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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하렘-13화 (13/324)

13화

셀레나는 어제부터 기분이 나빴다.

일 년에 4번 밖에 없는 구인 찬스를 자금력에서 밀려서 전혀 말도 못 붙여보고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말이 일 년에 네 번이지, 한해에 시장에 나오는 일리미네이터의 수는 10명만 되도 풍년이라고 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 세 명을 놓쳤으니, 운이 없으면 올해 내내 신입은 받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리미네이터 일은 요즘 같은 취업난 시대에 완벽하게 방향이 반대인 몇 안 되는 업종인 것이다.

그런데 어제 그 셋 중 하나가 이력서와는 다른 경력을 입에 담는 사람이 있었다. 일반 기업면접에서는 간혹 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번갈아가면서 해온 사람이나, 경력란에 기재하기 힘든 업종에서 일한 사람들이 구두로 경력 어필을 하는 경우는.

하지만 그 허언증 환자는 그 정도가 아니라 나면서부터 정해져있는 마력랭크가 잘못 측정되었다고 우기질 않나, 전혀 기재되어있지 않은 디제스터 퇴치경력을 운운하지 않나. 아주 가관이라, 듣고 있던 면접관들이 한참을 비웃다가 죄다 면접실을 떠나버렸다.

셀레나는 그렇게 사는 게 한심하고 볼썽사나워서 조금 타일러서 바른 사람이 되라고 따끔하게 일러주고, 제대로 상대해줬는데 그 사람은 결국 마지막까지 헛소리나 하다 나갔다.

이 업계에 저런 어중이떠중이가 뛰어들려고 하다니! 그것이 참을 수 없어서 그녀는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마트에 와서 회사 비품과 직원들에게 돌릴 음료수 등을 챙기면서 나름대로 쇼핑기분을 내면서 릴렉스 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왠 정신 나간 사람이 카트를 부딪치는 게 아닌가? 그래도 그녀도 이제 막 사회인이 된 몸.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참았지만, 그 장본인을 보자 결국 인내심의 끈이 끊어져버렸다.

막 클리닝을 마친 정장을 더럽힌 남자는 어제 봤던 그 허언증 환자였던 것이다!

“이런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허언증 환자씨. 이제는 성희롱까지 해?”

게다가 이 작자가 입으론 잘못했다고 하면서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꼼꼼히 훑어보는 게 아닌가? 평소엔 남자들의 그런 시선도 자신감으로 연결되곤 했지만, 그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 정말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하. 여련하시겠어. 왜? 이번엔 그런 병이 있다고 하지 그래?”

“…….”

아침 댓바람부터 난 왜 이런 공격적인 소리나 듣고 있어야 하는 걸까?

천후는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따지고 들어가면 자기 잘못인 게 맞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한참동안 천후를 노려보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눈동자만을 움직여 카트를 보고는 말했다.

“당신 이 근처 살아?”

“그런데요.”

“…정말 재수가 없네. 나도.”

이 마트는 꽤나 애용하던 곳인데 아무래도 바꿔야 하나? 셀레나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가 자신이 지금 업무시간에 잠깐 짬을 내서 온 것이란 걸 떠올리고는 약간 안심했다.

그녀가 이곳에 이 시간에 오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앞으로 겹칠 일은 없으리라. 아. 물론 저 남자가 다른 데에 취직이라도 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뭐 됐어. 당분간 놀고먹을 거 같으니까 나랑 시간 겹칠 일은 거의 없겠지. 대신에 이건 내 쪽에서 부탁인데.”

“…뭐죠?”

“앞으로 혹시 길이나 이런데서 나 보면 멀리 돌아가 줄래? 당신 진짜 쓰레기 같아서 냄새나거든?”

…돌겠네. 잘못한 게 있어서 가만히 들어주던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열이 확 받쳐 올랐다. 그래. 뭐 잘못하긴 했지. 그런데 지금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돈가? 내가 엉덩이를 더듬었어, 가슴에 얼굴을 쳐 박았어?

“저기. 제가 잘못한 건 맞는데 그쪽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녜요?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입니까?”

“어제. 그리고 이력서 보니까 내가 더 연상이던데 말 놓는 것도 안 돼? 그리고 뭘 잘했다고 적반하장이야? 진짜 재수 없다.”

