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103)화 (103/115)

103화

그때, 모든 상황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던 오크 영애가 크게 울부짖으며 카를라히를 향해 달려들었다. 보정 때문에 잠깐 못 알아보다가 뒤늦게 초상화에 그려진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순식간에 오크 영애의 거대한 몸에 깔린 카를라히는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쳤다.

“검을 써요!”

라라의 외침에 카를라히는 허리춤에 걸린 검을 꺼내려다 멈칫하고 손을 거뒀다. 만일 이 검을 휘둘렀다가 오크 영애가 다치게 된다면 되레 자신이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거지 같은 판결 사례를 미루어 봤을 때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것 같군…….’

성인 하나는 족히 죽음에 이르게 하고도 남을 역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생화학 무기나 다름없는 입 동굴이 점점 그의 얼굴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카를라히는 살기 위해 기지를 발휘해 오크의 목울대를 손날로 쳤다. 오크 영애가 꾸에엑! 소리를 내며 위로 고개를 젖힌 순간 빠르게 태풍돌려차기를 시전했다.

“끼에에엑!”

거친 태풍돌려차기를 정통으로 맞은 오크 영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바닥에 떨어졌다. 카를라히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선 순간이었다. 그의 반항이 자극이 된 건지 오크 영애가 폭력적으로 돌변해 공격해 왔다.

오크 영애의 마구 휘둘러지는 주먹을 물 흐르듯이 피하며 카를라히는 상대와 거리를 두었다. 쉭쉭, 하고 오가는 위협적인 주먹은 한 방만 맞아도 골로 갈 것 같았다.

“여보세요. 거기 황실 기사단이죠? 지금 여기가…, 백작 가문 후원인데요. 큰일 날 것 같아요! 빨리 좀 와주세요!!”

상황을 지켜보던 영애 하나가 서둘러 황실 기사단에 신고를 하는 사이, 카를라히가 오크 영애의 인중을 쳐 제압에 성공했다.

소림정당방위권법疏林正當防衞拳法. 괴한이 위협하는 상황에서 쓰는 호신술로,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최소한의 공격만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권법이었다. 물론 20년의 탄탄한 내공을 가진 무술 고단자들만이 익힐 수 있는 고도의 권법이었다.

카를라히가 이 권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아마 끔찍한 일이 벌어졌으리라. 그리고 약 20분 뒤, 신고를 받고 온 황실 기사단이 오크 영애를 체포함으로써 상황은 정리되었다.

라라는 카를라히와 함께 황실 기사단에서 모든 정황 설명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고생했어요.”

카를라히의 옆으로 다가서며 라라는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조금 힘이 난다는 듯 그는 해쓱해진 낯으로 살며시 미소 지었다.

“아까 돈 얘기는 나를 도망치게 하려 했던 거고, 나를 험담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군. 물론 그 정도의 일로 널 오해하진 않았겠지만.”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오해하고서 저를 피할 거라 생각했어요.”

“이런 오해로 멀어질 사이라면 애초에 가까워지지도 않았겠지.”

카를라히가 걸음을 멈추고 라라를 돌아보았다. 따라서 걸음을 멈춘 라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눈길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 부근이 간지러웠다.

“라라, 나는 줄곧 너에게 말하기를 망설였던 걸지도 몰라.”

“…라히?”

그는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그윽한 눈을 한 채 입을 열었다.

“내 머릿속에는 안테나가 있어.”

“네?”

‘…뭔 개소리지.’

라라는 표정이 일그러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농담이라 하기엔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코스프레에 관련해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을 거라 생각해. 특히 처음 만났던 그날 밤, 어째서 내가 로브신사로 변장하고서 엘리나3을 레칼 영감님의 침대에 묶었던 것인지도 말이야. 그때 넌… 내게 꿋꿋하게도 로브신사 로브가 맞냐고 물었었지.”

“그런 애절한 표정으로 말해도 하나도 안 애절하니까 그냥 평소대로 말하세요.”

라라의 말에 그제야 카를라히는 분위기 잡는 것을 관두고 본론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 머릿속엔 안테나가 있어. 긴급한 상황에 여주의 위치와 상황을 보고받을 수 있는 안테나가.”

“…아니, 이건 또 너무 급작스럽다구요. 왜 남주라는 분이 대사 완급 조절을 못 해요. 그보다 정말 들어있는 거예요? 그 안테나가……?”

“아니, 일주일 전에 완전히 제거했다. 네가 미하일에게 감금됐던 그다음 날, 바로 수술을 받고 누워있어서 너를 찾아갈 수 없었어. 지금 와서 모든 진실을 얘기하는 날 용서해 주겠어?”

“죄송한데, 얘기를 못 따라가서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 얘기는 계속하세요.”

라라가 안테나 얘기를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카를라히가 잠잠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엘리나3이 노예 시장에서 팔려나갔을 때 엘리나3을 사 간 자는 레칼이라는 이름의 배불뚝이 영감이었지. 하지만 그자는 변태가 아니었어. 그래, 그게 문제였던 거야. 그자가 변태가 아니라면, 내가 남주로서 나설 기회가 사라져 버리니까.”

