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꺅, 로브신사 코스 맞죠? 초상화 그려도 되나요?”
“저도요. 초상화 가능하세요?”
“저쪽에서 따로 초상화 그리고 싶은데 될까요?”
마법소녀 릴리카 부스 구간에 들어서기 무섭게 여성 팬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자신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그녀들의 부탁에도 존잘님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라라가 나서서 그 대신에 거절의 말을 전해야 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일행과 함께라서요. 그리고 컨셉 지키신다고 원래 말씀을 안 하세요.”
“그러시군요. 아쉽네요. 아, 코스 잘 어울리세요.”
“다음에 꼭 기회가 되면 좋겠어요~ 완전 고퀄 코스세요!”
여성 팬들이 물러나자 그제야 두 사람은 부스를 돌 수 있었다. 미하일은 로브 너머로 보이는 비공식 굿즈를 훑어보았다. 대부분이 로브신사거나 릴리카였다. 조금은 김이 빠져 심드렁하게 걷던 그의 눈에 처음으로 티샤 그림이 들어왔다.
그것뿐만 아니라 티샤 쿠션, 티샤 머그 컵, 티샤 열쇠고리, 티샤 개인 회지가 줄지어 놓여있었다.
‘티샤, 역시 인기 있구나.’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하며 미하일은 티샤 쿠션을 내려다보았다. 팬이 제작한 비공식 굿즈인지 원작 그림체와는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3등신 티샤도 귀여웠다. 순간 충동이 일 정도로 말이다.
‘분명 사도 쓰지도 않겠지만… 왠지 사고 싶네.’
“어? 티샤 좋아하는 팬인가 봐요.”
라라의 목소리에 흠칫, 하고 미하일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티샤 굿즈를 사고 있는 팬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주위에는 티샤 팬이 없어서 티샤 팬들 보면 좀 신기해요. 존잘님도 아시겠지만, 릴리카 팬들 중에서 티샤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잖아요. 저도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뭔가 불쌍하긴 한데 자기가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걸로 릴리카 질투하는 게 좀 그래서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라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결국엔 혼자 열폭하다가 흑마법소녀로 변하고 릴리카랑 대립 구도가 되잖아요? 로브신사 빼앗으려는 것도 좀 그렇구, 솔직히 티샤가 그렇게까지 삐뚤어지지 않았어도 그렇게 욕먹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말할 필욘 없지 않나? 티샤가 릴리카한테 아주 심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릴리카를 질투한 것도 알고 보면 하나뿐인 친구인 릴리카가 병원에 자주 오지 않아서 속상해서 그런 거였잖아.”
라라는 놀란 눈으로 존잘님을 돌아보았다. 늘 묵묵부답이던 사람이 처음으로 말을 꺼낸 것도 놀랍지만 그 전에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했다.
“미하일……? 미하일 맞죠?”
라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로브 아래 드러난 입술이 가늘게 휘어 올라갔다. 로브 속에서 손을 꺼낸 그는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여기에서 얘기하기엔 보는 사람이 많으니 다른 곳으로 옮기자.”
“아, 잠깐만요. 아직 로브신사 동인지 못 샀는데!”
절박한 외침은 끝내 그의 귀에 닿지 않았다. 라라가 검은 어둠에 덮쳐져 눈을 떴을 땐 익숙한 공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을 잊을 수 있을까. 배고픔에 허덕이며 내보내 달라고 목이 찢어져라 외쳐대던 그날의 잔혹한 기억들이 그녀의 뇌리에 침범했다.
“…날 이제껏 속인 거예요? 말해보세요! 아니, 그보다 왜 다이어트 캠프로 돌아온 거예욧! 절 얼마나 괴롭게 만들어야…….”
“진정해.”
미하일은 가볍게 라라를 뒤로 밀어뜨렸다. 푹신한 침대가 그녀의 몸을 받아내며 크게 출렁였다.
라라가 다시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미하일은 가볍게 그녀를 짓누르며 그 위에 올라탔다. 마력의 기운이 가시지 않아 붉은빛이 어른거리는 하늘색 눈동자는 기묘했다. 자줏빛으로 물든 해 질 녘 하늘처럼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언제부터 날 속인 거예요……? 대체 왜…….”
“네가 황제 탄신 무도회에서 로브신사가 이상형이라는 얘길 들은 후였어. 물론 처음엔 겉모습만 흉내 낸 거지만.”
“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처음엔 원작도 읽지 않고 로브신사 코스를 시작한 거였어. 그러다 네가 하는 얘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만화책을 읽다가 티샤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지. 너에겐 감사해, 티샤를 만날 수 있게 해줬으니까. 처음에는 별 감정이 없었는데 점점 볼수록 애달픈 감정을 느끼게 됐어. 내 새끼 같고 안쓰러워서 자꾸만 부둥부둥해 주고 싶고…….”
“맞아요, 다들 그렇게 빠지죠. 아니, 그럼 그 전에는요……? 하얀 장미는?”
“하얀 장미?”
“…아, 아니에요.”
라라는 당혹스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코스를 시작한 게 탄신 무도회부터라니, 미하일의 태도를 보건대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 전에 제게 하얀 장미를 선물했던 로브신사는, 엘리나3을 영감님 침대에 묶었던 그자는 미하일이 아니란 말일까?
“…그보다 티샤맘이었을 줄은 몰랐는데 미안해요. 아까 제 발언 사과드릴게요.”
