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엘리나2, 그간 정말 감사했어요. 더 머물다 가면 정말 좋을 텐데.”
“또 만나러 올게. 나도 그동안 고마웠어. 프리시니아와 말프 아저씨, 릭 경, 제이드, 로버트, 맥키, 다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해!”
깊이 정이 든 2왕녀와 기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엘리나2는 다시 길을 떠났다. 세계 최고의 정령왕 마스터가 되기 위한 그녀의 모험은 계속될 것이다.
14장 외전의 정석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달리던 마차가 거대한 저택 앞에서 멈췄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기 무섭게 작은 소녀가 풀쩍 뛰어내렸다. 코랄색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귀여운 소녀의 얼굴엔 잔뜩 흥분이 어려있었다.
“오빠! 빨리, 빨리!”
“리리, 기다려.”
소녀의 뒤를 따라 열두 살 정도 돼 보이는 코랄색 머리의 소년이 내려섰다. 오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뛰어가던 리리가 얼마 못 가 부드러운 잔디 위에 넘어졌다.
“리리!”
놀란 오빠가 달려와 소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리리는 울먹거리던 얼굴에서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냈다.
“괜찮아? 아프진 않아?”
“응!”
“씩씩하네. 자, 어부바할까?”
말을 꺼내기 무섭게 오빠의 등에 와락 업힌 리리는 히히 하고 작게 웃었다. 사이좋은 두 남매가 저택 앞에 다다랐을 무렵, 저택 문이 열리며 하얀 백발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왔다.
“아이구, 우리 강아지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지?”
“라라 증조할머니!”
오빠의 등에서 내린 리리가 한달음에 뛰어가 증조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라라는 리리의 뒤에 서서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하는 증손자에게도 손을 뻗었다. 젊은 시절 자신의 머리 색과 똑 닮은 코랄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만져주다가 증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너희들 온다고 간식을 만들어 뒀단다. 가서 먹자꾸나.”
“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달콤한 쿠키와 케이크 냄새가 풍겼다. 부엌에서 접시를 들고 나오던 카를라히는 막 집 안으로 들어선 증손주들을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띠었다.
“오느라 힘들었지? 어서 오거라.”
“안녕하세요, 카를라히 증조할아버지.”
“그래그래. 자, 거실로 가자꾸나.”
볕이 잘 드는 거실 탁자에 둘러앉은 소년, 소녀는 간식을 먹기 바빴다. 그 뒤에 앉은 라라와 카를라히는 따스한 차를 들이켰다.
“엄마와 아빠는 저녁에 오신대요.”
“그래, 전해 들었단다.”
지금쯤 국정을 보느라 바쁠 손자 녀석을 떠올리며 카를라히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약해지는 아내 라라를 위해 그는 일찍이 황위를 물려주고 숲속 요양 생활을 택했다. 증손자가 태어나자 아들 녀석도 얼마 안 가 젊은 손자에게 황위를 넘기고 지금은 황실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쿠키 좀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호호, 우리 손자 기특하기도 하지.”
라라가 주름진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작은 이파리 같은 손이 쿠키를 건네는데 차마 거절할 순 없는 일이었다.
“가만 보자, 내가 틀니를 어쨌지?”
카를라히는 주위를 둘러보며 틀니를 찾았다.
“어디다 뒀는지 기억 안 나요?”
라라의 물음에 카를라히는 허옇게 센 머리를 습관적으로 쓸어 넘기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게슴츠레 눈을 접고 앉아있던 그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부엌에 두고 온 기억이 났다.
“임자, 찾았소! 내 반죽한다고 여기다 두고 깜빡했지 뭐요. 껄껄.”
잔에 담가져 있던 틀니를 꺼내 잇몸에 맞게 끼우며 카를라히는 활짝 웃었다. 이마다 릴리카의 트레이드마크인 별이 그려진 틀니는 다름 아닌 굿즈였다.
연령대에 맞춰 발매되는 굿즈는 이제 노인들 위주로 나오고 있었다. 라라가 쓰는 지팡이도 자세히 보면 로브신사 로고가 박힌 공식 굿즈였다. 한때 유명했던 마법소녀 릴리카도 이젠 마니아층만 알고 있는 고전 만화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젊은 시절의 덕심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집 안 곳곳마다 릴리카 접시, 릴리카 포크 나이프 세트, 로브신사 액자, 로브신사 양탄자 등 생활 굿즈로 이뤄진 것은 물론, 2층 서재는 온통 마법소녀 릴리카 만화책과 동인지로 채워져 있었다.
카를라히는 증손자의 옆에 앉아 쿠키를 집어 들었다. 까르륵까르륵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집 안에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간식을 먹는 세 사람을 지켜보며 라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해가 진 시간, 저택 앞에 거대한 육두 마차가 멈춰 섰다.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노부부의 손자와 손자며느리 되는 현 황제와 황후였다. 라라는 어서 들어오라며 손자며느리의 손을 붙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멀리서 오느라 수고했어. 애들은 위에서 자고 있단다.”
“저희 애들이 두 분을 힘들게 만들진 않았는지 걱정이네요.”
“무슨 소리니, 호호. 얼마나 재롱이 많은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더구나.”
