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저기 …싸우는 도중에 죄송한데, 저 때문에 싸우는 거 맞죠……?”
그러나 그녀의 조심스런 물음은 안타깝게도 씹혔다.
“씨발!”
라라는 얼굴이 발개진 채로 방을 뛰쳐나가려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따지면 티샤가 아니라 그 정도에 마음이 바뀐 로브신사가 문제라고 보는데…….”
“뭐요?”
홱 하고 고개를 돌린 라라는 두 남자를 응시했다. 방금 발언에 대해 캐묻듯 열렬한 눈빛이었다.
“지금 제 최애 걸고넘어진 거예요?”
“흠……. 내가 안 말했다. 교황이 그랬다.”
“라라, 절대 네 최애를 흠잡으려는 게 아니야. 내 말은 사랑의 발렌타인 편에서 티샤만 나무라기엔 로브신사의 행실도 썩 좋지만은 않다는…….”
“아뇨, 8권에서 로브신사의 마음이 바뀐 건 티샤가 사랑의 독약을 써서 그런 거잖아요. 아무리 자기 최애가 예쁘다고 해도 그렇지, 걔가 한 잘못을 남 탓으로 몰다니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따지면 티샤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는데?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말하자면, 티샤는 7권 36화와 9권 84화, 10권에서 발암캐로 활약했었지. 물론 나도 그때마다 릴리카와 티샤 사이에서 줏대 없이 휘둘린 로브신사가 영 좋아 보이진 않는다만.”
“두 사람 다 로브신사에 대해 뭘 안다곳!!”
라라는 적극적으로 두 남주 사이에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서로를 밀쳐대며 자신의 최애를 실드 치기 시작했다.
“티샤가 그렇게 된 이유는 이미 만화에서 나왔잖아? 그놈의 릴리카, 릴리카, 주인공 편애가 좀 심한 거 아니냐?”
“교황, 잠깐만……! 여기서 릴리카를 걸고넘어지는 건 아니지 않나?”
“솔직히 로브신사도 처음에는 릴리카의 라이벌 캐릭터로 나왔는데…….”
“아니, 로브신사 얘기는 하지 말자고요. 아! 지금 밀쳤어요?!”
덩치가 큰 남정네 사이에서 어쩌다 밀쳐진 라라는 그대로 뒤로 발라당 넘어져 버렸다.
카를라히와 미하일이 놀라서 그녀를 돌아본 순간, 라라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남주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히 미하일의 복부에 황소처럼 머리를 들이박고 튕겨져 나가며, 자신을 잡아주려는 카를라히를 옆으로 밀쳐냈다.
“아놔, 로브신사!!”
“티샤! 티샤! 티샤!”
“릴리카으ㅏ아라앍!!”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약간의 격한 몸싸움과 함께 침을 튀기는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누구 새끼가 제일 잘났나?를 가리는 세상 제일 쓸데없는 논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열띤 논쟁은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 마침내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무심코 던진 라라의 한마디에 의해서.
“아니 근데, 우리끼리 이렇게 열을 내도 티샤 결국 죽잖아요?”
정발본 최신화까지 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라라는 알지 못했다. 이 말이 어느 이에게는 세계 종말론이나 운성 충돌설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줄 스포가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티샤가…….”
미하일은 떨리는 눈길을 감추지 못했다.
“죽는다고……?”
“헉…, 설마 아직 거기까지 안 봤어요?”
라라는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옆에 있던 카를라히도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미하일은 고개를 떨어뜨려야만 했다. 그녀가 죽는다니, 거대한 슬픔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거짓말이라고… 해줘, 어서!”
간헐적으로 떨리던 목소리가 한껏 격양되어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미하일의 말에 라라와 카를라히는 쥐 죽은 듯이 서있어야만 했다.
이에 미하일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주춤거리다가 이내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잔혹한 진실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듯했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깊은 절망에 빠진 눈동자가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혼자 있고 싶어. 나가주라…….”
그 말에 라라와 카를라히는 숙연한 표정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최애는 다르더라도, 같은 최애가 있는 입장으로서 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2장 사냥 대회의 정석
쉬엄쉬엄 다가오던 사냥 대회가 눈 깜짝할 새 코앞으로 와있었다. 당일이 돼서야 엘리나2는 실감이 날 정도였다.
황제의 파트너로서 참석하는 엘리나2는 이른 아침부터 꽃단장에 들어갔다. 저번에 악녀에게 파티 복장으로 망신당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번 사냥 대회 파티도 방심할 수 없었다. 보나 마나 야외 파티 형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펑퍼짐한 스타일의 화사한 은빛 언더드레스를 허리에 둘렀다. 연회장 바닥이 아닌 풀밭과 흙바닥 위를 걸을 것을 생각해 드레스 단의 장식은 최소화돼 있었다. 엘리나2, 김빙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물결치는 은색 머리칼과 은빛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오늘도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엘리나2는 곧바로 준비된 마차에 올라 사냥 대회가 열리는 란튼베르그산맥으로 향했다.
