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엘리나1 씨도 많이 변하셨군요. 나쁜 쪽이 아니라, 예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 보입니다.”
“감사해요. 아직 연예인으로서 막 사랑받기 시작해서 앞으로 더 열심히 활동해야 되지만요.”
“저도 아직 가야 할 길이 먼걸요. 그런 의미에서 서로에게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려 봅니다.”
흠, 하고 목을 한번 가다듬은 그가 진지한 음성을 냈다.
“저희 기업의 전속 모델이 되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엘리나1 씨의 친근한 이미지가 저희 회사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저야 당연히 영광이죠. 흑브랜드는 흑미와 검은콩, 검은깨를 쓰는 건강한 먹거리 기업이잖아요? 여성을 위한 웰빙 다이어트 식품도 많이 출시된다고 들었어요.”
“많이 공부해 오셨군요. 하하. 그럼 계약에 앞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나 광고에 대한 얘기를 한번 나눠볼까요?”
남주로서가 아닌 한 기업의 대표로서, 여주로서가 아닌 한 명의 공인으로서 두 사람은 정말 업무적인 얘기만 나누고 헤어졌다. 사랑은 없었지만 그보다 위대한 윈윈 관계였다.
붉은 달이 높이 뜬 밤. 마왕성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족들 위에 새로 군림한 젊은 왕 엘리나5가 마계를 다스린 지 한 달조차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반란 세력을 완전히 진압했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아직 최상층까진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았으나 언제 방어선이 뚫릴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시끄러운 소란에 가장 먼저 빠르게 사태 파악에 나선 엘리나4는 일단 중요한 마법 논문들만 따로 챙겨 들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최상층에서도 중심부에 위치한 왕의 집무실이었다. 역시나 자신의 자매는 이곳에 있었다.
“엘리나5, 시간이 없어. 성이 완전히 고립되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돼. 나가는 비밀 통로는 내가 이미 다 파악해 두었으니…….”
“아니, 난 가지 않아.”
왕좌에 홀로 앉아있던 엘리나5가 온화한 얼굴로 엘리나4를 돌아보았다.
“그러니 너만이라도 도망쳐.”
“아니, 너의 판단은 옳지 않아. 널 두고 간다면? 만일 이 성이 함락되기라도 한다면 네 목숨은 보장할 수 없어. 왕인 네가 무너진다면 지금 쳐들어온 반란 세력에게 왕권이 넘어가겠지. 이게 네가 원하는 어리석은 결말인 거야?”
논리적인 엘리나4의 말에도 엘리나5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부드럽게 짓고서 창밖 너머로 펼쳐진 마계를 내려다보았다.
“이 성은 함락되지 않아. 왜냐면 내가 이 자리에 버티고 있으니까. 내가 도망친다면 이곳에 남아있던 병사들은? 마계 백성들은? 그들은 누가 지키겠니?”
전직 성녀다운 대답이었다. 엘리나4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최대한 감정을 억눌러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낮은 한숨 소리를 흘리며 입술을 뗐다.
“알겠어. 네 뜻이 그렇다면 나도 남겠어.”
“…엘리나4.”
“네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거잖아. 그리고 네 신성력은 무시할 만한 게 못 돼. 걸어볼 만하다는 거지.”
엘리나4는 이번만큼은 확률 계산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매인 엘리나5를 믿어볼 뿐이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기나긴 밤이 지나갔다. 어둠의 끝자락 속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엘리나5는 잠든 엘리나4를 커튼 뒤에 가려두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먼 곳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곧 문 바로 앞에서 끊겼다. 쾅, 하고 커다란 쇳덩이에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울리고 곧 양쪽 문이 벌컥 열렸다. 거대한 갑옷을 입은 적들이 쏟아지듯 들어왔으나 그들을 맞이한 엘리나5는 그저 고요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곳의 지배자가 누구냐.”
선두에 선 검은 갑옷을 입은 적이 구겨진 쇳덩이를 치켜들고 말했다. 처음 보는 형태의 무기에도 엘리나5는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물러가세요. 저는 무력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웃기지 마라!!”
“당장 왕좌를 넘겨라!”
“뭣들 해! 저 여자를 잡아!”
적들이 일제히 무기를 쳐들고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순간 하얀 섬광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적이 있던 방향이 쑥대밭이 되었다.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닥에는 섬광이 쏘아진 자국이 흉흉하게 남아있었다. 검게 타 재가 된 문을 본 적들은 크게 당황하며 술렁였다.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엘리나5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적들에게 다가가자 놀라 무기를 떨어뜨린 자도 있었다.
“…더,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투항의 뜻을 보이겠다면 제게 당신들의 수장을 넘기세요. 저도 더 이상의 살육은 원하지 않습니다.”
엘리나5의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말에 적들은 순식간에 사기를 잃은 듯 멈칫거렸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선두에 있던 검은 갑옷이 천천히 엘리나5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자들은 죄가 없어. 이자들을 이끈 건 나다……. 나를 죽이고, 이자들은 살려 보내줘.”