“하….”

따박따박 죄다 받아치는 모습에 천후는 주먹을 꾸욱 쥐고 부르르 떨었지만 이내 손을 풀었다. 힐을 신어서 간신히 170초반대의 키. 체격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그런 상대에게 폭력을 쓰겠단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물며 여자에게는.

그러나 그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셀레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는 쏘아붙였다.

“와~. 주먹 쥐었네? 왜? 치려고? 쳐보지 그래?”

기가 산 셀레나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까치발을 서서는 소리 지르며 도발했다. 덕분에 무슨 향수를 뿌렸는지 몸이 가까워지면서 향긋한 냄새가 확 다가왔지만 아무리 남성이라도 지금 상황에서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때 지금까지 둘의 실랑이, 아니 천후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희주가 말을 걸어왔다.

“아시는 분입니까?”

“아…. 어제 봤던 면접 때 있던 면접관이예요.”

“그렇군요. 그 안목 없는 분들 중 한 분이신 건가요?”

“희, 희주 씨?”

말하는 내용에 깜짝 놀란 천후가 희주를 바라보자,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누가 봐도 호의적이지는 않은 눈빛으로 셀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셀레나 역시 안 그래도 조금 신경 쓰이던 여자가 천후를 밀어내고 앞으로 나오자 아미를 찡그리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녀가 뱉은 한마디가 그녀의 신경을 비상히 자극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목?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당신 뭐야?”

“전 천후님의 서포터입니다.”

“서, 서포터어?”

생각도 못한 답변에 고운 입을 크게 벌린 셀레나는 희주와 천후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아니. 서포터라니? 왜 저 허언증 환자의 서포터라고? 말이 돼?”

“허언증…. 아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표정 변화 없이 말해오는 희주의 기색에 셀레나는 잠시 상황을 정리했다. 아. 그거구나!

‘설마…. 저 남자가 자기가 정식 일리미네이터라고 속이고서 고용한 거야? 그런 거겠지?’

서포터라고는 해도 일단은 그냥 고용인이다. 일반인도 돈만 내면 고용할 순 있다. 그렇게 파악한 셀레나는 자기 혼자 결론을 내리고는 다시 말투를 고쳐서 물어보았다.

“당신…. 저 남자에게 속고 있어요. 저 남자는 일리미네이터도 뭐도 아니라고요. 저 남자 밑에서 일 해봐야 관련 경력이 생기는 게 아니라고요.”

“…….”

“거기다 저 남자는 바로 어제 자신의 마력랭크를 D라고 속이고, 경력을 위조했어요. 분명 당신과의 계약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거예요. 말해 봐요. 저 남자가 당신에게 얼마를 준다고 했어요?”

“그런 건 없습니다.”

“네에?”

“무, 무슨 소리세요, 희주 씨?”

앞은 무급이란 소리에 경악하는 셀레나. 뒤는 천후가 기겁하는 소리였다. 고용계약서에 사인 한 게 바로 방금 전이었는데 왜 저런 소리를?

하지만 희주는 둘의 놀람에도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고, 그저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께에 가져가 꾸욱 누르며 중얼거렸다.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미 주인님의 것이니…. 저의 모든 것도 주인님의 것입니다.”

“주, 주인니이이임?!”

21세기에 이게 무슨 대사야? 셀레나는 방금 전까지 쏘아 붙이던 태도는 어디가고 정말 까무러치게 놀라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천후는 자신을 무슨 온 몸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전염병 환자 바라보는 눈으로 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서 살짝 상처 입었다.

“저기. 면접관님? 이렇게 불러야 되나? 하여간 지금 무슨 생각 하시는 진 알거 같은데. 아니거든요? 여기엔 바다보다 깊은 사정이….”

“시, 시끄러! 가까이 오지 마! 말하지 마! 대체 무슨 수로 저 여자를 꼬드겼는지 몰라도 나한테까진 안 되니까!”

셀레나는 온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주변 매대를 붙잡고 나서야 간신히 서있을 수 있었다.

주인님이라니? 뭐? 자신의 모든 것이 주인님의 것? 저건 거의 숫제 열렬한 사이비 종교 신도가 교주한테나 할 만한 말 아닌가?