“…그래서 누명을 씌우려 했단 거예요? 일부러 변태로 만들기 위해서? 어째서 그런…….”

“다 릴리카 짱을 위해서였어.”

“아.”

한 점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당연하게 여친이라고 말하는 그를 보고 라라는 짧게 탄식했다. 대단한 덕후였다.

“릴리카 짱을 처음 만난 건 약 10년 전이었지.”

“그러니까 전혀 안 애절하다니까요…….”

라라의 말에도 굴하지 않고 카를라히는 꿋꿋하게 회상에 들어갔다. 아득할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었다.

귀족들의 가식적인 웃음소리로 가득한 황실 무도회의 상석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자신. 어린 시절 그 풍경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애답지 않게 과묵하던 소년은 불금 파뤼투나잇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다. 환한 빛으로 둘러싸인 그곳을 벗어나 항상 어두운 밤에 산책을 나갔었다.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소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황실 정원을 거닐던 어린 황태자 카를라히의 귀에 어느 날 밤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귀신? 혹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일까? 귀신이면 어떻고, 고양이면 어떠한가. 이런 고민도 광활한 인생이란 바다 안에선 작디작은 한 조각에 불과할 터.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아니, 열 몇 살짜리가 저런 생각을 했다고요?”

불쑥 끼어든 라라의 목소리에 카를라히는 못 들은 체하며 다시 회상을 이어갔다.

“흑 흐윽.”

어두운 정원 한가운데에는 어린 소녀가 주저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은빛 실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너울거렸다. 황태자 카를라히는 잠시 크게 눈을 떴다가 곧 모든 감정을 지운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너는 누구지?”

“……?”

생소한 목소리에 이번엔 소녀가 놀란 듯 눈을 키웠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꼬리가 곧 차분한 선을 그렸다.

“에, 엘리나. 흐윽.”

“엘리나라……. 분명 공작 가문의 딸이었던가?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신발을 잃어버려서… 신발을 찾다가 길도 잃어버렸어.”

소녀의 말대로 드레스 아래 드러난 발은 맨발이었다. 황태자 카를라히는 가만히 소녀를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소녀의 앞으로 가 등을 보이며 앉았다. 업히라는 무심하고도 작은 목소리에 어린 엘리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소년의 등에 업혔다.

“오빠는 이름이 뭐야?”

“나 말인가? 글쎄…, 여기서 일하는 시종이랄까.”

“거짓말.”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소녀의 수줍은 웃음소리에 소년 카를라히는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그치만 잘생겼는걸? 마치 왕자님 같아.”

“훗.”

해맑은 소녀의 말에 처음으로 소년은 감정을 내비쳤다. 짧은 웃음소리는 곧 어른스러운 말투로 변모했다.

“지금 그 발언은 신분 차별 발언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시종은 못생겼고, 왕자는 잘생겼다라……? 그 말이 틀렸다는 걸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지. 오랜 왕실 역사를 보면 왕족들이 권력에 집착한 나머지 왕실 대대로 근친상간이 이루어졌지. 그로 인해 기형아가 태어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왕자들 중에도 신체적 결함이 있는 자들이 많았지. 네가 생각하는 화려한 외모의 왕자는 동화 속의 상상 인물이고 현실은…….”

“그만!! 듣기 싫어!!”

새된 비명을 내지르던 엘리나는 그만 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지금의 엘리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렇게 강렬하고도 허무하게 끝이 났다.

황태자는 조용히 소녀를 황실 무도회장 입구에 내려놓고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심하군. 이런 얘기로 부러질 수 있다니. 연약한 생명체 그 자체야.’

소녀와는 어떠한 필연적인 운명을 느꼈지만 그것뿐이었다. 카를라히는 그렇게 냉정히 생각했다.

‘내게 맞는 여인이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 하……. 쉽게 부러지지 않는 여인은 없겠지.’

어떤 풍파 속에서도 제 곁을 떠나지 않을 여인, 자신의 곁에 늘 숨 쉬고 있으면서도 마치 다른 차원에 있는 듯 초월적인 존재를 원했다. 일회성이 아닌 오래도록 안심하며 마음을 쌓을 수 있는 진정한 관계가 필요했다.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고독한 권력자의 자리에 앉을 내게 인생의 동반자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하나뿐인 연인이…….’

그때였다. 수풀 뒤에서 툭 하고 무언가가 둔탁하게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거기 누구냐!”

귀족파 놈들이 자신을 제거하라고 보낸 암살자인가. 카를라히는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고 천천히 수풀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거두어 수풀 뒤에 숨은 자의 정체를 확인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닌, 책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마법소녀☆릴리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적힌 그 아래에는 ‘1권 국내 정발본’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카를라히는 처음 보는 서적에 흥미를 가지고 그 자리에 앉아 책을 훑어 내렸다. 동시에 만화책 위로 새하얀 달빛이 내렸다. 신세계였다. 얼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큼직한 눈과 완벽한 브이 라인 턱, 그리고 한 줌에 잡힐 듯한 허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