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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10)화 (110/115)

110화

화르르륵, 순식간에 거센 불길이 치솟아 올랐으나 대리석 바닥에는 그을음을 남기지 않았다. 마법으로 투명한 실드를 형성해 불길은 물론 연기조차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회색빛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그 속에서 꿈지럭하고 선홍색 다리 끝이 움직였다.

문어, 아니 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찌를 듯한 강렬한 샹들리에 빛 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너머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의 당혹스러운 눈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죄가 있다면, 나는 그를 사랑한 죄밖에 없어.’

뿌옇게 올라오는 연기를 마시며 라라는 청정 해안을 떠올렸다. 머릿속이 확 하고 맑아진 기분이었다.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문어로서의 기억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깊은 바닷속에서 처음으로 만난 그이. 떡 벌어진 여덟 개의 다리에서 늠름함이 느껴지던 문어였다. 듬직한 빨판으로 제 허리를 휘어 감고서 사랑을 속삭였던 그가 자신을 버렸다.

그물에 걸린 자신을 버려둔 채 서둘러 산호초 사이를 누비며 도망치던 그의 뒷모습이 연기처럼 아련히 흩어져 갔다. 허망한 눈빛이라도 주었다면 이리 가슴 아프진 않을 터인데. 죽어가는 까만 눈동자에 바닷물처럼 짠 눈물이 맴돌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문어를 사랑하지 않으리. 문어로 태어나지 않으리.’

생애 처음으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라라는 살을 파고드는 밧줄 속에서 마지막으로 필사의 몸부림을 쳤다.

‘뜨거워……! 뜨거워…….’

발끝으로 화르륵 번져오는 불길이 사납다. 빨판이 오그라드는 끔찍한 둔통에 라라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럴 발성 기관도 없다지만. 붉은 생기가 돌던 산홋빛 피부는 오동통해 보일 만큼 점차 하얀 빛깔로 익어가고 있었다.

신이 계신다면, 부디 이 한낱 미물을 가엽게 여겨주소서. 까만 두 눈에 깃든 생명의 빛이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절한 열망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라라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짐의 눈물이 오돌토돌한 빨판을 가로질러 가 환한 금빛으로 일렁이는 바닥에 아롱졌다.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의식 너머로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라!”

‘무슨 소리지……?’

“…라라!”

순간 깊은 어둠을 뚫고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라라는 그제야 헉, 하고 눈을 떴다.

“…라라, 괜찮아?”

가쁜 숨을 토해내며 라라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손 두 개, 다리 두 개, 모두 정상이었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를라히의 눈과 마주친 순간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디 봐봐, 괴로운 꿈이라도 꾼 건가……? 너무 애타게 흐느끼기에 차마 깨우지 않을 수가 없었어.”

부드럽게 눈물을 훔치는 그의 손가락을 느끼며 라라는 조용히 숨만 몰아쉬었다. 분명 평소였다면 설레고도 남을 다정한 스킨십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찝찝한 기분만 들었다. 약간은 경직된 그녀의 표정에 카를라히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라라?”

“저… 혼란스러워서, 아직 적응이 안 되나 봐요. 분명 꿈인 것 같은데…, 꿈일 텐데…….”

과연 꿈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 타들어 갈 듯한 고통이나 풍경, 그리고 어린 시절의 그의 모습까지 전부 현실 같았다. 마치 전생을 본 것만 같았다.

“있잖아요, 라히.”

“왜 그러지? 물 마실래?”

“…아니, 괜찮아요. 그저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혹시 어릴 적에… 대형 문어를 무도회장에서 구운 적 있어요?”

라라의 잔뜩 긴장한 물음에 카를라히는 잠시 오래된 기억을 회상하듯 깊이 생각에 잠겨있다가 뒤늦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그때 정말 굉장했지. 일곱 살 때 생일이었나? 퍼포먼스 삼아 구웠던 거라 먹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 잊지 못할 추억거리 중 하나다.”

눈에 빛을 띠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라라는 그대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일곱 살 때라니, 자신과 그의 나이 차를 생각한다면 아마 그날 문어로서 죽고 바로 인간으로 태어났나 보다.

‘내 과거 전생이, 문어였다고……?’

보통 여주들은 전의 삶도 인간이었고, 비록 화형당했지만 한때는 황제에게 사랑받았던 황비라든지 그러던데, 자신은 시발 그냥 문어구이였다. 분명 잔인한 방식으로 억울하게 죽임당하긴 했는데 감정 이입을 하기엔 너무 거지 같았다.

해산물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살면서 자신도 문어를 먹긴 했으니까. 지금 와서 문어를 왜 구웠냐며 오열할 만큼 감수성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라라는 차마 자신의 전생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괴로움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이불을 발로 걷어차는 그녀를 카를라히는 곁에서 바라보는 것밖에 해줄 것이 없었다.

전생을 알게 된 후로 라라는 마음이 좋지 못했다. 입맛도 없었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자꾸 그 생생한 꿈이 떠올랐다. 현생은 사람으로 태어난 게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설마 제 코랄색 머리가 문어의 영향을 받은 건가 싶으니 괴롭기까지 했다.