게다가 희주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조금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주인님은 기업에서 자격을 취득하지 않더라도 이미 유그드라실 직속 일리미네이터 자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중에서도 손에 꼽는 굴지의 실력을 갖추고 계세요. 그래서 안목이 없다고 말씀 드린 겁니다.”

“그마아아안!”

빽 하고 풍성하게 웨이브진 금발을 마구 흔들면서 고함을 질러 희주의 말을 멈춘 셀레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천후 쪽을 노려보았다.

무서운 남자다. 사람을 저렇게까지 세뇌시키다니. 저 정도라면 분명 긴 시간을 들여서 약물과 정신계열 마법을 혼용해서 완전히 절여놓은 거겠지?

외모에 어지간히 자신감이 있는 셀레나가 보기에도 희주의 미모는 대단했다. 게다가 서포터라고 하니 뭔가 재주도 있을 테니, 어떻게든 저 사이비 교주한테서만 때어내면 다시 밝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예 몰랐다면 상관없지만, 이렇게 알게 된 이상 참을 수 없다!

“영천후 씨…. 아니, 영천후! 나 셀레브리아 로즈 루셀은 당신의 천인공노할 행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한 사람의 민주 시민으로서 내가 당신을 벌하겠어!”

그 말과 함께 셀레나 척 하고 손가락을 천후의 머리 쪽에 겨눴다.

대체 민주시민이랑 이게 뭔 상관이야? 완전히 일변해버린 태도에 천후는 어처구니 없어하다가, 그 직후 그녀의 손가락 끝에 빛이 응집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 움찔했다.

마법!

“하늘 날아 뚫어라!”

그녀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손끝에 모인 빛이 쏘아져나갔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자아낸 마법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권투선수의 펀치만큼의 힘이 있다. 맞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쓰러지리라.

맞기만 한다면.

“흡!”

파칵! 파지지지직! 하지만 그녀가 마법을 쏘아낸 그 순간 천후는 고개만 까딱 움직여서 그것을 피해냈다. 그 덕분에 빛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한참 뒤쪽의 천장 조명에 격중, 천장 판넬과 함께 박살나 버렸다.

“피, 피했어? 어떻게?”

방금 쏘아낸 빛의 발사 속도는 거의 권총탄에 근접할 정도로 빠르다. 그런데 그걸 피해 내다니? 셀레나는 깜짝 놀라서 천후를 바라보았다.

한편 천후는 미리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고, 머리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까지 예측했기 때문에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그걸 정말 쏴재끼자 참지 못하고 노성을 토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내 뒤에 나보다 더 큰 사람이 있었으면 맞고 병원행이었다고! 제정신이야?”

“으, 윽!”

셀레나는 그 말에 흠칫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쇼핑 하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녀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가 정상적인 소리를 하자 오히려 오기가 돋아 맞대응했다.

“시, 시끄러워. 당신 같은 사이비 교주가 훈계하지 마!”

그와 함께 그녀의 금발이 넘실넘실 일렁거리며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제압해야하나? 천후가 고민하는 그 순간.

파파파파파팍! 투두두둑 투둑! 갑자기 마트 건물 전체에 커다란 진동이 일어나더니, 천장의 모든 조명들이 터져나가고 내장재가 박살나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진짜 미쳤군!”

아무리 착각했다손 쳐도 이런 사고를 치다니? 하지만 막상 셀레나는 급하게 머리를 붕붕 저으며 겁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내가 한 게 아니야.”

“뭐…?”

방금 전에 한 짓을 생각해보면 의심갈 수밖에 없지만, 저 표정은 아무리 봐도 거짓이 아니다. 저런 얼굴을 의도적으로 지어낼 수 있다면 그건 기업 인사담당자가 아니라 연기자를 하고 있으리라.

게다가 그것 말고도 천후 역시 그녀의 행동이 아니라고 느끼는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그럼 뭐지?’

그 해답은 바로 나왔다.

<<유, 유그드라실에서 전언! 파급 디제스터 출현! 마, 마트 내 손님 여러분들께서는 부디 침착하시고 비상구를 통해서 대피해주세요! 파급 디제스터 출현!>>

============================ 작품 후기 ============================

오늘 오후 즈음에 하나 정도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추천, 선작,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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