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야!! 야!! 들었으면서 무시냐!!”
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주위 시선이 라라에게로 몰려들었다. 라라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극장을 벗어나는 데 급급했다. 남친을 챙길 시간조차 없었다.
뒤늦게 카를라히가 옆에 없는 것을 깨닫고서 라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극장 출구에서 카를라히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안심하려는 순간 그의 옆에 붙어있는 웬 어중간한 코랄 머리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 저 새끼, 집구석에서 스파게티나 끓여 처먹지 여긴 왜 나와선.’
라라는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첫 데이트에 남자 친구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라라는 눈을 사납게 치뜬 채로 남자 친구 옆에 붙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다가섰다.
끔찍한 오빠 새끼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저절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왜.”
“역시 라라 슈모르드 맞네. 야, 튀긴 왜 튀냐. 네가 생각해도 쪽팔렸냐?”
“됐고, 내 남자 친구한테 무슨 볼일인데?”
“푸키킼릴핳학! 남친 ㅋㅋㅋㅋㅋㅋ 너한테 남친이 어딨냐! 푸킬리맇!!”
투턱이 접힌 채 굵은 침방울을 튀기며 웃는 오빠 새끼를 바라보며 라라는 진심으로 정색했다. 같은 배 속에서 나온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한 대 치고 싶게 생긴 얼굴이었다.
“…꺼져라.”
“야, 폐하 닮은 남자가 네 취향이냐? 어휴, 폐하 빠순이 년. 이 형한테 얼마 줬냐. 미친, 진짜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부모님이 알면 얼마나 수치스러우실까.”
“ㅅ…발, 내 남친이 황제다. 어쩌라고.”
“푸키키킼ㅋㅋㅋ핡캬캬캭!! 아나, 미친 ㅋㅋㅋㅋㅋ 개웃기넼 ㅋㅋㅋㅋㅋㅋ 너 이거 황실 모욕죄거든?”
“…죽이기 전에 꺼져라.”
라라가 품속에 있던 호신용 단검을 꺼내 들려던 순간이었다. 조용히 두 남매 사이에 끼어있던 카를라히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
“흠, 로렌스 슈모르드 경? 인사가 늦어 미안하군. 내가 제국 황제 카를라히다만. 그리고 경의 여동생과 진지하게 교제 중이기도…….”
“제 앞에서까지 역할 상황극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 동생 년이지만 진짜 이런 거 시키는 변태일 줄은 몰랐네요. 뭐 대본 같은 것도 있어요?”
로렌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먼저 물어보긴 했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그쪽 세계였다. 로렌스는 자신이 다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숙이고서 라라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러 강제로 카를라히에게 사과하게 만들었다.
“동생 년은 제가 데려가서 교육 좀 시키겠습니다. 오덕인 건 알고 있었지만, 어후……. 동네 창피해서 원.”
“야, 야!! 이거 안 놔?! 이 쓰레기만도 못한@#$&%#$!”
“그리고 님도 데이트 알바 같은 거 하지 마시고요. 근데 진짜 닮긴 닮으셨네. 아, 칭찬이에요.”
그렇게 말하고서 로렌스는 라라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에 반항하듯 라라가 호신용 단검을 꺼내 들어 휘둘렀으나 괜히 기사가 아니란 듯이 로렌스는 가볍게 손등을 쳐 떨어뜨렸다.
“너 존나 이러라고 부모님이 호신용 단검 사 준 줄 아냐?”
“죽일 거야!! 이 개객꺄!! 기필코 죽일 거다!!”
“어휴, 근데 진짜 못생겼다. 너 화낼 때마다 콧구멍 벌름벌름거려서 잘 꾸며논 애완용 오크 같다고.”
‘…오빠가 맞는 건가.’
처음 보는 험악한 남매 싸움에 카를라히는 차마 끼지 못하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늦은 시각, 슈모르드 저택 서재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자작 부부의 앞에는 장남 로렌스가 진지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부모님, 라라 녀석이 많이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아요.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겠고, 더 이상 남자를 밝히기 전에 제물을, 아니 짝을 찾아줘야 될 것 같아요.”
“그렇구나. 하긴 라라도 이제 성년이니 결혼을 할 때가 됐구나.”
자작이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작 부인도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주변에 괜찮은 영식이 있는지 다른 부인들께 물어볼 테니 너무 걱정 마렴, 로렌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부탁드려요, 어머니.”
“호호, 맡겨만 주렴. 이 어미가 오빠인 네가 인정할 만큼 훌륭한 사윗감을 데려올 테니.”
“아니에요, 어머니. 대충 적당한 사윗감이면 돼요. 사위 될 사람 인생도 생각해 줘야죠.”
잘 살고 있던 남의 집 훌륭한 자제 하나를 제 여동생의 제물, 아니 남편으로 던져줄 순 없었다. 로렌스의 깊은 뜻에 자작 부부는 뭐가 그렇게 훈훈한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라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소개팅이 진행되었다. 약속 시간 바로 한 시간 전까지 라라는 자신에게 황제인 남자 친구가 있다고 계속 어필했지만 가족 중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딸이 유명인과의 연애 망상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끌려 나간 소개팅 자리에는 의외로 번듯한 훈남이 앉아있었다. 물론 잘될 생각은 1도 없었기에 라라는 예의상 적당히 대화만 어울려 주었다.
