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난생처음 보았다. 소년은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한참을 컬러 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소년은 천천히 뒷장을 넘겼다. 부러지지 않는 대신 찢어지는 종이 여친의 등장이었다.
“…그것이 릴리카 짱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능.”
“못 들은 걸로 하고 싶네요.”
라라는 솔직하게 평했다.
카를라히는 눈을 감았다 떴다. 꿈처럼 몽환적이고 운명적인 첫 만남의 회상을 뒤로하고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 뒤로 나는 어떻게든 릴리카 짱을 또 한 번 만나고 싶어서(의역: 다음 권이 보고 싶어서) 릴리카 짱을 만났던 날의 모든 패턴을 분석하게 되었어. 그리고 어떠한 규칙성을 알아내게 되었지.”
“…계속하는 거예요?”
“그건 바로, 내가 남주다운 행동을 할 때 릴리카라는 달콤한 보상이 내려진다는 거였어. 행동을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면 그것이 내 주위로 뚝 하고 떨어지는 거야.”
‘마치 개 배변 훈련 같은……. 맞아. 그런 거지 같은 게 있었어.’
<거지 같은 거라니, 클리셰 보상 제도니라. 클.리.셰. 보.상.제.도! 이참에 정주행하고 오거라.>
‘그렇게까지 해서 알고 싶진 않아요.’
하나같이 여주답지 않고 남주답지 않다 보니 거의 잊혀있던 제도였다. 보상이 내려진다는 걸 영리하게 캐치하고 역으로 이용하고 있을 줄이야. 가면 갈수록 개판이었다.
“난 어떻게든 릴리카 짱을 더 보기 위해, 일부러 여주가 곤란해 있을 때마다 나타났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여주가 언제 어디서 무얼 하는지 감시할 전문 인력과 이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했지.”
‘응?’
뭔가 엄청난 얘기를 들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라라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24시 여주 관찰 기관’을 설치했어. 수도 전체에 분포해 있는 수십만 대의 마법 카메라로 여주를 관찰해서 여주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내게 여주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기관이야.”
“…….”
“난 머릿속에 내장된 안테나로 그 신호를 받았고, 남주로서 언제든 타이밍 좋게 여주의 앞에 나타날 수 있던 거지.”
“…그 정도면 그냥 불법 카메라 아니에요? 와……. 정말 소름 끼친다……. 와……. 내 주위에도 있었다니.”
“아니다! 거리에 있는 방범용 마법 카메라로만 감시했어! 정말이야……. 믿어줘.”
하지만 라라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제라는 작자부터가 이러니 머지않아 페르잔제국은 범죄 강대국이 될 것이다. 라라가 속으로 조용히 이민을 결심할 때였다.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려 옆을 돌아보니 카를라히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애초에 이런 일도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이니까…….”
구질구질함의 정점을 찍는 자세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어깨를 달달 떨면서 말을 이어갔다. 흐느끼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더 이상 너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날 결심한 거야. 이 안테나를 제거하자고. 이제부터는 너 하나만 보겠다고.”
“이 소름 돋는 분위기에 그런 말 해봤자 하나도 안 로맨틱하다구요! 나도 감시하는 거 아냐?!”
마치 프러포즈라도 하듯 카를라히는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지만 라라의 눈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차디차게 변해있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그는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라라의 앞에 주저앉아 훌쩍거렸다.
“흡, 감시는 기관에서 했고 난 그저 신호만 받았을 뿐이야. 맹세코… 내가 직접 엘리나들을 감시한 적은 없어. 물론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아, 네.”
“제발… 나를 믿어줘. 널 만나기 전까진 현실 여자들에겐 단 한 번도 관심을 준 적 없으니까…….”
“그렇게 된 거였군요.”
라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황실 기사단 건물 정문으로 어느 인영이 걸어 나왔다. 짧은 은발 머리 가발을 쓴 그는 다름 아닌 남장 기사 에드가3이었다.
“어쩐지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난다고 했더니. 남주가 무당도 아닌데 어째서 의심조차 못 했을까요.”
에드가3은 은빛 눈을 차분하게 내리깔았지만 눈동자엔 검날처럼 날카로운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사생활 침해 범죄를 일삼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범죄자를 잡아야 하는 기사가 어떻게 범죄자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러니까 나는……!!”
“당신은 남주 실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몰래 감시하는 것도 로맨스라 할 수 있습니까?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손을 들어 올린 에드가3은 자신의 가발을 붙잡았다. 끌어 내린 가발 아래로 말려있던 은발 머리가 길게 출렁이며 쏟아져 내렸다.
탈모 상사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숱이 적은 가발을 쓰고 있다고 알고 있는 카를라히는 그다지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직도 여자라는 것을 눈치 못 챈 그를 위해 엘리나3은 과감하게 제복 상의를 벗어 던졌다.