자리를 옮겨 네 사람은 거실에 둘러앉았다. 시녀가 차를 내오고, 차를 음미하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카를라히였다. 그는 나른하게 수염을 쓸며 다정한 눈으로 손자며느리를 응시했다.
“그래, 손자 녀석이 뭐 고생시키는 건 없고?”
“아뇨.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가 직접 요리도 해주고, 저번엔 일 때문에 오페라에 못 가 아쉬워하자 직접 노래를 불러주던 거 있죠?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요.”
“그, 그건 비밀이라니까요. 흠.”
부끄러워하는 손자를 보며 라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누굴 닮았는지 정말 판박이였다. 그리고 뒤늦게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술을 가리고 말했다.
“어젯밤의 일인데, 아니 글쎄, 이이가 증손주들한테 멋있게 보여야 한다면서 마스크 팩을 다 하고, 호호홋.”
“그, 그건 비밀이라 했잖소. 흠.”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다웠다.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는 늦은 밤이 되도록 끊이지 않고 거실에서 흘러나왔다.
깜깜한 침실 안, 구부정한 등을 말고서 라라는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는 라라의 뒤로 카를라히가 다가서며 조용히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임자, 다들 가서 아쉽소?”
“조금은요. 조용하니 집이 적적하네요.”
라라는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카를라히는 그녀의 옆에 앉는가 싶더니 돌연 바닥으로 엉거주춤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는 낮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가 무얼 하나 유심히 바라보던 라라는 그의 주머니에서 꺼내어진 뜻밖의 물건에 눈주름이 펴질 정도로 크게 눈을 떴다.
“손자 녀석이 주고 간 물건이요. 허허, 내 한번 도전해 보고 싶으니 발 좀 빌려주오.”
연한 분홍색 패디큐어를 한 손에 들고서 카를라히는 씰룩 웃었다. 실은 손자에게 따로 부탁해서 받은 물건이지만 그는 능숙하게 아내를 속였다.
라라는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발을 아래로 내밀었다. 평소라면 늙어서 뭘 이런 걸 하냐며 내뺐겠지만 손자가 주고 간 것이라니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아유… 지워질 텐데.”
“어디 보자. 아이 참 예쁘구려.”
제법 매끄러운 솜씨로 발톱 하나하나에 연분홍빛 물을 들이고서 카를라히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라라는 주름진 제 발이 마냥 창피하기만 한지 마르자마자 이불 속으로 발을 숨겼다.
“다 늙어서 뭘…….”
“무슨, 내 눈엔 아직도 새색시같이 곱기만 하구려. 아… 기억나오? 우리가 결혼식을 치렀던 날, 그때 정말 천사가 내게 내려온 것만 같았지…….”
“그때 살쪄서 아랫배 튀어나왔었는데 몰랐어요, 정말?”
“그랬소? 흐음.”
카를라히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오래된 기억을 되짚었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천사같이 눈부신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배가 나오면 뭐 어떻구. 우리 아들을 가졌을 때 기억나오? 부른 그대의 배가 그렇게나 사랑스러웠었지. 나는 빨리 그 배를 쓰다듬고 싶어 매일 일을 서둘러 했었는데.”
“크리온 씨가 많은 도움을 줬었지요. 회임인지도 모르고 있던 어느 날 제 냄새를 맡더니 진단을 받아보라고 했었잖아요. 그때 처음 회임인 걸 알게 됐었고, 당신은 회의 중에 뛰쳐나와서는, 후후.”
침대에 기대앉아 라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진통으로 쓰러진 저를 발견하고 사람을 불러와 준 사람도 크리온 씨였었죠. 그때 당신이 표창을 내렸잖아요. 시민을 구한 용감한 영웅이라면서, 호호.”
“그래, 그랬었지…….”
카를라히는 빛바랜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첫 아이가 태어난 순간, 아이가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었던 순간, 아이가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날, 아이가 결혼식을 올리던 날, 처음으로 손자를 안아본 날까지……. 하나같이 아름다웠던 순간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긴 세월 동안 자신과 함께 있어준 아내였다. 카를라히는 아내의 등을 다정히 쓸어내리며 주름진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춰주었다.
“고맙소, 라라. 한평생 내 그대에게 부족한 남편이었던 것 같소.”
“그런 말 말아요.”
라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전 라히를 가장 사랑하는걸요.”
“…로브신사보다 더?”
“그건 생각해 볼게요.”
“허허허. 임자, 우리가 언제 강을 건널지 알 순 없지만 그때까지 남은 인생 여한 없이 알콩달콩 지내보오. 근데… 다시 태어나도 나와 만날 거요?”
“당연한 소릴 하시네요. 호호.”
침대 위에서 포근하게 울리던 웃음소리도 얼마 안 가 어둠에 스며들었다. 카를라히는 아내가 반듯이 눕도록 도와준 후 자신도 이불을 덮고 누웠다.
“임자를 만나서 참 행복하오.”
“저도요. 이제 자요.”
“그러구려. 좋은 꿈 꾸시오, 임자.”
내일도, 모레도, 1년 뒤도, 그리고 언젠가 눈을 뜨지 않을 그날까지도 서로가 서로의 옆을 든든히 지켜줄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노부부는 나란히 잠이 들었다. 여전히 두 사람의 손은 다정히 맞물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