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밤이 깊어질 때까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끝에 두 사람은 깔끔하게 하나의 타협점을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라라는 카를라히와 함께 최면을 동반한 심리 치료 센터에 찾아가게 되었다.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나 보네요. 이곳에 오시는 환자분들 대부분이 스트레스로 인해 전생 꿈을 많이 꾸시고 찾아오시거든요. 전생 꿈을 꾸는 게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내면의 욕망 표출이거나, 전생과 관련 깊은 인물과의 만남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꾸게 되는 거거든요.”
전문가의 상담이 이어졌다. 라라의 옆에 앉아 조용히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카를라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큰 부작용은 없나? 예를 들어 기억에 혼란이 온다든지, 하는…….”
“큰 부작용이라고 하면, 회귀죠. 제때 치료받지 못하셔서 많이들 회귀하시고 그런답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도 손쓸 도리가 없어요.”
“…아, 주인공들만 회귀하는 줄 알았는데 다들 회귀하고 그러는군요…….”
스트레스성 회귀 증세. 듣도 보도 못한 전문 용어에 라라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귀 밝은 전문가는 단박에 캐치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드문 경우는 아니에요. 회귀하시는 건 워낙 과거에 미련이 많으시거나, 과거를 되돌리고 싶거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하시는 거라……. 물론 저희 쪽에서 집중적으로 전문 치료를 받으시면 회귀하시지 않고 무엇보다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실 수 있답니다.”
그렇게 깔끔하게 설명을 끝낸 전문가는 패키지A, 패키지B, 패키지C가 적힌 메뉴북을 내밀었다. 가격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른 코스들에 라라는 이미 결정을 내렸단 듯이 담담히 말했다.
“최고급 스페셜 코스로 부탁드려요. 비용은 이쪽이 다 낼 거예요.”
카를라히는 옥쇄가 찍힌 수표를 꺼내 들어 내밀었다. 역시 모든 보상은 돈으로 하는 게 최고였다.
* * *
경쾌한 벨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여자는 마시고 있던 커피를 급히 노트북 옆에 내려놓았다. 환하게 빛이 나는 휴대폰 화면에는 ‘담당자님’이라는 네 글자가 떠올라 있었다.
여자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한 세계의 창조주이자 주신이라 불리는 그녀도 담당자 앞에선 가녀린 인간일 뿐인 것이다. 주신은 화면 액정을 조심스레 엄지로 밀어 전화를 받았다. 담당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가님, 안녕하세요.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안녕하세요. 예예… 괜찮습니다.”
“보내주신 원고 최종본을 방금 확인했는데요. 기존 여주인 엘리나들이 남주들과 이어지지 않고, 웬 엑스트라가 폭군 남주와 이어지네요.”
“아, 그게요… 그러니까, 여주들을 통해 꼭 연애와 결혼만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그런 자주적이고도 참신한 로판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럼 로맨스가 아니지 않나요?”
생각해 두었던 변명이 먹히지 않자 다시 목이 탔다. 주신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 보려 애썼다.
“그, 대신에 엑스트라 영애 라라와 황제 카를라히가 사랑에 빠졌으니 괜찮지 않을까요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여주는 엑스트라 영애 라라가 되는 것 같네요.”
“아하… 네, 그래서 말인데요.”
주신은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에 급히 말을 바꿨다.
“제목을 ‘엘리나의 다섯 남자들’에서 ‘로판의 정석’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 * *
“최근 예능버라이어티 ‘나 혼자 간다’에 출연하여 한창 인기몰이 중인 연예인이죠. 매력 만점, 외모 만점, 엘리나1 씨를 지금 이 자리에 모셔봅니다! 환영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MC의 외침에 맞춰 관객석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단 두 자리만 놓여있는 환한 무대 위에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길게 늘어뜨린 은색 머리칼과 적당히 높은 구두, 그리고 스키니한 정장 위에 짙은 푸른 코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이야, 정장도 매우 잘 어울리시네요. 실물로 뵈니까 미모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감탄사를 부르네요.”
“과찬이세요. 그리고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도 오페라하우스에서 매주 목요일 밤 진행되는 깜짝 토크쇼는 유명 연예인만이 나올 수 있는 자리였다. 엘리나1은 귓등 너머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조용하지만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귀에 걸린 에메랄드 귀걸이가 조명 빛을 받아 푸르게 반짝거렸다. 역사적인 레전드 미모짤의 탄생 순간이었다.
“지금 앞에 계신데, 차마 눈을 못 마주치겠습니다. 하하. 데뷔하시기 전에도 유명하셨다고 하는데요. 집안이 소문난 금수저 집안이시라고…….”
“금수저까지는 아니고 아버지께서 공작이세요. 아버지가 워낙 검소하신 성격이시라 저도 아버지를 닮아 뭔가 사치를 부려본 적이 잘 없네요.”
“그러시군요. ‘나 혼자 간다’에서도 그런 소박한 면을 많이 보여주셔서 시청자들의 호감을 더욱 끌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엘리나1의 솔직한 외출 장면이 방송에 나가고 인기도가 급상승했었다.
