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이미 방을 나간 오빠를 향해 라라는 다급하게 큰 소리로 외쳤다. 디자이너들의 ‘또 먹게?’ 하는 곤란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라라는 애써 모른 체했다.
이른 아침, 수도 시내에 위치한 고급 뷰티 숍에 한 남자 손님이 들어섰다. 헤어 손질, 메이크업은 물론 의상까지 대여해 주는 이곳은 주로 젊은 고객층들이 찾아오는데, 대다수가 무도회에 참석하기 전에 치장을 위해 들렀다. 그렇기에 이른 오전부터 젊은 남성 손님이 찾아온 것은 매우 드문 케이스였다.
“어서 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직원이 방긋 웃으며 연한 금발의 남자 손님에게 다가갔다. 미하일은 무심하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으며 치장 받으러 왔다고 밝혔다. 막내 직원이 그의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어두는 동안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 아티스트가 나와 그를 안내했다.
“따로 찾으시는 선생님이 있으신가요?”
“아뇨, 오늘 처음 왔는데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어떤 스타일로 꾸며드려야 될지 저희가 알 필요가 있으니, 혹시 오늘 치장 받으러 오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첫 데이트라거나, 초상화를 남기는 날이시라든가…….”
“한때… 좋아했던 여자의 결혼식에 가요.”
미하일의 한숨처럼 흘러나온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울려 퍼졌다.
“그렇군요……. 손님의 마음, 저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답니다.”
그때 아무도 없던 기둥 뒤에서 중년의 여성이 비장한 포스를 풀풀 풍기며 걸어 나왔다.
“이 뷰티 숍의 원장인 제가 책임지고 당신을 올 한 해 가장 핫한 가이로 만들어 드리죠. 줄리나! 피에르! 소피아아―!”
짝짝짝 하고 가벼운 손뼉에 맞춰 직원들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분위기는 단번에 가열되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 아티스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타올라 있었다. 멀리서 듣고 있던 막내 직원도 돌변해 주먹을 꽉 쥐었다.
“저희만 믿으세요. 그분이 후회하실 만큼 오늘 최고로 멋지게 해드릴 테니.”
“전 애인의 결혼식은 원래 이렇게 가줘야 하는 법이죠. 훗.”
“저희 뷰티 숍의 실력은 이 수도에서 최고로 뽑힌답니다! 맡겨만 주세요!”
그렇게 시작된 치장은 장장 세 시간 만에 끝이 났다. 그것도 결혼식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닦달해서 겨우 탈출한 것이었다. 미하일은 거울을 볼 새도 없이 마차를 잡아타고 황성으로 향했다.
황성 뒤뜰에서 열린 야외 결혼식은 라라의 취향에 맞게 소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영애들과 덕질하며 만난 지인들, 친인척들만이 모인 자리였기에 인원이라 해봤자 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중 서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신부를 찾는 미하일의 존재는 단연 튀었다. 새하얀 턱시도에, 주머니에는 꽃을 꽂고 있는 그는 연한 금발을 말끔하게 쓸어 넘긴 모습으로 말 그대로 ‘풀 세팅’이었다. 몇몇 하객들은 그가 신랑인 줄 알고 인사를 할 뻔했으니 말 다 했으리라.
술렁술렁, 미하일의 주변으로 퍼져나간 속닥거림은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라라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라라는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멀리서도 눈에 띄는 민폐 하객을 발견하고 눈을 홉떴다.
“…미하일?”
라라는 먼저 그에게 다가섰다. 그 목소리에 미하일은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3월의 신부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꽃다운 모습으로 치장한 라라가 서있었다.
“놀랐어요. 너무 과하게, 아니 너무 멋지게 꾸미셨네요. 정말 남주답게요. 마치 제 결혼식이 아니라 미하일과 라히의 결혼식이 아닌가 싶을 만큼요.”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뭐, 너도 웨딩드레스 잘 어울리네.”
웨딩드레스의 자태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던 미하일은 툭 튀어나온 아랫배에 시선이 멈췄다. 약간은 굳은 그의 표정에 라라가 왜 그러냐고 묻자 미하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표정을 풀었다.
“그보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요새 어떻게 지냈어요?”
“새 성녀를 뽑느라 바쁘게 지냈지 뭐.”
소소하게 얘기를 나누는 그 둘의 뒤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이 결혼식의 또 다른 주인공인 신랑 카를라히였다.
“이게 누군가! 교황이 직접 와줄 줄이야. 영광이군.”
“당신을 보러 온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고맙군.”
오늘 하루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미하일과 악수를 나누었다. 물론 두 사람을 단둘이 놔둘 생각은 없는지 찰떡처럼 라라의 곁에 붙어 섰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선 두 남녀를 바라보던 미하일이 살짝 미소 지으며 눈길을 내렸다. 아련한 눈빛이 라라의 튀어나온 배에 닿았다. 네 옆에 있는 남자의 아이를 품은 너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이네.
“축하해.”
그녀가 품은 것은 한 생명이 아닌 하나의 지방 덩어리였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하일은 속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한때 널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네가 정말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
미하일은 진심으로 옅게 미소 지었다.
