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메이드 오버 런>
“후우우우우….”
홍희주와 합류한 후 경찰서 취조를 끝내고 나온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유그드라실 측이 개입해서 훈방조치로 풀려나왔다지만, 경찰들이 그를 보는 눈치가 곱지만은 않았다.
천후 스스로도 너무 폭주했다고 속으로 반성했지만, 다시금 머리끄덩이를 잡혔던 여학생이 어른거리자 이가 갈렸다. 그걸 보고 어떻게 참겠어.
“에휴…….”
“숨이 차신가요?”
한편 바로 옆에서 그런 그를 가만히 올려보던 희주가 그렇게 물어왔다.
“응? 네?”
“숨이 차시다면 천천히 걷겠습니다.”
“아, 아뇨.”
천후는 깜짝 놀라 손을 휘저었다. 싸움을 끝내고 찾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사거리까지 나와 있었다. 즉 그들을 작살내는 걸 전부 보고 있었단 건데 이런 소리라니?
예쁘고, 나름대로 마음써주는 것 같긴 하지만 정말 종잡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사실 방금 그런 장면들을 보면 겁을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긴 싫었지만, 천후는 구경하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물러나는 모습들을 보고서도 이해할 순 있었다. 사람 여섯을 조져놓고 상쾌하게 웃고 있는 놈을 보면 겁을 안내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저기…희주 씨는 제가 무섭지 않으세요?”
“…….”
결국 천후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그를 올려보더니 눈을 한 번 깜빡이며 되물었다.
“어떤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니 음…. 그러니까요. 희주씨는 알고 계시죠? 제가 마법사란 거…. 그리고 방금 전에…제가 좀 음. 이상, 했잖아요?”
“…….”
“그러니까 무서워하는 거 아닌가 해서….”
빤히.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봐오는 그녀의 눈빛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왜 이런 말을 굳이 꺼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눈을 마주보고 있으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뇌리 속 알 수 없는 응어리는 풀리지 않아서, 무심코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말았다.
그 때.
스윽. 볼가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손. 하이얀 손.
그 색만치나 차가운 손이었다. 인형을 만지는 것 보다 찬 듯한, 얼음장 같은 손. 하지만 그런데도…사람 특유의 질감이 온기와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어, 무심코 좀 더 기대게 하고 만다.
손의 주인은 그 무게를 느릿이 받아, 천천히 약지와 소지로 간질이듯 움직여 턱을 감싸 고개를 움직이게끔 하는 것에 따라가 보면 다시금 그녀의 눈이 올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알 같다고 생각한 맑은 눈이 심지를 꿰뚫었다.
“무서워하길 바라십니까?”
음색에 변화는 없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다. 그럼에도 심장에 박히고 머릿속에 울려서…천후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 대답을 더듬대며 내놓았다.
“아니요.”
“그럼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들려오는 확언. 눈동자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서, 이것이 티끌만치의 거짓 없는 진실임을 고해왔다. 그 모습에…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시선에 가득 찬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순백의 소녀는 볼 위에 두었던 백옥을 움직여 흐트러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스윽 하고 귓가에 엄지가 와서 닿자, 발개진 귓바퀴가 움찔하며 떨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올려보던 그녀는 얼마만큼 지난 후, 여전히 무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숨은 다 고르셨습니까?”
“네? 아, 예에.”
“그럼 가시죠. 아직 오늘 전해드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네. 그러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이고만 천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맞추어 그녀도 다시금 옆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옆모습을 살짝 훔쳐보다가 시선을 정면으로 옮긴 천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곤란해. 이건 정말…정말로 곤란해.’
정말로……곤란하다.
*
“이곳이 오늘부터 천후님이 지내실 집입니다.”
“허어.”
지하철에서 내려 도보로 10분쯤 걸었을까? 아파트 천지인 서울 도심에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있나 싶을 정도 큰 주택가가 그를 맞이했다.
