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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02)화 (102/115)

102화

‘…얘들 왜 산에 안 있고 도심 속 다과회장에 있는 거예요!’

<이런, 논클리셰니라. 한때 선택받았던 너라면 이 정도 위기쯤이야 신의 힘 없이도 넘길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도와준 적도 없잖아욧!’

XX 같은 신, C발. 라라는 질끈 눈을 감으며 신을 욕했다. 마지막일지 모를 절체절명의 순간, 가까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슈모르드 영애 아닌가요?”

우아한 푸른빛 드레스를 입은 다홍색 머리의 여인은 다름 아닌 티파티 주최자인 백작 영애였다. 설마 구해주려는 건가, 라라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으며 백작 영애를 돌아보자 그녀는 온화하게 웃으며 오크의 옆에 섰다.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인가 보군요. 이 영애분이 목감기에 심하게 걸린 건지 왔을 때부터 계속 쉭쉭거리기만 하셔서 조금 난감했거든요.”

“쒸이익 쒸이히힉 쒸익.”

“자, 함께 앉아요. 오늘 제가 특별히 준비한 홍차랍니다.”

오크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지 백작 영애는 오크의 한 팔을 부드럽게 붙잡고 이끌기 시작했다. 라라는 그 둘을 뒤에서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차마 티 테이블에 둘러앉아 방긋방긋 웃고 있는 영애들을 보니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수 없었다.

일단 주최자에게 어떻게든 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라라는 백작 영애를 향해 달려가 “잠시만 저기서 따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은 후 근처 나무 뒤로 자리를 옮겼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라라는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 뗐다. 할 말이 많았지만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간단히 말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저기 영애… 실례지만 아무리 봐도 오크잖아요. 참석자가 아니라 그냥 인간 파티에 나타난 오크라고요……. 어서 황실 기사단에 연락을…….”

“슈모르드 영애.”

백작 영애가 부드럽게 어르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오크인 건 저도 눈이 있으니 안답니다.”

“그럼… 도망치시라구요!”

“이 티파티의 주된 목적을 잊으신 건가요? 세상의 모든 인종 차별을 없애기 위한 모임이라 알고 있는데요.”

‘…아니, 종 자체가 인간이 아니잖아.’

라라는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괜히 더 따지고 들어 백작 영애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용무가 이것뿐이라면 전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죠.”

주최자인 백작 영애가 먼저 자리로 돌아가고, 홀로 남은 라라는 하는 수 없이 티 테이블 구석 자리에 조심히 걸터앉았다.

“다들 기다리셨죠? 호호, 그럼 주최자인 제가 나서서 이쪽 영애부터 소개해 드리도록 하죠. 오크 영애와 고블린 영애, 트롤 영애랍니다. 초대 없이 갑작스럽게 오셔서 성함을 알지 못해 생김새대로 불러보았어요. 괜찮으신가요?”

“쒸익…….”

“어머나, 반가워요. 저는 벨리온 가문의 둘째 여식 로베카라고 해요.”

“쉬익쉭쉭… 쉭쉬쉭.”

“호호호, 전 아리오르 후작 가문의 영애예요. 목감기가 심하게 들리셨나 봐요. 요즘 환절기라 목감기 조심하셔야 돼요. 이 특제 유자꿀차를 마시면 낫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취이익, 쒸익쒸익.”

‘알아듣는 거냐고…….’

라라는 구석 자리에 앉은 채 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무래도 이 엄청난 상황을 목도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순 없었다. 금방이라도 오크나 고블린이나 트롤 중 하나가 돌변해 인간을 해칠까 두려웠다.

역시나 라라의 불길한 예상대로 그들의 폭력성은 여전하였다. 한 영애가 초록색 피부가 매끄러워 보인다며 오크의 팔등을 쓸어 만진 것이 화근이었다.

“쒸익… 쉭 쉬익 쉬익!!”

“꺅!”

흥분했는지 오크 영애는 곧바로 자신을 만진 영애를 밀쳐내고 티 테이블 위에 올라갔다. 펄쩍펄쩍 사납게 뛰어대는 오크의 발에 찻잔과 접시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그것도 모자라 접시 몇 장은 테이블 밖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고 연달아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백작 영애가 대표하여 나섰다.

“숙녀가 조신하지 못하게, 영애는 좀 더 기품이 몸에 배도록 예법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사회성을 먼저 길러야 하지 않을까……?’

라라는 속으로 생각할 뿐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그녀의 말이 통했는지 흥분해 있던 오크 영애가 눈에 띄게 진정하기 시작했단 것이다. 이쯤 되면 다과회가 아니라 오크 조련쇼가 아닐까 싶지만, 라라는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

예상보다 오크 조련쇼, 아니 다과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어져 갔다.

“이것 보세요, 여러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가져왔답니다.”

“어머나, 이건……!”

어느 영애가 하얀 비단 천에 싸인 네모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미술 작품인가 싶어 슬쩍 쳐다본 라라는 놀란 듯 눈을 키웠다. 황제 카를라히의 초상화였다. 이목구비가 더 짙어 보이는 게 약간 보정이 된 것 같았다.