축복과 웃음 속에서 결혼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을 사람들 속에서 지켜보던 미하일은 뒤를 돌아 유유히 자리를 벗어났다.
대신전으로 돌아온 그는 바로 집무실로 향하지 않고 숨겨진 비밀 장소로 향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숲속의 집은 오늘도 조용하기만 했다. 미하일은 문을 열고 들어서며 한 손을 들어 연미복의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으로 향했다.
넥타이에 가있던 손이 품 안쪽으로 향하더니 곧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었다. 미하일은 익숙한 듯 열쇠로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섰다. 철컥, 하는 소리에 방 안에 있던 누군가가 뒤를 돌아본다.
“저 왔어요, 작가님.”
미하일은 빙그레 웃으며 불 켜진 책상 앞에 자리하고 있는 여자를 응시했다. 나이는 30대 초반, 둥그런 안경을 쓴 밋밋한 얼굴의 여자는 팔 토시를 낀 모습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일본의 유명한 만화 작가 ‘다케우리 히나코’로, 마법소녀☆릴리카를 탄생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렇다. 미하일은 온몸의 모든 마력을 이용해 그녀를 이세계로 불러들여서 감금한 것이었다.
“아직 다섯 컷밖에 못 그렸네요?”
미하일은 검은 잉크가 마르지 않은 종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성실히 연재하셔야죠. 이 속도라면 티샤가 다시 살아나는 장면은 한 달 뒤에나 볼 수 있겠네요.”
“…와타시…모우 이야다……. 모우 겡카이다요…….”
“당신은 더 그릴 수 있잖아요.”
방금까지만 해도 미소가 걸려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표정만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손에 억지로 펜을 쥐여준 미하일의 손이 히나코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세게 어깨를 쥐었다.
“읏.”
근육을 누르는 손끝에 히나코는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결리던 어깨가 마법같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랜 마감 속에서 해방된 것만 같은 시원한 기분도 잠시, 다시 그녀를 속박하는 목소리가 어둡게 귓가를 울렸다.
“자, 어서 펜을 움직이는 거예요. 날 위해서, …티샤를 위해서.”
어긋난 욕망. 하지만 한 번쯤은 실현해 보고 싶은 덕후들의 욕망이었다.
* * *
―다음 뉴스입니다. 일본의 유명 만화가 다케우리 히나코 작가가 실종되어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실종 전날 자택에서 근무 중이었다는 증언을 토대로 현지 경찰은 수사에…….
―이번 정류장은 **대역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이어폰 너머로 들려온 버스 안내음에 김빙의는 뉴스 동영상을 끄고서 폰을 집어넣었다. 버스에서 내려 캠퍼스 언덕을 올라가는 걸음은 무거웠다. 김빙의는 잠시 멈춰 서서 높은 하늘을 돌려다 보았다.
그곳의 하늘도 이곳과 같았었는데.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온 날 김빙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F학점과 자칭 ‘남친’이라는 복학생 오빠였다. 카톡과 통화 목록을 확인해 보니 복학생 오빠와 사귄 흔적이 버젓이 남아있었다.
과에서는 이미 CC로 소문이 쫙 난 상태였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신은 곧바로 이별을 선고했다. 그리고 대학교를 자퇴하고, 먼 지역에 있는 대학교에 재입학했다. 전공은 피부미용학과로,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었기에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김빙의는 설렘을 안고 캠퍼스 부지에 발을 디뎠다. 아직 학생들이 많이 오지 않은 시각, 김빙의는 새로운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휴대폰부터 켰다. 포털 사이트 실검 1위는 ‘다케우리 히나코’가 차지하고 있었고 그 뒤를 ‘마법소녀 릴리카’, ‘일본 만화가 실종’이 잇고 있었다.
‘뭐, 다른 세계로 차원 이동이라도 했나 보지.’
김빙의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다른 검색어를 클릭할 때였다.
“옆자리에 누구 없지?”
“……?”
돌연 들려온 도도한 목소리에 김빙의는 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옆을 올려다보았다.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의 여자가 새붉은 입꼬리를 올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라우스 셔츠에 검은 스키니 진을 입고 있어도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너.”
“김빙의, 원래는 이런 모습이구나. 꽤 수수하네.”
조소치고는 시원스럽게 올라간 입술이었다. 화려하게 꾸민 모습으로 로잘리는 머리를 한번 찰랑 어깨 너머로 넘기고는 옆에 앉았다.
김빙의는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것만 같은 휴대폰을 간신히 책상 위에 놓고 로잘리를 돌아보았다. 꿈이 아닌지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이없어서 비실 웃음이 입가에 흘러나왔다.
“…무슨, 악녀가 찾아오냐고. 보통 남주가 찾아와야 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불만이니? 다시 갈까?”
“가든가.”
“미안한데, 너 때문에 온 거 아니라서 안 갈 거야!”
앙칼진 성격은 안 변했는지 대번에 새된 소리가 날아들었다.
강의실 안을 울린 큰 목소리에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뒤로 쏠렸지만, 로잘리는 X도 신경 안 쓴다는 듯 큼직한 로고가 박힌 유명 브랜드 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들어 입술에 발랐다. 그리고 다시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마사지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온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