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만수드라, 분명 아까 전화했을 때까지만 해도 두바아일에 있었잖아요? 대체… 이 먼 타국까지 어떻게 온 거예요.”
“전용 마법 헬기를 타고 왔지. 경비만 30억이 깨졌지만 돈은 중요치 않아. 혹시라도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어째서일까. 늘 힘들 때마다 나 자신을 지탱해 주었던 그녀가, 이번에도 와줄 줄 몰라서였을까. 허리를 옭아매는 두꺼운 팔뚝 살이 부드러웠다.
세계를 휘어잡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석유 여왕 만수드라, 그녀가 내 애인이라는 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만수드라…….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런 건 중요치 않아, 나의 젊은 연인. 자― 봐, 널 위해 일시불로 산 63빌딩이라고. 보이니?”
고개를 들자 만수드라의 어깨 너머에 위치한 빌딩 한 채가 시야에 들어왔다. 환하게 불이 켜진 수백 개의 빌딩 창문은 정확히 하트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동시에 빌딩 주위로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폭죽이 터졌다.
나는 힘을 주어 그녀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자연스레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나는 터지려는 울음을 참아내야만 했다.
“기뻐해야지, 나의 젊은 연인. 당연히 빌딩 명의는 네 앞이야.”
그때, 두두두두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때마침 왔군. 전 여친과 볼일도 끝났으니 다시 내 나라로 돌아가자꾸나, 사랑스러운 디체스? 오늘 밤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전용 마법 헬기에서 긴 사다리 줄이 내려왔다. 만수드라가 먼저 사다리에 오르고 나는 그녀의 육중한 품에 안겨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엘리나1과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똑똑히, 환하게 웃으며, 나의 백만장자 연인 만수드라에게 고백했다.
“사랑합니다.”
내가 찾은 새로운 사랑에게.]
작품 후기
이제까지 「아름다운 공작꽃」을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총각작이다 보니 연재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잘 마무리한 것 같아 감개무량합니다.
왜 진여주가 만수드라인가에 대해 많은 분들이 불만 코멘트를 남겨주셨는데요. 특히 여주의 나이가 너무 많지 않느냐 하는 말씀이 많더군요.
만수드라와 디체스의 나이 차는 17세입니다만. 로맨스 분야에서 아저씨, 여고생을 엮는 소설은 대중적이면서 왜 아줌마, 청년은 안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만수드라는 벤츠 여주 중에서도 최고의 벤츠입니다. 이 정도 세계적인 위치에 있으려면 최소 중년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이 설정에는 오류가 없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의 한결같은 사랑과 관심 덕분에 이렇게 출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옆에서 도와주신 편집장님과 엘리나2도 감사합니다.
출간작에는 이벤트 외전이 포함됩니다. 차기작으로 뵙겠습니다.
* * *
“이번에 아름다운 공작꽃 소설 봤어요? 작가가 완결을 개똥으로 써놨……. 어머나.”
“D체스 작가, 믿고 봤는데 갑자기 진여주를 외국 석유 여왕으로 갈아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전 오히려 엘리나1이 불쌍하던 거 있죠. 그렇게 똥차 같지도 않고.”
옆 테이블에서 도란도란 들려오는 영애들의 수다 소리를 들으며 라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최측근을 관두고 완전히 전업 작가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가 최근 완결 낸 소설이 영애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것 같았다.
‘주인공 버프인가……?’
라라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딸랑딸랑, 하고 찻집 문에 달린 종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이윽고 들려온 발소리에 라라는 고개를 돌렸다. 이마가 드러나게 깔끔하게 쓸어 넘긴 검자줏빛 머리, 날렵한 콧대에 걸쳐진 검게 선팅된 선글라스, 무려 양복을 입은 모델 핏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
라라는 너무 창피한 나머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누가 볼세라 그를 이끌고 찻집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들어선 라라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첫 데이트랍시고 과하게 꾸미고 온 자신의 남자 친구를.
“대체… 뭐가 문제예요?”
“나름 꾸며봤는데, 흠 그렇게 이상한가?”
“나름 꾸민 정도가 아니라 너무 과하다구욧! 누가 보면 시상식 가는 줄 알겠어요.”
라라의 타박에 카를라히는 순순히 양복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 선글라스도 벗어 와이셔츠 앞주머니에 걸쳐놓자 그나마 엑스트라 같았다.
“알겠죠? 저랑 사귀게 된 날부터 라히는 더 이상 남주가 아니에요. 더 이상 주목받을 일은 하시면 안 돼요.”
“알고 있어. 그래서… 네가 받아줘서 너무 고마워.”