그 중에서도 그의 집이라고 소개된 곳은 대로에서 얼마 들어오지도 않은 곳에 있었는데, 빌라도 아니고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꽤나 번듯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지만 마당도 있었고, 집 건물 옆에는 빨래건조용으로 쓰려고 만들어놓은 비닐하우스와 창고건물까지 보인다.
“장난 아닌데?”
일반 상식이 좀 부족한 편인 천후는 땅값, 집값에 대해서 쥐뿔도 몰랐지만 그래도 이 집의 가치가 상당할 거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위치가 좋다.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10분 이내. 당연히 버스정거장도 10분 이내. 게다가 대형마트들도 가까운 곳에 두 곳이나 있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집값은 천정부지일텐데, 집 자체도 요즘 세상에 단독주택이라니…. 게다가 부지 자체도 주변 집들에 비해서 큰 편인데다가, 대문 옆 벽면에 셔터가 달려있다 싶더니, 개인 주차장이란다.
“대, 대체 얼마예요. 이 집?”
“글쎄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 주인님이 예전에 살았던 집이었다고 하더군요.”
“네에?”
“말씀으로는 어차피 매각하려고 내놨던 집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이 돼?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딱 벌린 천후는 뭔가 아연해지는 기분에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집 매매가가 싸졌네 어쩌네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지만, 현재 서울의 부동산 물가는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그런 상황에서 집 한 채를 그냥 쾌척해버리다니.
천후 자신이야 이런 물가 관련은 잘 몰랐지만, 이게 보통 대인배 소행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일단 이게 대문과 문의 도어 락 카드키입니다. 그리고 만약을 위해서 번호 키와 실물로 열 수 있는 열쇠도 드릴 테니 잃어버리지 마세요.”
“네에.”
수전증 환자마냥 덜덜 떨면서 키를 받은 천후는 소중히 그것을 챙겨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1층은 부엌과 거실, 큰방. 그리고 2층은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있었다.
1층의 부엌과 거실엔 필수적인 전자제품과 가구들이 전부 갖춰져 있었다. 커다란 소파와 52인치 평면tv까지 떡 설치되어있으니 뭐 말 다했다.
게다가 안방에는 대체 왜 혼자살 집에 이런 걸 가져다 두었는가 알 수 없는 트리플 베드 침대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우와….”
이쯤 되니 아무리 몰염치한 천후래도 식은땀이 안날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2층은 벽지와 장판만 깔려있을 뿐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냥 방들이 있었다. 그래도 2층의 화장실 물은 내려가는 게, 사람이 들어와 살 준비는 완전히 끝내놓은 상태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거의 평생 이 집을 마련해준 고인규에게 노예처럼 굴어야 할 지경이다. 하지만 더욱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어? 지하가 있네?”
“네. 원래는 쓰지 않는 곳이었는데, 주인님을 위해서 손을 봐뒀다고 하시더군요.”
“…….”
여기서 뭘 더 손을 봐놨단 거지? 3대를 노예로 만들 셈인가? 침을 꿀꺽 삼킨 천후는 천천히 지하실로 내려가 불을 켜보았다.
“우와….”
그곳에는 수많은 운동기구들이 놓여있었다. 유산소운동을 위한 런닝머신, 웨이트를 위한 바벨, 덤벨들이 무게별로 정리되어있고, 높이를 조절 가능한 금속 봉 대 등.
회원제 사설 헬스장에서 많이 보이는 머신 계열은 없다시피 했지만, 천후에겐 크게 상관 없었다. 오히려 없는 게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어서 더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건….”
함께 지하실로 내려왔었던 희주는 그 중에서 한구석에 놓여있는 노란색 짐 볼, 그러니까 다이어트 헬스장에서 흔히 보는 큰 공에 관심을 보였다.
무심코 그것을 꾹꾹 눌러보던 그녀는 조심스레 그 위에 걸터앉았다.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작은 몸이 올려진 빨간색 짐 볼이 살짝 폭하고 찌그러지면서도 탱탱하게 유지되자, 그것을 칭찬하듯 옆면을 쓰다듬은 그녀는 작은 입을 벌려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죠! 완전 최고예요!”