부쩍 야위어 가는 라라의 상태에 카를라히는 걱정이 되어 밤낮으로 그녀의 저택에 찾아왔다.

슈모르드 자작 부부는 딸의 애인이라는 청년이 드나들 때마다 “자네 정말 폐하를 쏙 닮았군. 허허. 인물이 훤칠해!”, “우리 딸이 보는 눈도 좋지. 우리 예비 사위는 어쩜 이렇게 훤하게 생겼는지 천하를 다스릴 것만 같아요, 호호.” 하고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카를라히는 예비 장인, 장모 어른께서 자신을 어렵게 대하는 것보다 편한 청년으로 대해주는 것이 더 좋았기에 굳이 황제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 부지런히 눈도장을 찍으며 이미 사위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라라는 그를 보는 것이 조금 불편했다.

그가 미우면서도, 문어 구운 걸로 화내는 것도 그렇고, 그렇지만 그 문어는 자신이었고. 싱숭생숭한 마음만 들었다.

“어머. 얘, 라라야―! 카 서방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니?”

“누가 서방이에욧!”

라라는 방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자신이 내려가지 않아도 이미 1층에서는 카 서방 왔네, 와서 뭐 좀 먹으라는 둥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방 안에서 홀로 꽁하니 몇 분간을 앉아있었을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라라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저지능의 오빠 새끼가 노크란 걸 할 리 없으니 이 노크의 주인이 누군지는 뻔한 것이다.

“…어서 와요. 미안해요. 내려가서 반겨주지 않아서…….”

“아니, 아니다. 그저 요새 어디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걱정돼서 얼굴만 보고 가려고 온 거다.”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얼굴로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카를라히를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편했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다. 하지만 이에 반발해 약간의 치기가 치밀어 올랐다.

라라는 그의 손을 잡아 방 안으로 끌어들인 후 그대로 그의 품에 포옥 안겼다. 그러곤 불만이 있어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그의 품에 달라붙어 툭툭 가슴을 두들겨 댔다.

“라라?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흠.”

크게 당황한 한편 내심 좋은 건지 카를라히의 목소리 끝이 어긋난 게 느껴졌다. 라라는 일부러 대답을 안 해주다가 그의 가슴팍에다 대고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이에 카를라히의 얼굴이 다시 급격히 어두워졌다.

“라라, 최근에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나한테 털어놓아 줄 순 없을까? 응?”

“라히.”

“응.”

“전 라히가 굉장히 밉고, 좀 그래요.”

그 말에 자신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던 커다란 손길이 우뚝 멈췄다. 고개를 들자 마치 영혼까지 얼어붙은 듯한 표정의 그가 보였다. 라라는 이걸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그를 상처 주고 싶진 않아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근데 계속 저만 꽁해있으면 라히도 영문을 몰라 답답할 테고, 불공평하니까 솔직히 말할게요.”

“…역시 그날 밤에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내가… 경험이 없는 동정이라… 너무 못해서 싫어진…….”

“아니에요! 그런 거!”

라라는 발끈하며 외쳤다. 서툰 그의 손짓이 자신에겐 외려 더 자극적으로 다가왔다는 건 비밀이었다.

“흠, 아무튼, 그런 거 아니구. 라히, 라히는 전생을 믿어요……?”

“전생?”

“저요, 최근에… 꿈을 통해 전생을 봤어요.”

예상치도 못한 그녀의 말에 카를라히는 창백한 얼굴에 조금 생기를 띠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진지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데, 라라가 힘겹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근데요. 놀라지 말고 들어요. 라히가 저를 죽였어요.”

“…내, 내가 너를?”

“라히가 일곱 살 때 탄신 무도회에서 죽였던 그 대형 문어 기억나죠?”

“그게 왜……?”

“그 문어가… 크흐르읇, 저예요.”

“…그 문어가 너였다고?”

카를라히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진지하게 자신을 웃기려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말에 슬퍼해야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카를라히는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한 것임을 깨닫고 물기 없는 입술을 열었다.

“…어, …그, 미안하다.”

“…아니에요. 이미 지나간 일 돌이켜 봐야 뭐 하겠어요. 그래도 지금 절 구워 드시진 않을 테니까 그것만으로 큰 변화가 있는 거겠죠.”

“아, 그때 먹진 않았어. 굽기만 했지……. 아, 눈치가 없었군. 미안하다.”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했던 폭군 시절이라 그랬다고 변명하기에도 뭐했다. 카를라히는 자꾸만 타들어 가는 목에 침만 삼키다가 슬며시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두 손을 곱게 모아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됐어요. 다 지난 일인데요, 뭐.”

“…그렇지만, …너를 죽였으니까. 제가 죽일 놈입니다…….”

카를라히의 사죄에 라라는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 사이로 한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다. 죽을 듯이 미안한데 사과하기 애매한 자와 죽었지만 사과받기 애매한 자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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