가슴을 붕대로 감고 있는 엘리나3의 상체에 그제야 카를라히는 까무러칠 듯 놀라며 “여, 여자……?”라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런 그를 라라는 이제 알았냐는 한심한 눈빛으로 힐끗 봐주었다.
“저를 추방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기사 작위를 포기하고 이틀 내로 이 제국을 떠나겠습니다.”
엘리나3은 카를라히를 똑바로 응시한 채 입술을 느릿하게 뗐다.
“그리고 이런 남장을 하지 않아도 기사가 될 수 있는 나라를 세울 겁니다. 당신이 해내 보이지 못한 일을 내가 해내 보이겠어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녀의 선포가 끝나기 무섭게 먼 뒤에서 어느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건지 남장 여자 기사 중 한 명인 율비타 영애가 정문 뒤편에 서있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율비타 영애의 곁에는 와론 부인과 슈린 영애, 그리고 그녀들이 과거에 이끌었던 영애들도 함께였다.
“기사단 생활을 하면서 깨달았어요. 과거 시절을 그리워하는 저 자신을요.”
“저도 함께 가겠어요. 비록 큰 도움은 되지 못하겠지만 도적단 대장의 경력을 살려 다시 한번 제 힘으로 무언가를 일으켜 보고 싶어요.”
“한때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던 저 역시 결혼을 하면서 많은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슈모르드 영애, 당신이 이곳에 저희를 이끌어 준 덕분이죠.”
뜬금없는 호명에 라라는 깜짝 놀라 정면을 응시했다. 수십 명의 눈길들이 한 번에 제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성지 순례 글이 된 기분이었다.
“어… 그게… 저는…, 그냥 우연히 입단 후보생들이 필요했을 뿐이라…….”
“아뇨, 저희에게 기사단 권유를 해준 건 슈모르드 영애, 바로 당신이었어요. 저희 모두 당신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어우… 그러지 마세요.”
손을 내젓는 라라의 앞으로 엘리나3이 천천히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평소의 무뚝뚝한 태도로 엘리나3은 손을 뻗었다.
“라라,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라라가 마주 손을 잡자 엘리나3은 처음으로 미소 지어 보였다. 시원하게 입술을 끌어 올린 미소였다.
“넌 이곳에 남을 거지?”
“…응, 그렇지 뭐.”
“잘 지내기를 바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리나3은 수십 명의 남장 여자 기사들을 이끌고 걸어갔다. 여주가 향하는 길에는 붉은 석양이 이글거렸고, 그 뒤로 수십 개의 긴 그림자가 이어졌다. 한 편의 영화 포스터 같았다.
‘정말 나라 세워……?’
라라는 멍하니 서있는 채로 생각했다. 아무리 여주가 노는 스케일이 크다곤 하지만 설마 건국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 루트로 가는 거라면 건국은 어느 세월에 하고 로맨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라라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신의 자비로운 음성이 내려졌다.
<역시 트랜드를 아는 여주니라. 요즘 세상이 어떤데, 결혼이 필수는 아니지.>
‘이제 이 소설, 로판 포기한 거죠……?’
이 소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았다. 굳이 로판을 고집한다 해도 키워드란에는 #비혼여주 #사생활 침해 남주 따위가 들어가겠지.
‘망했어.’
짜게 식은 라라의 눈을 달리 오해한 카를라히는 그 눈길에 상처받았다는 양 눈물을 글썽였다.
“라라… 안테나 끄흡, 제거했다. 머리 뚜껑 열어서 확인해 봐도 된다……. 그러니 부디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줘. 다키마쿠라를 안고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혐오스러운 시선을 받는 씹덕후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괴롭군.”
“실제로 씹덕 맞잖아요. 어디서 아닌 척해요.”
라라의 묵직한 팩폭에 카를라히는 시무룩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살며시 베어 물었다. 다물린 입술 새로 기어드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넌 나와 함께 있어줄 거잖아……. 이 내가 씹덕이라 해도.”
“뭐, 그렇긴 하지만요.”
“난 솔직히 말하자면 질투했었다……. 네가 다른 남자와 수코를 돌고, 온리전을 가고, 부코를 갔을 때 질투심에 잡아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땐 단순하게 내 친한 지인을 뺏겨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카를라히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어 붉게 물든 눈가가 그다지 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라라, 난 너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 단순히 지인으로서가 아니라, 나, 나, 남자로서.”
<뭣이라……!!>
“풋.”
약간 실례인 듯해 라라는 살짝 고개를 돌려 웃음소리를 냈다. 집착남 아니라더니 뒤에선 질투 때문에 안절부절못했을 그의 모습이 상상되니 조금은 귀여운 것이다.
“지금 그 말, 고백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예요?”
조금 누그러진 듯한 라라의 태도에 그는 크게 눈을 떴다. 곧이어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털어내고 수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이게 지금 어떻게 흘러가는 것이냐! 누가 너희 둘보고 썸 타랬느냐!>
달달한 기류가 흐르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