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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101)화 (101/115)

101화

로잘리의 온화한 말에 엘리나2는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계획된 엿 먹이기’라는 걸 모를 김빙의가 아니었지만 여기선 일단 여유롭게 응수해 주는 게 여주 된 도리였다.

출발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에 엘리나2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냥 대회 출발 지점에는 군마에 올라탄 기사들과 무기를 점검하는 귀족 남성들이 보였다. 그들 사이로 드문드문 여성들이 보였는데 무사히 다녀오라는 의미로 자신의 소지품을 사내들에게 바쁘게 건네고 있었다.

‘나도 뭘 전해야 하는데……. 하지만 손수건은 너무 진부해. 뭔가 차원 이동 빙의 여주답게 특별하고 참신한 걸……. 아!’

엘리나2는 기가 막힌 생각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기습 뽀뽀를 한 뒤 사냥 대회가 끝난 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한다면? 어느새 음흉한 표정으로 바뀐 그녀는 선두에 선 카를라히를 따라잡기 위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투구를 쓰려던 카를라히는 투구의 둥근 면에 비친 엘리나2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기겁하며 투구를 땅에 떨어뜨렸다. 마치 온몸을 뒤틀며 쫓아오는 팔 척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추, 출발하지!”

“기다리세요! 폐하! 드릴 게 있단 말예요~!”

카를라히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산맥 초입을 통과했다. 숲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그를 따라잡기 위해 엘리나2는 서둘러 말에 올랐다. 한 번도 말을 타본 적은 없었지만 몸은 기억하는지 자연스럽게 말을 몰고 있었다.

그런 엘리나2를 멀리서 발견한 영애들이 크게 재잘거렸다.

“저기 파티원 한 명이 따로 노는데요?”

“어머나, 저렇게 갠플을 할 거면 왜 파티를 맺은 건지…….”

“파티 끊어요, 그냥.”

불만이 터져 나오는 그때였다. 영애들 사이에 있던 로잘리가 나서서 말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제가 한번 따라가 볼게요. 여러분들은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하지만 딜러 혼자서 가기엔…….”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힐 없이도 괜찮아요.”

빠르게 말 위에 오른 로잘리는 힐러 포지션의 영애를 안도시킨 후 곧바로 엘리나2를 추격했다. 나무가 울창한 숲속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주위가 어두워져 갔다. 어느새 말발굽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초조한 기분을 느낀 로잘리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훑으며 엘리나2의 흔적을 쫓았다. 서둘러 찾아야 했다. 김빙의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저 혼자 훌쩍 실종되기 전에 어떻게든 찾아내서 막아야 했다.

‘남주들의 관심과 걱정을 한 몸에 받게 놔둘 순 없지……! 그게 남주의 감정 자각으로 이어진다면 더더욱 막아야 해!’

어느새 로잘리의 안면에 표독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로잘리의 귀에 어떤 비명 소리가 닿았다.

“꺄아아악!”

새된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엘리나2의 비명이었다. 한발 늦은 것일까. 로잘리는 서둘러 비명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만일 마물들에게 둘러싸인 것이라면 자신도 그 사이에 껴서 같이 공격을 받으리라. 그리고 나란히 남주에게 구출당할 것이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도착한 곳에는 엘리나2가 주저앉아 있었다. 10분 전만 해도 잘 타고 간 말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온데간데도 없었다.

“…뭐 하세요?”

로잘리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이에 감정을 잡고 미아처럼 훌쩍이던 엘리나2는 언제 그랬냔 듯이 표정을 싹 바꾸고서 고개를 들었다.

“…아, 님 부른 거 아닌데……. 아놔, 오라는 남주는 안 오고 무슨 악녀가 달려와 중얼…….”

“다 들리거든요?”

로잘리의 앙칼진 목소리에 엘리나2는 슬쩍 눈을 부라렸다. 가련한 척하기 위해 굳이 불편하게 무릎을 접고 앉아있던 엘리나2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뒤를 돌며 털털하게 한마디 던졌다.

“용무 끝나셨음 가세요.”

“호호호! 이대로 두고 가면요? 분명 남주가 올 때까지 숲속을 헤매다가 위험에 처해서 절묘한 순간에 남주한테 구해질 게 뻔한데요?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아?!”

로잘리가 왼손을 높게 쳐들어 엘리나2의 뺨을 강타하려는 순간 강한 손아귀가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불과 1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야 악녀의 본성을 드러내는군…….”

엘리나2의 앞을 막아선 자는 다름 아닌 카를라히였다. 망토 자락이 강한 바람에 크게 펄럭이며 내려앉았다. 엘리나2는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하…….” 하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한쪽 볼이 볼록 튀어나와 보일 정도로 불량하게 혀로 볼 안쪽을 찔렀다.

“야, 이제까지 뭐 했냐. 나 혼자 질질 짜는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이제 기어 나오냐?”

“야, 악녀의 본성이 뭐? 뭐 어쨌다고오? 여자들 싸우는데 눈치 없이 끼어들지 말고 가라?”

