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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09)화 (109/115)

109화

뜻밖의 말에 카를라히는 다시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라라는 볼을 긁적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로브신사는 못 잃으니… 애초에 서로 불공평한 제안이었잖아요. 미안해요, 힘들게 해서. 탈덕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저도 잘 아니까요.”

“아니다……. 그다지 힘들지도 않았고, 이 정도는 널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어.”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까 저도 솔직히 말할게요.”

무엇을? 카를라히는 잔뜩 긴장한 채 침을 삼켰다. 혹시 소개남 중에 마음에 든 사람이 있었다거나, 이미 결혼을 약속했다거나 그런 충격 고백이 이어지진 않겠지. 라라의 뒤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카를라히는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 사실은…….”

“…사실은?”

라라는 한참을 말하기를 머뭇거리다가 딱 눈감고 사실을 털어놓았다.

“리―, 릴리카가 영원한 여친이라는 말에 조금 질투 나서 그런 말한 거예요. 탈덕 안 해도 돼요……. 흠. 저도 유치하단 거 알아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라라는 고백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카를라히는 눈을 깜빡일 생각조차 못 하고 말 그대로 멍하니 굳어있었다.

“그래도 조금 감동했어요……. 라히가 진짜로 탈덕하고 이렇게까지 참을 줄은 몰랐어요. 다키마쿠라도 중고 시장에 팔았죠?”

“그걸 어떻게…….”

“오덕계 중고 시장이 워낙 좁잖아요. 저번에 릴리카 다키마쿠라 판매글 올라온 거 보고 제가 몰래 샀어요. 지금 제 방에 모셔놨으니까 가져가요.”

“라라…….”

멍하니 라라만을 담고 있던 그의 눈이 점점 촉촉하게 변해갔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라라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서 말을 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법소녀 릴리카는 저흴 만나게 해준 고마운 작품인데 어떻게 탈덕해요. 물론 최애는 릴리카한테 양보하지만, 여친은 나예요! 알겠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라는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거대한 품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숨이 막혀 그의 가슴팍을 두 주먹으로 통통 치자 그제야 카를라히는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을 살짝 풀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그가 고개를 숙여와 자신의 귀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귓바퀴에 입술이 닿고, 그 사이로 틈틈이 흘러나온 입김과 목소리가 귀를 뜨겁게 물들였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라라 넌 이미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

“…부끄러워요.”

“부끄러워하지 마. 나도 부끄러우니까…….”

베개한테 다정하게 속삭인 적은 많지만 사람에게는 처음이니 말이다. 그리고 베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따스하고 부드러운 몸이었다. 카를라히는 라라를 다시 꼭 끌어안고 조곤조곤히 말해주었다.

“릴리카를 평생 여친이라 생각하고 현실 여자를 돌보듯 하던 때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온기는 릴리카가 주지 못하잖아.”

기우뚱 뒤로 넘어가는 두 사람의 몸을 푹신한 침대가 받아주었다. 그의 든든하고 다정한 온기와 기분 좋은 체향이 라라의 전신을 훅 덮쳐왔다.

라라는 느릿하게 겹쳐오는 말캉한 입술을 빨아들였다. 숙여진 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헤집으며 18R 동인지를 통해 섭렵한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리드했다.

2D냐, 3D냐로 논쟁하는 것은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4D가 최고였다.

* * *

그날 밤, 라라는 꿈을 꿨다.

‘여긴 어디지?’

도르르르,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 힘겹게 눈을 뜨자 드높고 화려한 무도회장 천장이 보였다.

라라는 커다란 은제 트레인 위에 누워있었다. 성인 열 명이 누워도 될 만큼 널찍한 너비를 자랑하는 트레인은 그 무게 또한 만만치 않아 황궁 시종 네 명이서 끌었다. 구경하러 몰려든 귀족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차 술렁이면서 트레인이 멈출 자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라라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무거운 눈만 끔뻑거릴 때였다.

“갓 잡아서 태자 전하께 올리는, 살아있는 거대 문어입니다!”

“세상에, 저런 진귀한 걸…….”

“크기가 괴물만 하군. 저 다리로 사람 둘은 거뜬히 옭아매겠어.”

우렁찬 외침에 이어 귀족들이 저마다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라라는 그것이 자신을 가리키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신이 깸과 동시에 그제야 얼얼한 추위가 엄습해 왔다.

자신의 ‘몸’은 얼음이 고르게 깔린 트레인 위에 누워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성인 두셋 크기만 한 문어의 몸을 하고 굵직한 여덟 개의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다리 끝을 살짝 꿈틀거리자 이것이 진귀한 구경거리라도 된다는 듯 다시 한번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대체.’

라라가 당혹감에 차 주위를 둘러본 순간이었다. 밤에 뜬 달처럼 깊고 푸른 벽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멀지 않은 곳, 두 번째로 낮은 상석에 착석해 있는 어린 소년이 자신을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많이 앳된 얼굴이었지만 라라는 그 소년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잔잔한 광채가 도는 검자줏빛 머리는 짧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화려한 금장식이 달린 복식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소년은 라라가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카를라히였다. 그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는데, 흥미 없는 눈길을 하고서 작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황궁 시종들이 트레인을 완전히 멈추자 선물을 진상한 슐라드 백작이 흡족함에 찬 얼굴로 황태자 카를라히를 올려다보았다.

