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 영상 중에 재밌는 부분이 있어서요. 이걸 어떻게 살릴 순 없을까 생각하니까 뭔가 생각이 샘솟는 거 있죠? 혼자 다니는 유명인들의 일상을 관찰 카메라 형태로 담은 예능으로……. 아!”
짝 하고 손뼉을 친 엘리나1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마법구가 든 상자를 챙겨 들고서 앉아있는 카를라히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기발한 생각이 나서요. 이걸 바로 기획사 사장님께 말씀드려 보려고요.”
“기획사?”
“후후, 아직은 비밀이에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엘리나1은 은발을 휘날리며 응접실을 나섰다.
그리고 약 한 달 뒤,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간다’가 첫 방영 되고 동시에 어느 신인이 고정 출연해 이름을 알리게 된다. 지금은 아무도 모를 이야기였다.
* * *
조난된 지 일주일째. 더 이상 동굴 안쪽 벽에 무언가를 그어낼 힘조차 없이 엘리나2는 누워있었다. 끔뻑끔뻑 힘없이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 한 여인이 다가왔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로잘리가 마실 물을 널찍한 잎에 담아와 엘리나2의 입술에 조금씩 흘려보냈다. 목을 축인 엘리나2는 흐릿하게 보이는 붉은 머리칼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너… 진짜 이상하다. 악녀가… 무슨 여주 수발을 들어.”
“시끄러! 누군 하고 싶어서 네 수발드는 줄 알아!”
앙칼진 목소리에도 엘리나2는 그저 웃기다는 듯이 킥킥거렸다. 이에 로잘리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한껏 구기고선 뒤를 돌았다.
“어서 기운 차려서 세상이나 바로잡아! 이제 이 세상이 로맨스인지 조난 생존물인지 모르겠으니까!”
“푸흐큭극, 이상하긴 하지… 이 소설. 근데 너 같은 악녀가 나오는 로판도… 나쁘지 않을지도.”
엘리나2는 눈을 감았다. 점점 졸려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입은 더 방정맞아졌다. 몸이 허약해지니 덩달아 마음까지 약해졌나 보다.
“넌…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녀석이야. 나 좀 알 것 같아. 왜… 이 몸의 주인이 악녀인 너와 친하게 지냈는지…….”
“뭐, 뭐라는 거야! 싸대기 날리기 전에 잠이나 자.”
익숙하지 않은 낯간지러운 분위기에 로잘리는 앙칼지게 받아쳤다. 얼마를 그 자리에 고개를 돌린 채 서있었을까, 침묵이 흘러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잠이 든 엘리나2가 보였다. 로잘리는 그 근처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잠이 든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니 동굴 밖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기온이 차가워져서 그런지 온몸이 으슬으슬했다. 로잘리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이상하게 몸이 무거워 자꾸만 옆으로 쓰러졌다.
‘큰일인데……. 감기 걸렸나.’
멍하니 눈을 뜬 채 로잘리는 근처에 누워있는 엘리나2를 응시했다. 이상하게도 얼굴에 생기가 없어 보였다.
“…야, 눈떠 봐. 야.”
로잘리는 덜컥 무서워졌다.
“여주가 이런 데서 뒈지면 안 되지……. 야! 너 여주잖아……! 눈떠, 당장…….”
엘리나2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뻗어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닿을 듯 말 듯 손끝에 위치한 그녀를 애꿎은 시선으로 바라보다 로잘리는 하는 수 없이 천천히 기어갔다. 엘리나2의 옆으로 다가간 로잘리는 모든 힘을 손에 불어넣어 싸대기를 날렸다.
철썩, 하지만 어딘가 둔탁한 소리였다.
“이년아… 눈뜨라고! 또 장난치는 거면 독약 타서 죽일 거야! 그러니까, 눈떠!!”
높은 목소리가 동굴 안에 메아리쳐 울렸다. 로잘리는 계속해서 뺨을 때리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서 손을 내렸다. 뺨이 차가웠다. 도저히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찼다. 로잘리는 동굴 바닥에 얼굴을 묻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터져 나오려는 흐느낌을 참았다.
한참을 눈물만 흘렸을까, 어느새 로잘리의 의식 또한 흐릿해져만 갔다. 제 몸의 열이 펄펄 끓는 건지, 주변이 혹독하게 추워진 건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언니…….”
마지막 힘을 다해 로잘리는 고개를 돌려 흐릿한 시선 속에 있는 엘리나2를 바라보았다.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엘리나2의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정말 잠든 것 같았다.
“나… 이제 한계인 거… 같아.”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잘리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목이 너무 뜨거웠다.
“언니가… 예전에 그랬지? 나도 언젠간… 훌륭한 악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에게도 있었다.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시녀들에게 못되게 굴던 날들이. 완벽한 악녀가 되기 위해 매일같이 싸대기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던 시절이. 어떻게 하면 여주가 죽지 않고 며칠 사경을 헤매는 정도의 독을 탈 수 있는지 연구하던 시절이.
여주에게 부끄럽지 않은 악녀가 되고 싶어 정말 많이 노력했었다.
