갔다.

*

1층의 상태도 지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장과 벽면을 가리지 않고, 깨지기 쉬운 외장재들은 전부 박살. 진열되어있던 옷가지들과 신발, 마네킹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일반 조명은 전부 깨져나가, 바닥 쪽에 설치되어있는 비상구 위치를 가리키는 불빛만이 간간히 희미하게 빛난다. 조명 면에서는 지하보다도 더 심해서, 갑자기 어둠에 노출된 셀레나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이런. 결국 와버린 거야?”

그녀에게 방향감각을 되찾게 해준 것은 하나의 목소리였다.

떠나기 직전에 보였던 격한 목소리가 아닌…. 상냥한. 걱정 섞인 목소리. 하지만 그것을 좀 더 짚어 들어가면 어쩐지 들뜬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할까? 셀레나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때. 목소리가 물어왔다.

“그래. 그럼 일을 해줘야지. 놈은 어디 있어?”

“아….”

퍼뜩 정신을 차린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순순히 마법의 주문을 읊었다.

“내 발 닿은 곳이 파문의 시작. 나는 호수의 정령. 나의 못에 있는 모든 것을 아는 자.”

순간, 셀레나의 머리칼이 금색으로 일렁이며 같은 색의 오오라가 피어오르다가 그대로 사방에 퍼져나갔다. 그와 함께 그녀의 감각이 거짓말처럼 확대된다.

마트 뿐 아니라 주변 수백 미터 이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발걸음, 숨소리를 느낄 수 있게 된 그녀는 곧 닫혀있던 눈을 뜨며 청색 안광으로 한쪽을 바라보았다.

“저쪽….”

그곳은 별도 건물로 마련된 주차장에서 마트로 들어오는 입구였다. 평소에는 유리 자동문 하나로 막혀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방화용 셔터가 3개나 쳐져있어 밖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막고 있던 두 개의 셔터를 찢어발기고. 단 하나만을 남기고 멈춰서있는 거대한 기척을. 공교롭게도 그 앞에는 목소리의 주인이 서있었다.

“그래? 그런 거 같았어.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지.”

무엇이 있어 그것을 느낀 건지. 주인은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순간 셀레나는 알았다.

이것은 아이의 웃음이다. 크리스마스 날, 큰 선물을 받았을 때 보여주는 기꺼운 웃음.

‘미쳤어….’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이 확장된 감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디제스터의 존재감은 엄청나다. 아니, 존재감 이전에 단지 물리적인 크기만 해도…분명 주차장에서 마트로 들어오는 통로가 비좁을 지경이리라.

허나 남자는 웃는다. 진정으로 기꺼운 듯. 기대되는 듯이. 그것은 셀레나의 상식으로선 미쳤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일이었다.

“희주 씨. 잘 지켜주세요. 죄송하지만 제가 그쪽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을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걸까? 지금까지 눈에 띄지 않았던 희주가 바로 옆에서 나타나 대답했다. 아마도 말을 하지 않았다면 느끼지도 못했으리라.

“그럼.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시길. 3미터 이상 떨어지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3미터 이내라면 확실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인가? 대체 무슨 수로? 그렇게 생각하던 셀레나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희미한 빛이 보여주는 홍희주의 유려한 실루엣 사이에, 뭔가 부자연스러운 것이 섞여있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 특유의 곡선만이 존재해야하는 그곳에 보이는, 직선에서 날카롭게 휘어있는 또 하나의 곡선.

칼.

“!”

셀레나는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그녀가 자신의 곁에 몰래 다가온 것 역시 놀라운 일이었지만…이건 더욱 놀랍다.

방금 전까지 계속 실랑이하는 동안에도 그녀가 저런 걸 들고 있는 건 전혀 보지 못했는데 저건 어디에서 가져왔단 말인가?

아직 꽃무늬의 장식이 되어있는 칼집에 들어있긴 하지만, 저것은 분명히 진짜라고 확장된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그녀조차 파악할 수 없는, 미증유의 기운이 물씬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전투지원이 가능한 서포터!’

그렇다면 천금이 아쉽지 않은 재원이다. 당장 이 자살시도를 멈추고 데려가야 한다고 그녀의 감이 외쳐댔다. 하지만 희주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꼿꼿이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경도되어, 셀레나도 함께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섞여 그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지만…. 감각은 말한다. 그의 호흡과 혈류와 심장박동을 전해오며 확신한다.

그는. 들떠있었다.

“와라.”

닫혀있는 셔터를 향해서 읊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떨어져 내린다. 그 순간, 건너편의 거대한 것의 숨소리도 함께 격앙되었다.

철렁. 그것의 몸이 닿아 철제 셔터의 표면이 물결처럼 파도친다. 그것에 환희하며, 남자의 말소리가 빨라졌다.

“와라. 와라. 와라. 오라고…!”

끼긱 끼이이익! 그 독촉에 응하듯, 철제 셔터가 우측 위에서부터 대각선 아래로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여태까지 어둡던 마트 안으로 빛이 들어오며, 너머에 있던 괴물의 모습을 드러냈다.

털이 거의 없는 칠흑의 피부가 보인다. 그것은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예술적인, 그러나 당장 자연의 폭력을 나타내는 듯한 날렵하고 탄력 있는 근육 위에 존재한다.

오직 상대를 잡아먹기 위해,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에게만 주어진 폭력적인 육체의 향연.

커다란 입과 날카로운 이빨. 자유자재로 날카로운 발톱을 세울 수 있는 네 개의 발. 달리기 시작하면 방향을 잡기 위한 조타로 사용할 수 있는 미끈한 꼬리가 지금은 늘어져 흔들린다.

눈에선 야행성 동물 튝유의 튀어나와,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심령을 제압한다.

맹수. 그 중에서 인간에게 물으면 흔히 말할 고양이과 맹수의 형태를 한 그것은 자연계에선 표범을 가장 닮아있었다.

하지만 자연계의 그 어떤 표범도 몸집이 3미터가 넘지 않는다. 또한 그 어떤 표범도…등 뒤에 채찍과도 같은 촉수를 달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몸 자체가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분열한 듯이 보이지도 않으리라.

한눈에 비현실적인…딱 하나만 잡아 원형을 그려보라면 그리지 못할 괴물이 그곳에 서서,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고 정면의 남자에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히익….”

그 모습에 셀레나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소리를 내며 희주에게 붙었다. 하지만….

“너. 어떻게 저걸 혼자서 상대할 거냐고 했었지? 똑똑히 봐둬.”

웃음기 섞인 목소리. 그것을 듣고 고개를 든 셀레나는 눈을 크게 떴다.

등이 보인다.

괴물 앞에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당당히 선 남자의 등이 보인다. 어째서…저곳에 서있지?

무엇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남자, 영천후는 천천히 주먹을 쥐며 그 대답을 내놓았다.

“진정한 일리미네이터의 싸움을…보여주지.”

푸확!

그 순간, 섬광이 터져 나왔다.

============================ 작품 후기 ============================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오래걸렸네요.

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그럼 12시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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