엘리나2와 로잘리는 동시에 카를라히의 양어깨를 툭툭 치며 뒤로 밀었다. 황궁 안에서 평생을 곱게 자라온 폭군 카를라히로서는 이런 과격한 뒷골목 문화는 처음이었다. 그도 집에서만 폭군이지 밖에서는 현실 찌질이일 뿐이었다.

눈물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벗어났다. 라라가 보고 싶었다. 그사이에 여주와 악녀의 말싸움은 더 격하게 변해있었다.

“이 염병할 년! 혼자 생쇼하니까 좋니?”

“…하, 지금 악녀라고 날 친 거임? 헤헤… 이 미췬 뇬이.”

선빵에 보답하는 죽빵을 갈김으로써 엘리나2는 반격에 나섰지만 곧 악녀의 손에 머리채를 휘어잡혔다.

“이년이 날 쳐?!!”

“아아! 이거 안 놓냐?! 여주가 여주답게 산에서 실종 좀 되겠다는데, 악녀 주제에 낄 데 껴라!”

“지랄! 네년은 가출한 몸부터 찾아가. 우리 언니 영혼 어쨌어!”

“…뭐야, 너 언제부터 내가 빙의된 거 알고 있었음?”

“내가 모를 줄 알았니? 얼른 언니 몸 안 내놔?!”

“나도 무슨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 줄 알아!!”

“그럼 몸 빌리는 동안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던가아!!”

몸싸움은 점점 격해져 갔다. 서로를 밀치며 과격함을 뽐내던 두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동시에 헛발을 디뎠다. 수풀에 가려져 있어 땅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앗…….”

엘리나2가 먼저 옆으로 기울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던 로잘리도 덩달아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수풀 아래로 사라졌다. 로잘리와 몸이 겹쳐진 채로 한참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던 엘리나2는 그만 튀어나온 돌에 머리를 찍히고 말았다.

5분 정도 굴러서야 두 사람의 몸이 산의 편평한 구간에서 멈췄다. 로잘리는 머리를 짚고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곧바로 근처에다 토를 했다.

“…으으, 머리야.”

입 주변을 닦으며 로잘리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나 멀리까지 내려왔는지 원래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말도 없고, 완벽한 실종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년만 없다면 완벽할 텐데…….’

로잘리는 질린 눈을 하고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제 옆에 누워있는 엘리나2가 보였다.

“하, 여주라고 팔자 좋게 기절한 거야?! 당장 안 일어나!!”

금방이라도 싸다구를 갈길 듯 앙칼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반응은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엘리나2를 이상하게 여긴 로잘리는 엘리나2의 인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었어?”

로잘리는 화들짝 손을 떼고서 엘리나2를 내려다보았다.

“야, 야야… 이년아, 눈을 떠봐! 어서!! 왜 뜨질 못해!”

로잘리는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손을 떨었다. 이러면 마치 악녀가 고의로 여주를 죽인 것 같지 않은가. 사고인데, 마치 사고로 위장해서 죽인 것 같지 않은가. 이렇게 자신은 남주의 분노를 사고 처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지는 걸까. 로잘리가 절망스러운 상황에 바르르 몸을 떨 때였다.

“왁!!”

큰 소리와 함께 엘리나2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에 로잘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넘어졌다가 곧바로 있는 힘껏 싸대기를 날렸다. 조금은 안도감이 담긴 싸대기였다.

라라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밖으로 나왔다.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티파티가 열리는 백작가로 향했다. 지금쯤 산맥에서는 사냥 대회가 한창일 것이다. 약간은 그쪽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라라는 신경 끄기로 했다.

‘나중에 라히에게 들으면 되는 일이고……. 아.’

문득 떠오른 그의 이름에 라라는 기운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날 로브신사 존잘님이 그라는 것을 안 뒤로 한 번도 그와 만난 적이 없었다. 아니, 만나지 못했다.

사냥 대회 주최 준비로 바빴을 테지만 연락 없는 그에게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왜 정체를 숨긴 것인지, 왜 그런 짓을 뒤에서 한 것인지 제게 해명조차 할 필요가 없단 걸까.

‘하긴, 내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으나 오히려 그 생각이 자신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구나, 그렇구나, 의미 없는 체념을 반복하는 동안 라라가 탄 마차는 백작저에 도착해 있었다.

티파티가 열리는 저택의 후원으로 안내받은 라라는 일단 아는 영애가 없는지 둘러보았다. 샴페인 잔을 쥐고서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어느 곳에서 멈췄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3초간 눈을 의심하고 비벼도 보았으나 그 존재는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유난히 부각된 아래턱과 삐죽 튀어나온 이빨, 울룩불룩한 몸체를 덮은 초록색 거죽을 과시하며 ‘오크’가 티파티장 한가운데에 난입해 있었다. 오크뿐이랴. 사냥 대회 삼종세트라 불리는 트롤, 고블린도 함께였다.

믿기지 않다 못해 놀라 까무러쳐도 모자랄 광경이었다. 그때 쿵쿵 하는 발소리와 함께 오크가 라라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취익… 쒸이익 쒸익.”

꺼림칙한 울음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와서야 라라는 흠칫 하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도망가고 싶어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티파티에 참가했다가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경험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건 누가 봐도 사냥 대회의 클리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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