“근데 나… 이제 악녀… 그만 포기할래…….”
하지만 이제 이것으로 끝이었다. 로잘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인 눈물이 뜨거운 뺨을 적시고 바닥에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정신은 암흑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암흑이 안겨주는 평온함에 완전히 의식의 끈을 놓으려던 찰나였다.
“바보야! 네가 약녀를 하지 않으면 누가 악녀를 할 수 있단 말이야!”
“…언…니?”
까맣던 시야가 점차 하얗게 변해갔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어느새 아침이 된 건지 어두웠던 동굴 안으로 환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에 물든 엘리나2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늦게 돌아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말… 언…니야?”
“응……. 나야.”
엘리나2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고는 곧 단호하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실피드, 내 목소리가 들리면 나와줘.”
엘리나2와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는 로잘리의 주위로 갑자기 온화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오랜만에 부름받아 기쁜 것인지 바람의 정령은 평소보다 힘이 넘쳐있었다.
“로잘리를 말끔히 치료해 줘.”
엘리나2의 부탁에 실피드는 곧바로 로잘리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끓던 열이 내려가고 시원한 치유의 바람이 로잘리의 전신을 부드럽게 뒤덮었다.
로잘리는 가볍게 허공에 연습 삼아 싸대기를 휘둘러 보고선 그대로 와락 엘리나2를 안았다.
“돌아와서 기뻐, 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
악녀와 여주의 감동적인 포옹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로잘리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어느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그 빙의는 나간 거구나.’
엄청 바랐던 일일 텐데,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못했다. 로잘리가 어색하게 엘리나2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내릴 때였다.
“나 사실 엄청 신기한 경험을 했지 뭐야!”
“뭐가……?”
“대한민국이라는 다른 세계에서, 글쎄 완전 검은색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여자 몸속에 들어간 거 있지? 사람들은 나를 김빙의라고 불렀었어. 대학 생활도 했었는데…….”
학식이 맛있었다, 복학생 오빠라는 남자가 자꾸 들러붙어서 짜증 났다, 귀찮아서 그냥 받아줬는데 뭔진 모르겠지만 CC라고 하더라, 등등 얘기는 점점 스펙타클하게 진행되었다.
“결석 좀 했다고 교수라는 인간이 나한테 F를 주더라? 그 뒤로 교수 꼴 보기 싫어서 수업에 안 나갔는데 뭐, 원래 몸 주인이 알아서 하겠지?”
엘리나2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르고 왔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아! 그보다 누가 나를 부른 거 있지? 갑자기 큰 목소리로 제발 돌아와 달라고, 자기가 나갈 테니까 다시 들어오라고 엄청 다급하게 불렀었어. 그 목소리에 번쩍 눈을 뜨니까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와 있었고.”
“…….”
“도와달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정말 다행이지. 누군진 몰라도 하마터면 네가 큰일 날 뻔했…….”
“…그게 사실이야, 언니?”
로잘리는 굳은 얼굴로 엘리나2를 응시했다. 분명 소리를 들었다며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나2를 바라보며 로잘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놔둘 줄 알아?’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는 로잘리를 엘리나2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13장 완결의 정석
「아름다운 공작꽃」
―writer. D체스
[어째서, 엘리나1 그녀가 내 궁 앞에 와있는 것일까. 환영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벼보았으나 그녀는 선명한 그림물감처럼 배경 속에 붙박여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서있었던 건지 그녀의 귓불과 손은 벌게져 있었다.
얼음장 같은 손을 연방 비비며 호호 입김을 불던 그녀는 마침내 멀찍이 떨어져 서있던 나를 발견하고선 모든 행동을 멈췄다.
“하…….”
나도 모르게 숨이 터져 나왔다. 소복이 쌓인 눈밭 위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다가온다. 은빛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빠르게 나부꼈다. 엘리나1은 내 앞으로 다가오기 무섭게 그대로 내 팔을 세게 잡아 끌어안았다. 그녀의 차가운 품에 안기자 아이러니하게도 따스한 향이 맡아졌다.
“미안했어요, 정말.”
“…엘리나1?”
“다시 내게 당신을 사랑할 자격을 주시겠어요……?”
이것은 꿈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 일어났다. 기적처럼 그녀가 내게 돌아왔다. 눈물이 솟구쳐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나의 몸은 이미 결정된 일을 마주한 것처럼 차분하게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안 됩니다. 나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감겼다 떠졌다. 아연해하는 그녀를 눈앞에 두고 나는 미적지근한 미소를 보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네가 나를 붙잡고 지난날을 후회해도,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네가 아닌…, 네가 남기고 간 상처를 보듬어 주고 지탱해 준 사람이…….”
그때였다. 뒤에서 뻗어져 온 든든한 온기에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호화로운 보석으로 치장한 곱슬머리의 중년 여인이 입을 벌려 환하게 웃었다. 가지런한 황금색 이가 노란빛을 토해내며 반짝거렸다.
“오― 나의 젊은 연인 디체스, 보이지 않아서 걱정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