“사실 제가 초상화 그리는 취미가 있어서요.”

“그림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어머! 너무 잘생기셨어요.”

“쒸이이익…….”

칭찬이 오가는 가운데, 유독 어느 눈길이 뚫어져라 초상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긴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고블린 영애였다.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초상화를 가져온 영애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저 사실 폐하를 오랫동안 사모하고 있었어요. 폐하께서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희대의 폭군이라지만 사실은 한없이 상냥한 분이 아니실까…, 초상화만 오랫동안 그려와서 그런지 사람 얼굴을 보면 관상이 좀 보이거든요.”

“어머나, 정말요?”

“네, 아무튼 제가 봐온 폐하는 그러하세요. 후훗. 약혼녀이신 엘리나1 공녀님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고블린 영애가 흥분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목표물은 하나인지 영애에게 달려들어 초상화만 냅다 뺏어 자신의 품에 새끼 끌어안듯이 꼭 끌어안았다.

“그르르르 키에엑! …키엑!!”

“고블린 영애! 이게 무슨…….”

고블린은 절대 초상화를 뺏기지 않겠다는 양 주위를 경계하며 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연모해 온 수컷을 뺏기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암컷과 같은 반응이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져서 암살자를 보내고, 차에 독을 타 넣는 등의 행동과 비슷한 것이다.

영애들이 선뜻 접근하지 못한 채 눈치를 살필 때였다.

“으우어어어!! 쒸이익… 쒸익!!”

갑자기 흥분해 일어선 오크가 그대로 고블린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차마 눈에 담지 못할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키에에엑!!”

“꺄아악! 오크 영애가 고블린 영애를 잡아먹었어……!!”

뜯긴 초록색 살점이 한 영애의 무릎 위에 철썩 떨어졌다. 동시에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노란 피가 흥건히 테이블보와 그 주위를 적셨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가 경악해 있을 때 오크 영애가 물고 있던 고블린 영애의 목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고블린 영애의 손에 쥐어진 초상화를 소중한 듯이 품에 안고 고개를 들었다.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쒸익… 쒸익!!”

‘너도 사모하고 있었냐!’

라라는 이 끔찍한 개판이 다름 아닌 사랑싸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초상화의 주인이자 자칭 ‘황제 짝사랑녀’인 영애는 생각지도 못한 연적의 등장에 꽤나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이대로 오크 영애에게 물러설 생각은 없는지 조심스럽지만 소신껏 목소리를 냈다.

“…설마 그쪽 오크 영애분도 폐하를 마음에 두신 건…….”

“쒸익!! 쒹쒹!!”

“아, 알겠어요. 포기할 테니까 제발 진정하세요…….”

은근한 기 싸움도 필요 없었다. 연적을 단 2초 만에 정리해 버리는 오크 영애의 포스에 지켜보는 라라도 솔직히 지릴 것만 같았다.

오크 영애는 다른 연적이 또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는 듯 경계하는 눈으로 영애들을 슥 훑었다. 영애들은 하나같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느라 바빴다. 한 명 한 명 지나치며 마침내 맨 끝에 서있는 라라 차례가 되었다.

“맹세코 폐하를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저, 정말이에요.”

“쉬이이익… 쒸이익…….”

“솔직히 폐하 따위! 엄청 별로고, 얼굴만 반반할 뿐 실속이 없달까…….”

“…라라?”

그때 라라의 귀에 믿기 힘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원 입구에 서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 옆에는 말 한 마리가 푸르릉 소리를 내며 멈춰 서있었다.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인지 말의 눈빛이 많이 지쳐 보였다.

사냥 대회 중에 탈주라도 한 건지 그는 생소한 갑옷 차림이었다. 라라가 당혹감에 차있는 동안 카를라히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라라가 자신을 뒷담화하는 현장을 얼떨결에 포착하게 된 것도 당혹스럽지만, 그 주변에 널려있는 죽은 고블린의 사체는 더욱 당황스럽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라라가 멍하니 운을 뗐다.

“…라히가, 왜 여기에…….”

“보, 보고 싶어서 왔다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 뒤늦게 카를라히는 헛, 하고 손을 들어 입술을 눌러 막았다. 무의식중에 말한 탓이라지만 너무 솔직한 대답에 스스로가 다 부끄러워진 것이다. 순식간에 양쪽 귀가 타오를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거짓말 치시네!!”

그러나 민망한 정적이 흐르기도 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라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딘가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돈 빌린 거 받으러 온 거잖아요!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면서 찾아오지 않아도 담달에 확실히 이자까지 쳐서 준다니까요!”

“어……? 음? 돈이라니……?”

“시치미 떼시긴! 자, 여기 돈이요!! 이제 됐죠?! 갖고 꺼져요!”

라라는 다급하게 핸드백에서 지폐를 한 움큼 꺼내 그의 가슴팍에 던졌다. 그거 가지고 가요, 빨리! 카를라히에게 남몰래 눈치를 주었으나 그는 이 상황에 놀란 듯 그저 댕그랗게 눈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쒸이이익!! 쒸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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