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114)화 (114/115)

114화

“따귀 마사지 배울 거야. 듣자 하니 너희 세계엔 따귀 마사지라는 게 있다면서? 일단 여기서 마사지 기초부터 배우고 태국으로 갈 거야.”

“잠깐…, 너 그럼 몇 년이나 여기 붙어있게?”

“글쎄. 내가 널 쫓아내려 했던 것처럼 너도 어디 날 한번 쫓아내 보든가.”

로잘리의 당찬 미소가 김빙의를 향했다. 김빙의는 그 말이 절대 자신에게서 안 떨어지겠다는 말처럼 들려서 약간 소름이 돋았지만 곧 “맘대로 해.”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하나둘 학생들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빙의는 창문 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늘일 텐데 어쩐지 오늘따라 더욱 푸르러 보였다.

* * *

푸른 하늘, 반짝이는 태양 아래 짧은 은발 머리의 여인이 서있었다. 길어서 불편하다는 이유로 머리를 싹둑 자르고, 모험을 떠나겠다며 집을 나선 지 4년째였다.

엘리나2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날아가는 새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는 드넓은 초원을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실피드!”

정령의 힘을 빌려 엘리나2는 하늘 높이 공중 부양했다. 마치 새의 날갯짓처럼 두 팔을 느리게 젓던 그녀는 초원과 숲을 잇는 지점에 멈춰 선 마차를 발견했다. 딱 보아도 높은 귀족이 탄 것 같은 마차 주위를 산적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네놈들! 감히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길을 막는……!”

“누가 탔든지 알 바 아니다! 순순히 돈을 내놓으시지! 안 그러면 네놈들 모두 무사치 못할 것이야!!”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산적들이 흉흉한 도끼를 쳐들었다. 호위 기사라 해봤자 고작 다섯 명이었다. 스무 명은 족히 될 듯한 산적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기사 중 반이 검을 뺏기고 이미 나동그라졌다.

“릭 경, 제이드 경!”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 마차 안에서 고운 드레스 차림의 소녀가 뛰쳐나와 외쳤다. “나오시면 안 됩니다!” 하고 기사의 처절한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적의 우두머리가 소녀의 손목을 거칠게 휘어잡았다.

“크크큭, 이년을 팔면 돈이 꽤 되겠는걸?”

“이거 놔!”

손목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소녀가 질끈 눈을 감은 그 순간이었다. 콰과가가각!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돌연 땅이 갈라지며 산적들이 그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뿐 아니라 어디선가 불어닥친 강한 회오리가 남은 잔당을 휩쓸고 지나갔다.

“자, 자연재해다!”

부하들 전원이 단번에 나가떨어지자 우두머리는 사색이 되어 숲으로 도망쳤다. 가까스로 풀려난 소녀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순간이었다. 소녀의 앞에 두 발이 사뿐히 착지되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다정한 물음에 고개를 들자 짧은 머리의 여성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엘리나2를 쳐다보고 있던 소녀가 수줍게 시선을 수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녀는 자신이 크리니아 왕국의 2왕녀 ‘프리시니아 알레인 크리니아’라고 밝혔다.

“꼭 사례를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인연이 되어 엘리나2는 2왕녀의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한 달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산맥을 넘는 동안 몬스터들을 만나 고생을 했으며, 도적들과 한판 승부를 하기도 했고, 잠시 머무른 도시에서 2왕녀가 납치되기도 했다.

고난과 역경 끝에 왕녀 일행은 겨우겨우 서대륙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변두리 지역인 만큼 길도 잘 닦이지 않고 마을을 찾기 힘들어 야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이 불침번을 정하고 취침 준비에 들어갈 때 엘리나2와 프리시니아는 모닥불 앞에 사이좋게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난 세계 최고의 정령왕 마스터가 되는 게 꿈이야. 그래서 집을 뛰쳐나왔고, 널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어!”

“정말 대단하네요. 전 늘 자유롭지 못했어요. 이번 여행도 처음이죠.”

“잠깐만… 누가 있는 거 같아.”

“엘리나2?”

“쉿.”

엘리나2는 하급 정령들이 알려준 사실에 귀를 기울였다. 무장한 인간들이 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서둘러 일어나!”

엘리나2의 외침에 맞춰 기사들이 빠르게 검을 빼 들고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어두운 나무 사이로 쉭, 하고 화살들이 날아들어 왔다.

“실피드!”

거대한 바람의 방어벽이 캠프 주위를 둘러쌌다. 프리시니아를 보호하는 대형으로 서서 엘리나2와 기사들이 경계의 눈빛을 드러낼 때였다. 어둠에 물든 나무 사이로 하나둘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자들은 다름 아닌 기사였다. 선두에 선 기사가 은빛 투구를 벗자 높게 올려 묶은 푸른 머리가 흘러내렸다. 남성이라 하기엔 여린 얼굴선이 엘리나2의 눈엔 마냥 여자로 보였는데 곧 높고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땅에 무단으로 발을 들인 외부인이여, 그대들을 체포하겠다. 순순히 응할 시엔 무력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알겠다. 그 전에 왕족에 대한 예의를 갖춰주시게!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크리니아 왕국의 제2왕녀 프리시니아 알레인 크리니아 님이시다!”

