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거리에 휘날리던 종이봉투가 카를라히의 머리에 씌워졌지만 오히려 두 남녀는 수줍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전혀 주변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풋내기 커플과 같은 증세를 보였다.
<담당자님한테 시놉시스 바뀌었다고 말해야 되나. 워, 원고를 뒤엎어야 하나…….>
세상이 뒤엎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나 남주 카를라히는 종이봉투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랴, 수줍은 시선을 수습하랴 바쁘기만 했다.
“물론 정식으로 또 한 번 하겠지만, …미안, 이렇게 갑작스럽게 말해버려서. 비밀도 그렇고, 그 고백도.”
“아뇨, 정식 고백 같은 건 부담스러워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거창하게 고백하는 거 진짜 싫어하거든요.”
공공장소에서 화려한 마법쇼 고백을 준비할까 생각하고 있던 카를라히는 흠, 하고 얼쯤하게 시선을 내렸다. 확실히 주목받는 걸 안 좋아하는 성격도 있을 테니까,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
그때 라라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저, 근데 아직 마음 받아준다는 건 아니에요.”
“…라라?”
“아무래도 제 목숨이 달린 일이다 보니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요. 약혼녀인 엘리나1과 악녀 로잘리, 라이벌녀 오크 영애, 그 외 반대 세력들부터 먼저 정리하고 오실래요? 황궁 암투물 진짜 싫어해서요.”
신분 낮은 여주도 황제와 이어지기 순탄하지 않는데 힘없는 엑스트라는 오죽할까. 알콩달콩 만나려고 연애하는 거지 가시밭길 걸으면서까지 연애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확고한 라라의 뜻을 카를라히도 존중하겠다는 듯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신과 전 재산과 최애를 걸고 맹세하지. 다 정리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네, 괜찮아요.”
살포시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를 카를라히는 천천히 일어서며 바라보았다. 역시 지인님은 천사였다. 나에게 3D 여친이 생기다니……. 꿈이 깨지 않은 몽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뜻밖의 고난이 그에게 찾아들었다.
“그리고 릴리카 짱도 정리하세요.”
* * *
어둠이 내린 산은 무서우리만치 삭막했다. 가끔 침묵을 깨는 부엉이 우는 소리는 기묘함을 더했다.
인적 드문 깊은 산속, 숨겨져 있다시피 한 작은 동굴 안에 두 사람이 웅크린 채 앉아있었다. 한 사람은 헝클어진 산발 머리를 한 엘리나2였고, 그 옆에 있는 또 한 사람은 로잘리였다.
“사냥 대회 끝나고 다들 철수한 거 아니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우릴 버리고 갔을 리 없잖아!”
“하지만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고. 우릴 찾았으면 진작 찾았을걸. 하…하…….”
엘리나2는 흙 묻은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러려고 빙의했나 자괴감이 들 뿐이었다. 산에서 조난을 당한 지 벌써 이틀이 지났으나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동안 체력을 비축해 두기 위해 최소한으로 움직임을 줄였지만 가녀린 여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근처 바위틈에 흐르는 샘물로 목을 축이고, 과일을 따 먹은 게 다였다. 엘리나2는 돌을 집어 들고 동굴 안쪽 벽에 빗금을 하나 더 그렸다.
“내일은 꼭 찾으러 올 거야. 하하, 왜냐면 난 여주인걸! 하하하… 분명 반드시 찾으러 올 거야.”
“하, 실성했니? 여주는 참 천하 태평해서 좋겠네! 여기서 굶어 뒈질 때까지 남주만 목 빠지게 기다리면 되니까!”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로잘리는 앙칼지게 쏘아보며 말했다. 싸대기를 휘두를 힘조차 없어 노려보는 로잘리를 향해 김빙의도 그동안 참아두었던 설움을 폭발시켰다.
“그럼 남주 말고 누가 우릴 구하러 와주는데……!! 이 후진 세계에 산악 구조대가 있어, 헬기가 있어, 뭐가 있어! 거지 같은 세계!!”
“이세계인 주제에 감히 우리 세계를 욕해? 헬기가 뭔 진 모르겠지만 우리 세계를 욕하는 건 못 참아!”
“하도 답답해서 그런다! 왜!! 이렇게 오래 조난될 줄 알았으면 내가 여주 몸에 들어왔겠냐고! 베어 그릴스 몸에 들어갔겠지!!”
“뭐야, 베어 그릴스는?”
“…있어, 그런 사람.”
악녀 로잘리의 눈을 피하며 엘리나2는 낮게 중얼거렸다.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 게 뻔한 것이다. 한번 폭발시키고 나니 조금은 전보다 마음이 차분해진 것 같았다. 기력이 빠졌다는 게 옳겠지만.
“넌 그래도 돌아갈 장소가 있잖아. 여기서 굶어 죽어도 다시 네 몸으로 돌아가면 끝이잖아.”
그때 로잘리가 조용히 말했다. 평소의 앙칼진 기운이 많이 누그러진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나와 언니는 아니야.”
“언니?”
“네가 들어간 몸의 주인. 엘리나2 언닌,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너 악녀잖아.”
“악녀나 여주 같은 건 상관없어. 애초에 널 방해한 것도 다 언니를 위한 거였고. 언니는 처음으로 내게 다가와 준 사람이었거든.”