28세 미혼남. 아들 부잣집의 8남 중 장남인 그는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유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라라 씨는 참 성격이 얌전하고 착하시네요. 저희 어머니께도 잘할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요. 저희 집안이 대가족인데 저는 저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 조부모님, 친척 어르신들까지 챙겨줄 마음씨 고운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대가족의 장남이시라구요? 호호, 왜 결혼 못 하셨는지 알 것 같네요.”
그는 라라의 직구가 불쾌한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화장실을 간다며 나섰다. 그리고 50분이 되도록 오지 않았다.
다음 소개남은 33세의 이혼 경력이 있는, 애가 하나 딸려있는 남자였다.
“일찍 이혼을 해서 아이가 제대로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요. 제 아이를 친자식처럼 품어줄 그런 모성애 넘치고 따스한 여자를 찾고 있어요.”
“호호, 아빠가 품으시면 되죠.”
그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선 화장실을 간다는 변명조차 없이 냉정히 자리를 떠났다.
다음 소개남은 29세 미혼남으로, 자리에 앉자마자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는 황금 마차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허세가 가득한 얼굴로 턱을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남성적이라 가부장적인 면이 강해요. 그래서 여자가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내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우위에 있으면 남자의 자존심상 허락되지 않는달까요. 하하, 제게 지킴받는 그런 온순하고 가정적인 여자가 좋아요. 아, 물론 더치페이 아시죠?”
“앞뒤가 다른데, 하나만 해주실래요?”
라라는 예의상 미소 지으며 손의 중지를 세웠다.
허세남은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재산이 얼마며, 자신의 마차를 보면 오늘 한 행동을 후회할 것이라며 윽박을 질러댔다. 라라는 여전히 중지만 세운 채 그를 떠나보냈다.
다음 사내는 30대 초반이라고 했지만 액면가는 40대 후반의 남자로, 말을 나눈 지 10분도 되지 않아 자식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자식은 축구단을 만들 정도로 많이 낳고 싶습니…….”
“꺼져!! 네가 낳냐!!”
라라의 우렁찬 샤우팅에 사내는 움찔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씩씩거리며 라라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냉수를 들이켰다.
이걸로 끝인가, 아니면 더 남은 것인가. 다음 소개남을 기다리는 여자라고는 보이지 않게 흉흉히 살기를 띤 채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 다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라히……?”
깜짝 놀라며 라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셔츠와 바람에 자연스럽게 쓸어 넘어간 머리가 시선에 들어왔다. 얼마나 뛰어온 건지 엉망이었다. 카를라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숨도 고르지 않고 말부터 꺼냈다.
“그, 가문에 찾아갔더니 네가 소개팅을 한다고 해서 급하게… 말리러 왔다만.”
“미안해요. 멋지게 등장할 부분인데, 이미 다 갔어요.”
화기애애한 소개남과의 분위기에 남친의 질투가 폭발하는 클리셰 따윈 없었다. 그런 걸 바라고 나온 것도 아니었지만.
“죄송해요,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했는데도 부모님이 믿질 않으셨어요. 약속이 잡혀버려서 예의상 나오긴 했는데, 다행히 그쪽 남자들도 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구요. 호호.”
“…이렇게 귀여운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니? 거짓말하지 마.”
카를라히는 놀라며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에도 예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는 여자 친구를 데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라라는 조용히 웃으며 카를라히의 옷자락을 수줍게 붙잡았다.
“그래도 이런 자리 만들어 주신 부모님께 좀 감사해요. 라히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다시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랄까요. 후훗.”
“라라도 내겐 좋은 사람인걸.”
마주 수줍게 눈을 마주치며 카를라히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뒤늦게 제 꼴을 알아차리고 비스듬히 돌아섰다. 급하게 나오느라 신경 못 쓴 것도 있지만 셔츠가 땀에 젖어 가슴팍에 달라붙어 있었다.
“라라…….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일단 우리 집으로 갈까?”
“좋아요.”
라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카를라히가 타고 온 마차에 올랐다. 귀족들이 사는 거리에 들어선 마차는 어느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오랜만에 오는 카를라히의 덕질용 저택이었다. 사귀고 난 후로는 처음이었다. 라라는 익숙한 저택 로비를 지나 그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섰다. 방문을 여니 아늑한 공간을 빽빽이 채운 릴리카 굿즈들이 라라를 맞이했다.
라라는 릴리카 굿즈들을 씁쓸하게 응시했다. 일반인이 보기엔 많아 보여도 그녀의 눈에는 평소보다 개수가 확 줄어든 게 보였다.
“라라, 차는 뭘로 마실…….”
뒤따라 들어온 카를라히가 뒤늦게 라라의 시선을 알아차리고서 허겁지겁 전시된 액자들을 하나씩 빠르게 뒤집어놓았다.
“아, 미안……. 황성 침실은 다 정리했는데 여긴 아직 다 정리하지 못했다. 워낙 개수가 많아서.”
“덕질해도 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