이정도 시설이면 굳이 운동하려고 다른 곳 찾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돈 받고 이용권을 팔아도 되리라.
“다행입니다. 그럼 더 필요한 게 있는지요?”
“네? 어….”
그 질문엔 멍하니 입을 벌린 천후는 곰곰이 생각했다. 혼자 사는 집에 이정도로 갖춰져 있는데 뭔가 더 필요한 게 있을까? 꼼꼼히 돌아다녀보면 소모품 종류는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뇨. 딱히 오늘은 더 생각나는 거 없을 거 같네요.”
“그렇습니까?”
그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특유의 맑은 음색으로 속삭였다.
“알겠습니다.”
*
홍희주가 차려준 식사를 먹고 집 어디에 뭐가 있나 살펴보고 나니 벌써 늦은 밤이 되어있었다.
시계가 11시를 가리킬 때쯤이 되자, 오늘 있었던 많은 일들이 가져온 피로가 한꺼번에 덮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한차례 기지개를 쭉 편 천후는 목을 풀어보고는 중얼거렸다.
“아….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 그냥 일찍일찍 자야지.”
그렇게 결심한 천후는 그대로 탈의하고 욕실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희주가 여전히 식탁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서 얼른 옷을 추슬러 입었다.
식사 이후에는 거의 행동이 없어서 퇴근했나 싶었는데, 인기척을 내고 있지 않았을 뿐 쭉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흐, 흐익. 저기…희주씨. 벌써 11신데. 퇴근 안하세요?”
“퇴근 말입니까?”
오히려 되물어온 그녀는 드물게도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함을 표시해왔다.
‘뭐지…?’
그러고 보니 근무시간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는 자기도 모르게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설마 아니겠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천후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혹시 희주씨도 이 집에서 같이 사는 건가요?”
“그렇습니다만.”
그렇습니까…. 갑자기 몰려오는 암담한 기분에 천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위로 쳐들고 미간을 꾹꾹 눌러보았다.
하긴 좀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고용인이라지만 11시면 자기 집에 가야지…. 너무 태연히 있더라마는….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신의 인생은 그녀에게 24시간 전담마크 당한단 말인가?
“그, 그래요? 그럼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까 편히 쉬세요.”
“네.”
마치 지금 식탁 의자에 앉아있는 게 정말 편하다는 쉬고 있는 거라는 듯이 답해오는 그녀의 모습에 천후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익숙해져야지….’
이제부턴 매일 같이 지내야 할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에겐 그다지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자기 세뇌를 완료한 천후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지금은 씻자. 씻고 모두 잊어버리자. 욕조에 들어가면 모든 게 풀리리라. 포지티브하게 생각하기로 한 그는 입고 있던 옷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는 샤워를 시작했다.
“으아…. 좋다.”
생각해보면 오늘 정말 새벽같이 일어나 면접 보고 나서 지금까지 마음 편하게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다 따듯한 물을 맞으니 그 모든 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온몸에 물을 묻힌 그는 샤워기를 끄고 욕조로 향했다. 욕조엔 이미 따듯한 물이 받아진데다가 거품까지 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희주가 미리 준비해둔 모양이었다.
“으…너무 고마운데….”
이러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 왠지 부끄러워진 천후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욕조에 발을 담갔다.
그때였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욕실의 문이 열렸다.
“?!”
이 집안에 욕실에 들어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아니…있다면 한명이 있긴 하다. 그것에 생각이 미친 천후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온기 때문에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김 너머로 홍희주의 모습이 보였다.
“희, 희주씨? 왜 갑자기!”
졸지에 맨 엉덩이를 그대로 까 보인 천후는 기겁해서는 욕조 안으로 뛰어 들었다. 하지만 희주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동요 없이…아니. 후덥지근한 욕실의 기운 탓일까? 백지장처럼 희던 얼굴에 살짝 붉은 빛을 띠며, 더욱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몸을…씻겨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희주는 천천히 상의 앞섶의 단추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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