로잘리는 허기와 졸림을 이기지 못하고 살며시 동굴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첫 만남은… 그래, 오해로부터 시작되었다. 로잘리는 무작정 의심부터 하고 뺨을 갈기려 드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던 엘리나2의 그 당찬 모습을 떠올렸다.
결국 교황 남주와 아무 사이도 아니란 판결을 받고 단둘이서 뒤풀이를 갔었을 때였다. 취한 엘리나2는 자신을 보며 대뜸 이렇게 말했었다.
‘근데 너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찰진 소리를 낼 수 있는 거야?’
‘하, 뭐라는 거야! 이, 이거 놓지 못해?!’
‘손 좀 봐봐. 와! 나보다 손이 더 작은데도 그런 굉장한 소리를 냈던 거야?’
제 손이 신기하다는 양 붙잡고 조물조물거리던 따스한 손길. 그리고 그 손길이 낯설어 앙칼지게 손을 뺀 자신에게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었다.
한 점의 가식조차 담기지 않은 미소와 칭찬, 그건 악녀인 자신에게는 독과 같았다. 너무 치명적이라 차마 밀어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샌가 그녀는 자신의 일부분처럼 천천히 스며들어 있었다. 희석조차 될 수 없게, 짙게, 짙게.
‘난 네가 부러워. 어디서나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싸다구를 날릴 수 있는 네가. 나는 여주니까… 늘 밝은 모습으로 민폐 끼치는 게 다거든. 너처럼 대놓고 악다구니를 부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오히려 언니가 부러운데. 못되고 성깔 있고, 그런 게 나잖아? 차라리 순진하고 밝은 언니가 더…….’
‘글쎄― 난 다른걸? 그리고 성깔 있는 게 얼마나 매력 있는데! 처음 널 봤을 때, 아무에게나 열정적으로 싸다구를 날리는 네 모습이 너무 눈부셔 보였어.’
그 말이 뭐라고 자신은 그녀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버린 것이다. 그날 제게 웃어 보이던 엘리나2를 잊지 못한다. 로잘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해준 사람은 엘리나2 언니가 처음이었어.”
“지금 감동할 부분임……?”
“언니의 얼굴을 하고서 분위기 깨지 마!”
언제 포근한 얼굴을 했냐는 듯이 로잘리는 사납게 쏘아붙였다. 어이쿠 하고 엘리나2는 뒤로 물러서다가 뺨을 긁적였다.
“야… 암튼 미안. 근데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나도 들어오고 싶어서 이 몸에 들어온 게 아니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구.”
최악의 경우, 어쩌면 이대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대부분 차원 이동 여주들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세계에서 만난 남주와 꽁냥거리다가 뼈를 묻으니 말이다.
“차라리 나도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가족도, 친구들도, 레알 보고 싶다고……. 다시 눈을 뜨면 대한민국이고, 이 모든 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아.”
“누구 마음대로 꿈이야! 꿈 깨셔, 여긴 현실이니까.”
“알려줘서 고맙네, 킥킥.”
엘리나2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졸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인지 불편하게 쭈그린 채 잠이 들었다. 그런 엘리나2를 맞은편에서 조용히 바라보던 로잘리는 몸을 일으켰다.
“여주가 어디 아프면 악녀인 나만 곤란해지니까…….”
그렇게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면서 로잘리는 엘리나2의 몸 위에 자신의 망토를 덮어주었다.
카를라히는 리니엇 공작 가문의 응접실에 도착해 있었다. 마계에 있는 엘리나5와 엘리나4, 그리고 제국을 나간 엘리나3을 제외하면 현재 공작 가문에 있는 자는 엘리나1뿐이었다.
“황성에 없어서 찾았는데 공작 가문에 있었나 보군.”
그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엘리나1은 순간 엘리나2인 척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 보여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사냥 대회 때 본 뒤로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졌군. 내가 여길 찾아온 이유는, 그대에게 사죄하기 위함이다. …이 영상을 봐주겠나.”
분위기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카를라히는 용건부터 말했다. 상자 속에 담긴 마법구를 꺼내 엘리나1의 앞에 내밀었다. 엘리나1은 투명한 마법구 속에서 재생되는 영상에 “이건…….” 하고 중얼거리며 입을 막았다.
자신을 포함한 엘리나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어디 거리를 지나는 모습, 마차에 오르는 모습, 누구를 만나는 모습까지 전부 생생히 담겨있었다.
“기관을 시켜 바깥에 있는 그대를 관찰하게 했다. 다 똑같이 생겨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 영상들 중엔 그대의 모습도 상당수 찍혀있을 것이다.”
“…아.”
“미안하군. 남주로서 여주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사실 다 변명일 뿐이지. 보다시피 난 남주 실격인 사람이다.”
카를라히는 솔직하게 말하며 품 안에 넣어둔 문서를 꺼내 보였다. 공식 파혼서였다.
“더 이상 약혼을 유지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군, 서로를 위해서라도.”
“파혼…을 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이상하게 오늘따라 눈치가 빠르군. 아무튼 이 마법구 영상들은 엘리나 당사자들에게 모두 공개한 후 사죄와 함께 즉시 폐기 처분할 예정이다.”
그렇게 말한 그가 마법구를 다시 상자에 넣으려 할 때, 엘리나1이 손을 뻗어 그것을 막았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폐하, 이 영상들을 전부 제게 주실 수 있을까요?”
“본인이 원한다면 당연히 그러지. 한데 이걸로 무얼 하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