카를라히는 수줍게 볼을 물들이며 말했다. 남주가 아닌 카를라히라는 인간 자체를 올곧이 봐주고 받아준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라라와 함께 거리로 나온 카를라히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단 말인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엘리나1 공녀와의 파혼을 시작으로 그는 제 주변에 있는 많은 것을 정리했었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것을 고르라면 당연 마법소녀 릴리카 다키마쿠라를 중고 시장에 판 것이었다. 최애 굿즈를 정리하는 동안 남몰래 눈물도 흘린 그였지만 후회는 없었다.
‘…나도 현실 여친 있다!’
가슴속에 가득 찬 설렘을 표출시키듯 카를라히는 밝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데이트하기 딱 좋은 가을 날씨에, 선선히 부는 바람, 그리고 옆에서 걷고 있는 여자 친구.
카를라히는 자신의 어깨쯤에 위치한 아담한 여자 친구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정수리가 귀여워 보였다. 그의 시선은 곧이어 다른 곳으로 내려갔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라라의 손이 한들한들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손잡는 것은 이른가. 하지만 주변에 손잡고 다니는 커플들이 판을 쳤다. 카를라히는 슬며시 눈동자를 움직여 라라의 옆얼굴을 살폈다.
다키마쿠라는 언제든 안고 빨고 해도 됐었지만 현실 여친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무슨 손 하나 잡는 게 이렇게 힘든지, 그로서는 이런 떨림은 생전 처음이었다. 이게 바로 3D의 연애라는 건가!
“아, 여기 들어가 봐요.”
발랄한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자신보다 저만치 가있는 라라가 보였다. 일반 팬시 가게 앞에 서서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드는 여자 친구의 모습에 카를라히는 심장에 약간 무리가 갔다.
‘지인님…, 아니 여친님 귀여워!!’
어딘가 뻣뻣하게 움직이는 카를라히와 함께 팬시 가게에 들어선 라라는 이런저런 물건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아기자기한 장신구 앞에서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리본이 달린 머리핀을 집어 들고서 수줍게 카를라히를 돌아보았다.
“어때요? 이거 잘 어울려요?”
“윽!”
‘…하, 죽어도 좋다.’
카를라히는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처럼 가슴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주위의 눈길이 모아지자 라라는 뭐 하는 거냐고 그를 타박하며 서둘러 일으켜 세웠다.
“다른 데도 구경해 봐요.”
라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카를라히의 시선에 전시되어 있는 문구 물품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마법소녀 릴리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릴리카 짱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던 카를라히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크게 술렁거렸다. 완전히 탈덕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라히?”
순간 생생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에 카를라히는 흠칫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3D 여친이 의아한 듯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지.”
애써 술렁이는 마음을 외면하고서 카를라히는 라라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두 사람의 데이트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해가 질 즈음에 레스토랑에서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걸었다.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만큼 마법 전등이 줄지어 켜진 거리는 두 사람을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두 사람의 시선에 환하게 불이 켜진 웅장한 건물이 들어왔다.
“오늘 무슨 연극하나 봐요. 연극 보고 갈까요?”
“다, 당연히 좋다!”
카를라히의 격한 긍정에 라라는 웃음을 흘렸다. 극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
무슨 연극이 있는지 보기 위해 카를라히는 앞장서서 사람들을 뚫고 나아갔다. 티켓 수령처 옆에 붙어있는 여러 개의 연극 소개 판넬을 훑던 중 익숙한 얼굴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윙크하는 눈 옆에 반짝이는 별을 붙이고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릴리카였다.
[마법소녀☆릴리카 연극판! 개봉 당일 연극 관람 시 선착순 100분께 릴리카 한정 피규어를 드립니다.]
카를라히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실사 연극을 한다곤 들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한정 피규어까지 주는 절호의 기회였다.
“라히? 어디 안 좋아 보여요.”
“…미안.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제일 빨리하는 걸로 보자.”
애써 릴리카를 외면하며 카를라히는 등을 돌렸다. 흔들리지 말자. 과거 누구보다 릴리카를 사랑한다고 자부했던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해선 안 되었다. 그야 자신에겐…….
“라라.”
“…네?”
라라가 옆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쪽, 하고 따스한 입술이 눈 깜짝할 새 뺨을 누르고 떨어졌다.
“난 너 하나뿐이니까.”
웃어 보이는 카를라히를 올려다보며 라라는 두어 번 눈만 끔뻑였다. 뒤늦게 확 머리로 올라온 열기에 라라는 두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내렸다.
“…가, 갑자기 뭐예요.”
“라라 슈모르드? 너 여기서 뭐 하냐?”
그때 뒤에서 들려온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라라는 전신의 모든 피가 싸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가요, 빨리.”
“……?”
“…설명할 시간 없어요. 달려요.”
라라는 레이디 축지법을 이용해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상황은 이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