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98)화 (98/115)

98화

‘아놔, X됐네! 오늘 구운 마늘이랑 스테이크 먹어서 입 냄새도 오질 듯.’

어떻게든 기습 키스를 당하기 전에 빼내야 했다. 열심히 혓바닥으로 앞니에 낀 고기 조각을 밀어내는 동안 발은 부지런히 움직여 어느새 서재 앞에 당도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엘리나2는 흠칫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디체스는 문을 연 채 그녀에게 들어오라는 시선을 보냈다.

“저번에 도와준다고 했던 말.”

엘리나2가 서재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디체스가 운을 뗐다. 조금 뜸을 들인 후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습니다.”

뚫어질 듯이 적나라한 시선이 얼굴에 닿자 엘리나2는 살짝 고개를 내렸다. 아직 빼지 못한 고기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생각해 둔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공작님이 엘리나1을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언니를 붙잡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러니까 저를 이용해서…….”

“그래서 이용했습니다만, 이 뒤의 스토리를 어떻게 이어야 될지 몰라서 말입니다.”

“네……?”

엘리나2는 금방이라도 김빙의 영혼이 빠져나갈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디체스는 책상 한편에 올려둔 원고지를 집어 와 내밀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대 말대로 후회물로 가보긴 했는데 위로하는 부분 뒤에 서브 여주 엘리나2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역시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아서 불렀습니다.”

“아니, 나를 이용하라고 하긴 했는데…….”

“그리고 소설 프롤로그 시작 부분에 실제 지명과 인물은 본 내용과 상관없다고 써두었습니다. 픽션과 현실을 헷갈려 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현실에서 하라고, 이 빡대가리야.’

집착, 소유욕 빼고는 머릿속에 든 게 없는 건가. 김빙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원고지를 영혼 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녀는 첫 문장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오가던 귓속말, 애틋한 눈길, 사랑스러운 입맞춤, 그리고 따스한 온기. 그녀의 모든 게 오롯이 다 제 것이라 여겼던 날이 존재한다. 한때는 그녀와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자 오만한 판단에 불과했다.

“오, 엘리나1, 나는 당신밖에 없소.”

“…엘리나1, 그대의 아름다움과 깊은 지성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답니다, 이 난.”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당신의 매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오.”

나는 보고야 말았다. 화려한 붉은빛의 장미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그보다 더 화려하게 웃고 있는 엘리나1을. 그리고 그녀의 주위에서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는 수많은 사내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오직 나의 사랑만을 바라던 여인은 뒤에서 모든 남자를 홀리는 희대의 불여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나1 당신에게는 이미 애인이 있죠.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란 말인가요! 상대는 공작에,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황제의 최측근! 우리 같은 남자들로는 상대도 되지 않겠죠!”

“후훗, 디체스라면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오, 아름다운 우리들의 여왕이여.”

“…네, 워낙 저를 귀찮게 했던 남자니까요. 애인이라는 소문은 사실 거짓이에요. 제가 단 한 남자만으로 만족할 리 없잖아요?”

‘당신이 좋아요, 디체스.’

엘리나1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나도 그대밖에 없다오, 엘리나1.”

“오, 사랑스러운 그대……. 그 하얀 손등에 입을 맞춰도 될까요?”

“오늘 밤 화끈하게 13P는 어떻지? 엘리나1, 난 언제든 그대를 위한 준비가…….”

“우리들의 여왕이시여! 세상을 휘어잡을 팜므파탈!”

뒷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 뒤로 어떻게 공작저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며칠간을 쥐 죽은 듯이 잠만 청했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픔에 짓눌린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엘리나1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아프다고 생각했는지 병문안 선물로 장미 꽃다발을 든 채.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나는 결국 그녀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흐드러지게 피어난 붉은 장미들의 향연이 또 한 번 생각나서. 그날 보았던 광경이 가시가 되어 아프게 심장을 찔러오는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습니까, 엘리나1! 나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입니까.”

“…디체스.”

“대답해 주십시오. 어째서 그런 할렘을… 역하렘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막았다. 한 명이랑 열세 번을 하나, 열세 명이랑 동시에 하나, 그게 그거 아닌가! 13P라니 용서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최근에 진행된 황제와의 강제 약혼이 원인이 된 것일까. 당당하게 황제의 앞에서 그녀를 내 애인이라 밝히지 않아서? 약혼을 방해하지 않아서? 이렇게 변할 만큼 내게 화가 났단 말인가.

하지만 내게도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엄연히 존재했다. 잠시 어떤 일로 황실 감옥에 있었으니 말이다. 몸도 정신도 속박된 그곳에서 내가 손쓸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다!