“라라 너라면 날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어. 요실금이었던 나를 받아준 건 너뿐이었으니까.”
“요실금은 병이니까 이해해 드리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티샤는 제 타입이 아니라서…….”
그와 시선을 피하며 라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서……? 왜 릴리카는 되고, 티샤는 되지 않는 건데?”
상처를 받은 그의 눈동자가 얕게 흔들렸다. 라라의 어깨를 힘껏 꽉 쥐고서 미하일은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서로의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취향은 변할 수 있어.”
“제 취향 소나무예요.”
“소나무여도 괜찮아. 널 세뇌시켜서라도 강제로 티샤를 파게 만들겠어.”
“…이, 이거 놔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라라를 더 세게 내리누르고서 미하일은 한 손에 검은 마력을 끌어모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취향이 변해있을 거야.”
“제발… 싫어! 취존 좀!”
천천히 시야를 덮는 커다란 손바닥에 라라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눈꼬리에 고인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려 침대 시트를 적셨다. 그때였다. 와장창, 하고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순간 등 위로 날아든 작은 유리 조각들에 미하일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오른팔을 뒤로 젖혀 등을 더듬자 로브에 꽂힌 유리 조각 몇 개가 만져졌다. 살에 꽂히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대체 누가…….”
중요한 순간에 훼방을 놓은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창문 아래에 서서 팔에 박힌 유리 조각을 뽑아내는 어느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아… 아어어… 아, 따가.”
또 다른 로브신사였다. 팔로 머리를 보호하고 창을 깨고 들어온 모양인지 팔의 상태가 말이 아니어 보였다. 만화를 너무 많이 봤군, 미하일이 그렇게 판단할 때 침입자가 로브를 크게 펄럭이며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을 조심스레 피해 걸어왔다.
“떠먹여 주는 건 좋지만…….”
로브 아래로 드러난 긴 입술이 열렸다.
“억지로 취향을 강요하는 짓은 같은 덕후로서 용서할 수 없다.”
“이거 참, 폐하께서 몸소 이 대신전에 행차하실 줄이야. 그보다 팔에서 피 떨어지는데 치료하지 않아도 괜찮…….”
“폐, 폐하라니! 난 그런 자는 모른다!”
이렇게 쉽게 들통날 줄은 몰랐던 카를라히는 당황해서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미하일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는 듯 눈앞의 로브신사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변장은 완벽할 터인데. 대체 언제부터 내가 오타쿠란 걸 눈치챈 거지, 교황? 알면서도 이 나를 속인 것인가.”
“아니죠, 속인 건 제가 아니라 폐하시지 않습니까? 저보고 가짜라느니 진짜라느니 말할 땐 솔직히 무슨 소린가 했는데, 폐하께서도 라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로브신사로 변장했던 적이 있나 보군요.”
그제야 카를라히는 미하일의 뒤편 침대에 앉아있는 라라를 볼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최근에 로브신사를 흉내 낸 건 나지만 그 이전의 로브신사는 폐하 당신이겠군요. 그녈 속인 건 나나 당신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이런 식으로 물고 늘어질 줄이야……. 이 나라의 교황은 비열한 짓만 골라 하는군.”
“그딴 동글뱅이 안경 하나 쓰고 들키지 않길 바란 당신이 허술한 거죠. 만화 좀 작작 보시지 그래요?”
미하일의 조소 섞인 말에 카를라히는 빠르게 미하일 앞에 다가와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그러는 네놈은! 라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릴리카를 파는 척해왔던 건가? 겉만 그럴듯하게 로브신사로 가꾸면 되는 줄 알아? 덕질이 우습나? 덕후들의 마음이 우습게 보이냔 말이다.”
순간 깨친 창 사이로 강한 바람이 불어닥쳐 왔다. 눈 밑까지 오던 로브가 스르륵 뒤로 넘어가며 검자줏빛 머리칼이 드러났다. 라라는 크게 눈을 떴다. 로브신사가 라히 그였다니, 역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동시에 처음 보는 카를라히의 매서운 표정에 라라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검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미하일을 베고도 남았을 살기였다.
험악한 분위기에 라라는 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 둘에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절대 나대지 않았겠지만, 일단 이 싸움의 원인이 제게 있으니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끼어든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저 때문에 싸우는 거라면 그만두세요! 대체 이런 싸움에 무슨 의미가…….”
“너 같은 것한테 그녀를 빼앗길 순 없지. 네 녀석은 릴리카를 팔 자격 따위 없다! 다신 내 앞에서 릴리카 그녀를 들먹이지 마라.”
카를라히가 미하일의 멱살을 쥐고서 잡아 던지듯 놓는 순간 강한 주먹이 날아왔다. 그대로 세게 한쪽 얼굴을 맞은 카를라히가 주춤하고 뒤로 물러서자 곧바로 미하일이 덤벼들었다. 거친 타격음이 또 한 번 울렸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폐하, 릴리카 따윈 줘도 안 파요.”
“뭐라……!”
“티샤를 병원에 혼자 놔둔 주제에, 그딴 게 뭐가 친구죠? 꿈과 희망을 이뤄주는 마법소녀? 하, 웃기지도 않아서.”
“지금 릴리카 보고 웃기지도 않다고 했나? 교황, 감히 내 경고를 무시하고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들먹이다니 배짱 한번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