“일곱 번째 생신,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특별히 준비한 이 대형 문어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슐라드 백작은 물론, 그 주위에 모여있던 자들이 어린 황태자의 소감만을 기다릴 때였다. 카를라히의 작은 입술이 벌어졌다.

“눈이 건방지군.”

짤막한 소감에 슐라드 백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라히는 시꺼먼 눈을 뜬 채 저를 응시하는 문어와 집요하게 시선을 맞출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태자 전하, 소인이 귀가 어두워 잘 못 들었습니다만, 다시 말씀해…….”

“상당히 건방지다고 했다, 슐라드 백작.”

그제야 카를라히의 서슬 퍼런 눈이 슐라드 백작에게로 옮겨갔다. 일곱 살짜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싹수 노란 눈이었다.

“감히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올려다보는 이것을 내게 보인 이유가 뭐지? 내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건가. 아, 그렇군. 반역을 일으키겠단 거였나.”

“…저, 절대! 아닙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사온데 절대 아닙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슐라드 백작이 극구 부인했다. 쩌렁쩌렁한 백작의 목소리와는 달리 애석하게도 주위의 술렁거림은 쥐 죽은 듯 잦아들었다.

“그렇다고 하니 알겠다. 여봐라, 화형식을 준비해라.”

다시 이어진 카를라히의 냉정한 명령에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라라가 놀란 듯 눈을 키웠다. 그건 상석 아래 머릴 조아리고 있던 시종도 마찬가지였다.

“예……?”

얼빠져 묻는 시종에게 카를라히는 분을 억누른 음성으로 운을 뗐다. 여전히 팔꿈치는 금괴처럼 묵직한 금색 팔걸이에 무심하게 얹고서 말이다.

“내 말 못 들었는가. 속히 화형식을 거행하라고 했다.”

“이 자리에서 어찌…….”

“황실 마법사들이 대기할 터인데 뭐가 그리 문제이지. 혹 내 명이 불만이란 건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럼 움직이란 말이다. 뭣들 하는 거지? 황태자인 내 명에 불복하겠단 건가. 내가 보는 앞에서 당장 저 건방진 것을 노릇노릇하게 구우란 말이다!”

카를라히가 꽉 쥔 작은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리치기 무섭게 황궁 시종들은 부산스레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라히! 나예요. 제발 날 알아봐 줘요! 나라구요! 님 여친!!’

라라는 어린 그와 집요하게 눈을 마주치고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했으나, 그동안 장장 열다섯 명의 시종들이 달라붙어서 그녀의 몸을 밧줄로 단단히 묶어 긴 나무토막에 매달았다.

기름을 가져온 시종이 문어 다리에 윤기가 감돌 만큼 슥슥 기름칠을 하고 황실 마법사들이 대기해 있는 가운데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저 문어를 처형하라!”

시종장이 얼른 눈치껏 동조하라는 시선으로 시종들을 곁눈질했다. 마치 어린아이의 장난을 눈치껏 받아주며 놀아주는 삼촌들 같았다.

시종들은 나무 기둥을 더 높이 쳐든 후, 주위 귀족들에게도 동참해 달라는 애원 어린 눈빛을 바쁘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 안쓰러운 눈빛에 몇몇 착한 귀족들은 “처형하라!”, “처형하라!” 하고 소리를 높여주었다.

간혹 젊은 귀족 여성들이 들고 있던 디저트를 문어의 얼굴에다 던지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끈적한 초콜릿과 생크림으로 범벅되어 가는 문어의 얼굴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황태자 카를라히가 높은 의자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그는 모여있는 대중을 슥 훑은 후 중간에 세워진 나무 기둥을 내려다보며 무거운 명령조를 냈다.

“죄목을 읊어라.”

“……?”

“죄목.”

“아, 네, 네. …죄, 죄목은 황족 능멸죄입니다! 감히 숨이 붙은 채로 황가의 혈통을 이으신 고귀한 분께 눈을 부릅뜬 죄, 황태자 전하를 능멸한 이 간악한 문어를 당장 사형에 처하게…….”

“더 없나.”

“…더, 더 말입니까?”

“그래, 죽일 만한 마땅한 이유를 붙이란 말이다. 안 그럼 이 내가 가엾은 문어 생명을 빼앗는 폭군으로 비춰질 것 아닌가.”

미운 일곱 살 특유의 틱틱거리는 말투에 시종장은 큰소리로 죄목을 내뱉기 시작했다.

“다른 문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문어임에도 불구하고 천여 개의 얼음을 깔고 들어와 사치 풍조를 형성한 죄, 많은 이들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 음란한 분위기를 형성한 죄, 마지막으로 황태자 전하를 능멸하고 모함한 죄, 이상으로 사형을 선고하겠노라!”

즉석에서 생각해 낸 죄목들치곤 제법 그럴싸했다. 시종장의 선고가 단두대의 칼이 되어 떨어진다. 동시에 나무 기둥 아래 마법으로 생성된 불꽃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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