무시무시한 위력 차에 더 이상 엘리나5를 상대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검은 투구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깊게 침전돼 있었다. 좌절되는 상황에 수장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엘리나5는 자신의 앞에 꿇은 수장의 투구에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려 한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 정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마족일 거라 생각했으나 초록색 피가 튄 검은 투구를 벗기자 놀랍게도 긴 갈색 머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옷 안에는 인간 여인이 들어있었다. 한때 슈모르드 자작가에서 일했던 시녀 모니카였다.
“어째서, 라라의 시녀일 당신이 여기 있는 거죠?”
“시녀? 하, …네가 지금 앉아있는 자리는, 본래 내가 앉을 자리였어! 그랬어야만 했다!!”
모니카의 핏발 선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왕의 신부가 되어 마계로 온 그녀였지만, 이미 마왕성의 주인은 바뀌어 있었다. 마왕이었던 남주는 마왕직을 돌려받을 생각도 않고 혼자 사라져버렸고, 덕분에 그녀는 홀로 악착같이 인간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녀직을 관둔 그녀가 갈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몰라……. 다 그 남자가! 날 마계 왕비 자리에 앉혀준다 해놓고……. 흐으윽.”
남자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를 잘 만나 인생 역전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만큼 헛되고 허무한 것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손에 넣지 않으면 의미 없는 권력이었다.
모니카는 대신 마왕의 자리를 차지하기로 했다. 자신의 자리가 사라졌다면 돌려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전 시녀였을 때의 인맥을 총동원해 자신과 함께 인생 역전을 노릴 부대를 창설했다.
이름하여 프라이팬 부대였다. 2~30년 경력의 주방장들로 구성된 부대로, 한평생 주방에서만 일했던 그들의 체력과 팔 힘은 웬만한 병사보다 강하게 단련된 것이었다.
그렇게 부대를 창설하고 자신의 힘으로 마왕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모니카의 큰 꿈도 여기까지였다.
“내 목을 쳐!! 이젠 내겐 갈 곳이 없으니… 이 삶에 미련 또한 없어!”
모니카는 무기인 흉측하게 일그러진 프라이팬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댕그랑,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숙인 채 서느런 칼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인자한 목소리가 목덜미 위로 내려앉았다.
“민간인들로 구성된 부대로 성을 지키는 마족 병사들을 무찌르고 이곳까지 온 것만으로도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당신에게 왕좌를 넘겨줄 순 없지만, 전 당신을 높게 사고 있어요.”
엘리나5는 강력한 부대를 이끈 장수가 민간인 여성이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탄에 차있었다.
“당신의 목숨을 거둘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풀어주기엔 당신은 너무나도 위험하죠. 그러니 선택하세요.”
몸을 숙인 엘리나5는 모니카와 부드럽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제 아래에 들어와 저와 성을 지키는 전속 근위대 대장이 될 것인지, 아니면 평생 마왕성의 감옥에 있을 것인지.”
“그게 대체… 무슨…….”
“만일 제게 충성을 바치겠다면, 당신이 시녀였을 때 받았던 봉급의 200배를 매달 지급하겠어요. 마땅한 권력과 부를 줄 테니 그 능력을 저를 위해 사용해 주겠어요?”
그 말에 모니카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조아렸다. 이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엘리나5의 손을 꽉 붙잡았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시녀에서 전속 근위대 대장으로 출세한 모니카였다.
* * *
눈이 녹은 땅 위로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났다.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봄. 커플들이 가장 많이 식을 올리는 축복의 시기가 제국에 찾아왔다.
슈모르드 자작가에도 식을 앞둔 새 신부가 있었으니, 평범한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으로 승격한 라라였다. 라라는 거울 앞에 서서 디자이너들이 입혀준 웨딩드레스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라히와 매일 데이트하며 맛있는 것만 먹다 보니 다시 요요가 와서 살이 많이 불어난 상태였다. 답답하다는 이유로 코르셋을 하지 않았더니 옆구리 살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허리 치수를 한두 치수만 크게 늘려주세요.”
절대 자신이 살을 빼겠다고는 하지 않는 라라였다. 식단 조절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이미 한번 체험했던 터라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치수를 체크하려던 그때였다. 벌컥, 하고 열린 문에 디자이너들의 시선이 뒤쪽으로 쏠렸다. 라라는 누군지 짐작이 간다는 양 태연하게 거울에 비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야, 라라 슈모르드. 나 스파게티 먹을 건데…….”
“네가 끓여 처먹어!!”
“아니, 말 좀 끝까지 들어라. 네 것도 끓여줄까?”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로렌스가 말을 건넸다. 그 말에 라라는 크게 놀라며 아랫입술을 살짝 떨었다.
“너… 로렌스 슈모르드 맞아? 가짜지?”
“결혼 축하 의미로 네 것까지 끓여줄라 했더니, 참나. 싫으면 됐다.”
“아냐, 아냐. 드레스만 벗고 내려갈 테니까 내 것까지 끓여놔! 내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