아니면 자포자기란 말인가. 황제의 약혼녀가 될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책감에 몸부림칠 나를 배려해, 미리 나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내기 위해 이런 거짓 연기를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추측을 할 정도로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엘리나1이 희대의 불여시라니, 나는 어쩌면 현실을 부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차.가.운. 법이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요, 공작님은 제게 있어서 그저 그런 정자 은행일 뿐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

처음 본 엘리나1의 얼굴은 그야말로 꽃과 뱀을 합쳐놓은 형상이었다.]

“와…, 질척함의 끝을 봤다. 그보다 정자 은행 이 부분만 묘하게 미래 과학적인데요. 판타지 맞죠?”

“그렇습니까.”

엘리나2의 솔직한 평가에 디체스는 흐음, 하고 정자 은행 부분을 교묘하게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부분을 채울 다른 적절한 단어를 생각해야만 했다. 턱을 괴고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를 바라보며 엘리나2는 짜게 식은 눈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집착남이 헤어지면 그렇게 무서워진다더니, 하다하다 전 여친 디스 소설이나 쓰고 있고 진짜 무서울 정도로 찌질하다…….”

“원래 후회물은 주인공 애인이 똥차여야지 나중에 후회했을 때 더 재밌는 법입니다.”

“이걸 현실 엘리나1이 보면 후회가 아니라 증오할 거 같은데. 고소각 섰고요? 후회물이 아니라 법정 드라마를 쓰셨네~ 크, 빅 픽처 오졌다.”

“더 이상의 혹평은 듣지 않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이곳에 부른 건 피드백을 받기 위함이지 이런 질책을 받으려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디체스는 사나운 눈빛을 드러내며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의 앞에서 작은 토끼가 된 엘리나2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크, 인성. 한 대 치시게요? 알겠어요. 정자 은행 대신할 단어 말이죠? 개**는 어떠세요?”

“그거 좋군요. 조금이나마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아니면 씨**미친*은요?”

“그냥 날 욕하고 싶은 게 아닙니까?”

그렇게 퇴고를 거듭하여 탄생한 『아름다운 공작꽃』은 출간하자마자 로맨스 판타지 분야 최초로 200만부 판매 신화를 찍게 된다. 물론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 * *

카를라히는 눈을 떴다. 밝은 햇살이 높은 창문틀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욕실로 들어섰다. 꿈속에서 사향노루와 산양이 사이좋게 자신을 비웃으며 뛰놀던 것이 영 찝찝하긴 해도 컨디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편이었다.

체크무늬 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동글뱅이 안경을 끼고, 마지막으로 양 손목에 향수를 뿌려 귓등에 비볐다. 완벽히 나갈 채비를 마친 그는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중간에 꽃집에 들러 싱싱한 장미가 담긴 바구니를 샀다.

약 10분 후 슈모르드 자작가 앞에 도착한 그는 목을 가다듬고서 저택 문을 두드렸다. 곧 집사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라라의 친한 지인이라능. 그녀는 안에 있냐능?”

“라라 아가씨께서는 두 시간 전에 외출하셨습니다.”

그사이 다른 약속이라니, 카를라히는 허탈함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편지로 약속을 잡으려면 주고받는 시간이 걸리기에, 급한 마음에 무턱대고 방문한 것이었다. 물론 이걸 핑계 삼아 얼굴을 보려 한 마음도 내심 없잖아 있었지만.

비록 온리전은 허무하게 끝났지만 아직 이번 달 행사인 부코가 남아있었다. 부들리 영지에서 열리는 코믹월드로, 줄여서 부코라고 불리는 행사였다.

이것이라면 그 가짜도 선수 치지 않았겠지. 부코까지 찾아갈 만큼 골수 릴덕(릴리카 덕후의 줄임말)은 아니어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도하려 해도 이것마저 빼앗길까 불안한 마음에 점심부터 냅다 찾아온 것이었다.

“하는 수 없지, 이 꽃이라도 전해달라능.”

“전하시는 분의 성함이…….”

“라히라고 하면 알 거라능. …그보다 혹시 라라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겠지?”

‘…제길, 이놈의 입, 입.’

자신이 무슨 집착 남주란 말인가. 행선지를 알고자 하는 것은 혹시라도, 만에 하나 라라가 그 가짜와 부코로 향했을까 봐 불안한 마음에서라지만. 카를라히는 스스로의 구질구질함에 속으로 질색했다. 부디 라라가 이런 제 모습을 알지 못하길 바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행선지까지는 저도 잘…….”

“아아, 아니라능. 오히려 괜한 걸 물어봐서 미안하군.”

“하지만 함께 동행하신 분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약간 수상쩍은 차림새라 기억에 남았…….”

집사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린 방문객으로 인해 말이다.

수도에서 마차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부들리 영지. 라라는 현재 그곳에 있었다. 로브신사 코스어도 함께였다. 저번 온리전 때도 그랬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그의 인기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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