호위 기사 단장인 말프가 나서서 외치자 곧바로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푸른 머리의 기사가 허리를 숙여 무례를 사과했다.

“경비대장 카일라라고 합니다. 그럼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나2 일행은 급히 짐을 챙겨 기사들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성으로 간다는 그들은 점점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 주변에 인가가 없다는 것을 미리 확인한 말프가 무슨 속셈이냐고 언성을 높이려 할 때였다.

선두에서 걷던 푸른 머리의 기사 카일라가 돌연 허공에 손을 뻗었다. 동시에 손바닥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아무것도 없던 숲 한가운데에 포털이 나타났다.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엘리나2 일행도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포털은 곧바로 마을의 광장과 이어져 있었다. 큰 조각 분수대와 그 근처를 뛰어노는 어린아이들,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까지 평화로운 늦저녁의 모습이었다.

옹기종기 모인 작은 저택들 뒤로 보이는 성은 마찬가지로 크진 않았으나 상당히 아름다웠다. 엘리나2는 성안으로 들어서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났다. 마을 사람들, 성문 경비병도 그렇고 일하는 사람들까지 거의 다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의 의문은 몇 분 뒤 풀리게 되었다. 왕의 알현실에 도착한 엘리나2는 왕좌에 앉아있는 지배자를 마주하고 입이 떡 벌어졌다.

“…엥, 엘리나3?”

활동하기 좋아 보이는 제복 차림에, 긴 은색 머리를 늘어뜨리고 왕좌 아래를 내려다보던 엘리나3이 드물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군. 흘러나온 목소리는 위용마저 서려있었다.

“네가 여기 지배자라고?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제국을 떠날 때 너에게 했던 말, 기억나?”

여성도 당당히 기사가 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그렇게 말했던 그녀였다. 엘리나3은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쯤의 일을 떠올렸다.

“무작정 제국을 가로질러 이 서대륙에 도착했을 때였어. 이곳 지역은 워낙 열약한 곳이었지. 내가 살던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처참한 일이 일상처럼 발생하는 곳이었어.”

섬들과 밀접한 서대륙 해안 지역은 예로부터 섬나라의 야만인들에게 수시로 침탈당해 왔었다. 야만인들에게 잡혀 끌려가거나 제물처럼 바쳐지는 소녀들이 상당수였다.

어린아이들이 성적 착취와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엘리나3은 남장 기사들과 함께 섬나라에 쳐들어갔다. 밤낮없이 이어진 치열한 전투 끝에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대다수가 어린 시절 잡혀 온 터라 가족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갈 곳 잃은 여성들과 어린아이를 보호하고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게 지원할 힘이 필요했다.

“난 엘리나5에게 연락을 취했어. 그녀는 흔쾌히 많은 것을 도와줬지. 이 마을과 성, 그리고 당장 먹고살 물자까지 지원해 줬어. 고맙게도 말이야.”

“그럼 이 포털은? 네가 한 거야?”

“언제 또 침탈을 받을지 모르기에 엘리나4가 포털을 만들어 준 거야. 이 나라의 사람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마법 시스템이지.”

엘리나3의 얘기에 프리시니아는 물론 호위 기사들까지 감탄에 차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서 자신들의 지도자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에는 저마다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먹고 자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육을 도입해 실행하는 중이야. 내가 말했듯이, 여성도 당당히 기사가 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중이지. 물론 기사는 신체적 한계가 따르니 다른 직업도 함께 말이야.”

기사 다음으로 가장 촉망받는 직업은 마법사였다. 마계 교육학부 장관인 엘리나4가 매주 직접 찾아와 지도해 주고 있었고, 상위 성적자들은 마계의 각종 마법직에 등용하기로 마계 지도자 엘리나5와 이미 얘기를 끝낸 상태였다.

“저 그런데, 마을 사람들을 모두 교육시키려면 그만한 돈이 들지 않나요?”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프리시니아가 손을 들며 얘기했다. 왕녀로서 배우고 싶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2년 전쯤엔 엘리나1이라는 유명 연예인, 그러니까 저와 엘리나2의 자매가 방송 촬영을 왔었습니다. 저의 부탁이었죠. 그녀의 방송 덕분에 세계적으로 후원이 진행되는 중입니다.”

“아, 정말 멋지군요.”

열악한 환경에서 꿈과 희망이 넘쳐나는 환경을 창조해 낸 셈이었다. 엘리나3은 강인하지만 부드러운 눈빛으로 프리시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개인이 능력과 힘이 있어야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프리시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얘기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붙였다. 엘리나2는 뭔진 몰라도 왕녀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나3과의 반가운 만남도 잠시, 엘리나2는 다음 날 아침 왕녀 일행과 함께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왕국으로 향하는 동안 중간에 위기도 많이 겪고, 말다툼도 하고, 웃고, 눈물도 흘렸지만, 결국 무사히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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