길거리를 걷다 가난한 소년을 보고 금화 한 닢을 쥐여준 장면, 뒷골목에서 불량배를 만나고 차분하게 대응해 빠져나가는 모습, 길에 쓰러진 병자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모습. 사랑받는 착한 여주 모먼트가 시청자들에게도 큰 호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정말 인품 또한 훌륭하십니다. 집안뿐만 아니라 과거 황제 폐하의 약혼녀로서도 유명하셨죠.”
“네, 그때는 집안에서 이어주신 거라 잘 몰랐는데 다들 저에 대해 많이 관심을 가져주셨더라고요. 감사하게도요.”
혹시라도 퍼질 루머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엘리나1은 파혼한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깔끔하게 끝맺었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관객석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MC가 준비된 질문을 날렸다.
“최근에는 또 유명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의 주역으로 뽑히셨다고요?”
“네, 내년 1월에 개봉하고요. 연극 제목은 ‘아름다운 공작꽃’이라는 작품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신인 배우로서 이런 큰 작품의 주역을 맡아 정말 영광이라 생각되고요.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이들 보러 와주세요.”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깔끔한 멘트에 MC는 만족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질문을 얹었다.
“사실 ‘아름다운 공작꽃’에 나오는 작중 인물 중에 엘리나1 씨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네, 사실 D체스 작가님과는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이였어요. D체스 작가님께서 감사하게도 제 이름을 작품에서 써주셨더라고요.”
“아~ 엘리나1 씨는 정말 인맥이 넓으시군요.”
아름답고, 겸손하며, 성격 좋기로 유명한 엘리나1은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연예인이었다. 데뷔 초에는 그녀를 깎아내리려는 루머도 많이 돌았지만 그보다 좋은 썰이 더 많았다.
자신의 친구 언니가 엘리나1의 스타일리스트인데 한 번은 협찬받은 옷이 예쁘다고 말했더니 다음 날 똑같은 걸로 사서 선물로 주었다느니, 자신은 방송사에서 일하는데 그렇게 착하고 스태프들을 잘 챙겨준다느니, 자신은 엘리나1과 아카데미 동창인데 그렇게 학교생활 성실히 하고 깨끗할 수가 없다느니, 하는 썰이었다.
현재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유명인으로서 톡톡히 자리매김한 그녀였다.
“혹시 이상형이나 결혼관은 어떻게 되시는지? 엘리나1 씨 정도 되시는 분과 사귀려면 그만큼 대단한 분이셔야 될 것 같은데요.”
“연애도 좋고 결혼도 물론 좋지만, 전 이 연예계에 데뷔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그런 건 생각 않기로 했어요. 단 한 명과의 사랑보다는 수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는 게 전 더 기쁘거든요. 그래서 많은 분들의 사랑에 보답해 드리는 게 먼저인 것 같아요.”
소신 있는 엘리나1의 대답에 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아쉽지만 이제 토크쇼를 마무리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오늘 토크쇼는 어떠셨나요?”
“정말 즐거웠어요. 팬분들과 소통을 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 같아요.”
“네~ 앞으로도 엘리나1 씨의 행보를 응원하는 바입니다! 수고하셨고, 오늘 이 자리에 나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토크쇼가 무사히 끝이 나고, 그로부터 몇 주 뒤 엘리나1은 전속 모델 제의를 받게 되었다. 러브 콜을 보내온 기업은 건강한 웰빙 식품으로 유명한 흑(黑)브랜드로, 남녀노소는 물론 특히나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브랜드였다.
전속 모델 계약에 앞서 엘리나1은 자신과 한번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길 원한다는 기업 대표와 약속을 잡았다. 약속 당일, 미팅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놀랍게도 그녀가 아는 인물이었다.
“반갑습니다. 저 기억하시죠?”
“당신은…….”
엘리나1은 커다란 방 안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정장 차림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머리를 하나로 길게 내려 묶은 그는 붉은 눈동자를 곱게 휘어 내렸다. 폐퇴적인 인상과는 달리 사무적인 태도로 그는 엘리나1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오랜만입니다.”
“페레우스 씨, 정말 놀라워요. 설마 마왕 남주에서… 이렇게 한 기업의 대표로 성공하실 줄은 몰랐어요. 대단하세요.”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하루아침에 집주인이 바뀌고, 설상가상으로 건강에 문제까지 생기자 그는 모아둔 돈만 가지고 마왕성에서 나왔다. 무작정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지상으로 올라온 그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작은 월세방에서 살았다.
꿈도, 희망도, 사랑도 없이 삭막하게 하루하루를 버텼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떨어진 라면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온 그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파는 붕어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그렇게 길거리 흑화 붕어빵 장사로 시작해서 서민 창업 성공 신화를 이루기까지 단 1년이 걸렸다.
성실함과 흑화라는 창업 아이디어로 만들어 낸 흑(黑)브랜드는 양심적인 서민 기업으로 우뚝 자리 잡아 현재는 해외 진출까지 노리고 있었다. 페레우스는 두 손을 깍지 끼고서 맞은편에 앉은 엘리나1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