산 초입에선 이미 사냥 대회 개막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인공은 항상 늦게 등장하는 법이라지만 너무 늦게 등장해도 눈치 보였다. 운동장처럼 넓은 공터에는 기사단마다 각 2열로 길게 줄을 서있었다. 그 뒤에는 영식과 영애들이 키순으로 서있었다.
아무래도 젊은 귀족들이 혈기와 무예를 뽐내는 자리이다 보니 연륜 있는 권력자들은 대부분 참석하지 않았다. 엘리나2는 맨 뒷줄에 슬며시 서서 단상 위에 위엄 있게 서있는 황제 카를라히를 올려다보았다. 허리에 검을 차고 가죽 갑옷을 입은 모습이 새삼 멋져 보였다.
“…이상으로 황제 폐하의 훈화 말씀이 있겠습니다.”
“제군, 높고 푸르른 하늘 아래 이렇게 사냥 대회를 열게 되어 기쁘군.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작년에 비해 다들 얼마나 실력이 늘었을지 궁금하군. 어떤 이는 자기 개발에 노력했을 테고, 어떤 이는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노력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좌절이라는 교훈을 배웠을 것이다. 개인마다 꿈과 목표가 다르듯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 또한 다를 것이다. 나는 어떤 길이 무조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생략)”
“…….”
“우리 황실은 제군의 꿈을 응원한다. 이런 말이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을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때론 실패하고 좌절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한다면…(생략)…앞으로도 즐겁고 평안한 기사단 생활을 보내길 바라며, 무엇보다 건강과 안전이 우선이라는 말을 전하겠다.”
“이상으로 황제 폐하의 훈화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으로 대공 전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아아아― 하고 여기저기서 지친 듯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바르게 서있는 사람은 극소수로 대부분이 삐딱하게 어깨를 기울인 불량한 자세였다. 어서 끝나기를 바라는 대중의 눈치에도 아랑곳 않고 노쇠한 대공이 단상 위에 올라와 연설을 시작했다.
“앞에 폐하께서 전부 얘기하셨으니 긴말 안 하지. 다들 즐겁게 즐기도록. 이상.”
“와아아아아아!!”
시작한 지 10초 만에 끝나버린 대공의 연설에 곧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언제 썩은 표정이었냐는 듯이 다들 하나같이 밝은 얼굴들이었다.
“그럼 이상으로 사냥 대회 개막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자분들은 출발 신호가 울리기 전까지 각자 자리에서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모여있던 관중이 해산되었다. 엘리나2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처럼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 무리에게 다가섰다.
“혹시 파티가 어디서 열리는지 아세요? 야외인 것 같은데 흠, 제가 첨이라서요, 헤헷.”
“파티요……? 전 단지 애인을 응원하러 왔을 뿐이라…….”
“저도 구경하러 온 거예요. 파티라면 아마…….”
대답한 영애의 옆에 서있던 갈색 머리 영애가 힐끗 사선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엘리나2는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머나, 이게 누구셔라?”
악녀의 무리에 속한 영애 하나가 엘리나2를 발견하고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이에 다른 영애들도 하나둘 엘리나2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소리 죽여 코웃음 쳤다.
‘…스바, 다 들리거든.’
먼 곳에서부터 ‘풉ㅍ크큭ㅎ’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엘리나2는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무리 중심에 있던 로잘리가 눈치 없지만 착해빠진 순진 여주를 연기하며 엘리나2의 앞으로 다가왔다. 파티 복장인 엘리나2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대검을 짊어 멘 전사 복장을 하고서.
“앗, 기다렸어요! 오셨군요. 그보다 오늘 파티에서 포지션이 뭐죠? 음~ 힐러는 아닌 것 같은데……. 아, 혹시 탱커이신가요?”
짝, 하고 경쾌하게 손뼉까지 친 로잘리는 환하게 웃는 낯으로 엘리나2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설마… 정말 파티복을 입고 온 건가요? 헉, 공녀님께서 이런 실수를 하실 줄이야……. 죄송해요. 제가 파티라고 해서 정말 파티이신 줄 아셨군요. 흠흠. 아, 웃으면 안 되는데 미안해요. 엉엉.”
“로잘리~ 너무 미안해하지 마요. 그럴 수도 있죠. 벌레가 우글거리는 사냥 대회에서 달짝지근한 홍차라도 마실 줄 아셨나 보죠. 호홋!”
“뭐 파티는 맞는 말이지만요. 오호호홋!”
로잘리의 옆으로 활대를 멘 영애와 마법 지팡이를 든 영애가 다가오며 말했다. 엘리나2는 조용히 입술을 씰룩였다. 아무리 판타지 소설 속이라지만 영애들이 파티를 맺고 사냥 대회에 참여하다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아쒸, 존나 얼탱이가 없네.”
“뭐라고 하셨나요, 지금?”
힐러 포지션인 것 같은 영애 하나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이에 엘리나2는 경고를 먹을까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히히. 파티를 맺는 건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예욤~ 그래도 오늘 이렇게 왔으니 함께 참가해도 될까요?”
“당연하죠, 헤헤. 공녀님과는 이미 파티를 맺기로 약속했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