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97)화 (97/115)

97화

하지만 다음 주에도 보고 싶다. 이기적이지만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

“혹시 괜찮다면 다음 주 사, 사, 사!”

“사……?”

“사응양…….”

“사향이요?”

“아니, 사으냐앙…….”

“산양이요? 산양 귀엽죠.”

“…맞다능. 산양… 그래, 산양 귀엽지.”

카를라히는 속으로 눈물을 머금으며 그녀를 떠나보냈다.

“오랜만이에요, 슈모르드 영애.”

“그러게요. 호호. 잘 지냈나요?”

라라가 다과회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십 명의 영애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녀들의 중심에는 역시나 착해진 악녀 로잘리가 서있었다. 얼굴을 아는 영애들과 가벼운 인사말을 주고받다가 입구 쪽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수군거림에 라라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나, 이게 누구셔라? 폐하의 약혼녀께서 오셨잖아요?”

로잘리가 두 손을 아래로 모으며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샛노란 드레스 차림의 엘리나2가 천진한 걸음으로 로잘리 앞으로 다가왔다. 서로 반가움에 젖은 환한 얼굴이었지만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폐하의 탄신일 이후로 처음 뵙네요. 호호.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야 뭐 잘 지냈죠. 헤헤. 황성에 계신 분들이 레알 잘 대해주셔서 날마다 핵꿀잼인 거 있죠?”

“레알… 핵꿀잼…이요?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계시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로잘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런 악의 없이 정말 ‘순수’하게 묻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아차, 엘리나1 공녀님께선 당연히 사냥 대회에 오시겠죠? 폐하의 파트너로서요?”

“당연하죠! 히히. 사냥 대회라니, 벌써부터 짱 기대되는걸요?”

“저도 기대돼요. 사냥 대회 파티에 참석하실 건가요?”

“당근빠따죠. 후후!”

엘리나2의 당찬 대답에 로잘리는 밝게 웃었다.

“그럼, 사냥 대회 파티 기대하고 있겠어요.”

“저두요! 로잘리.”

‘어서 와라, 김빙의. 널 위해 특별히 파놓은 내 함정에.’

‘사악한 년, 네가 지랄발광할수록 여주는 빛을 발하는 법.’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겨진 뜻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불똥 튀는 두 번째 승부를 앞두고서 엑스트라 영애들은 조용히 세 무리로 갈라섰다.

폐하의 약혼녀를 지지하는 무리, 착해진 로잘리를 지지하는 무리, 마지막 한 무리는 사냥 대회에 참석하지 않아 어느 쪽도 상관없는 중립 진영이었다. 라라가 어느 무리에 껴야 할지 눈치를 살필 때 라라의 머릿속에서 웅장한 신의 계시가 울려 퍼졌다.

<한때 선택받았던 자, 라라여. 사냥 대회에는 가지 말지어라.>

쓸데없이 웅장해서 머리가 다 울릴 지경이었다. 라라가 비틀대며 근처 의자에 앉자 주신은 기다렸다는 듯 다음 계시를 내렸다.

<사냥 대회 클리셰에 대해 짤막히 설명하겠다. 사냥 대회의 주된 목적은 사냥감을 잡는 게 아니라 여주를 잡는 것이니라. 일단 여주인공은 남주로부터 따로 떨어져 위험에 처하게 되느니라.>

“위험이요?”

<그렇다. 조난 외에도 오크 같은 마물이나 암살자 등의 알찬 패키지로 구성되어 있느니. 물론 죽을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까딱 위험한 순간에는 남주가 나타나서 구해줄 텐데 뭐가 걱정이겠느냐.>

마치 다이렉트 남주 상해 보험을 하나 들어놓으라고 권유하는 보험 설계사 같은 유창한 말발이었다. ‘이참에 하나 들까.’ 하고 생각이 들기 마련일 텐데 라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엑스트라는 누가 지켜주지?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충고해 주는 것이니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여주가 산에 가면 꼭 안 좋은 돌발 사건이 벌어지잖아요. 여주는 항상 남주들과 떨어져 조난을 당하고, 남주들은 애타 하면서 여주를 찾아다니고…….’

<하지만 엑스트라가 실종되면.>

‘찾지도 않고 사망 선고나 때리겠죠, 뭐……. 그런 위험한 곳에 목숨 보장 안 되는 엑스트라가 갈 리 없잖아요.’

라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 무서운 클리셰가 벌어지는 사냥 대회에 갈 바에야 그냥 다른 일정에 참가하는 게 나았다.

* * *

대신전 집무실 안, 검은 로브로 무장한 수상쩍은 사내가 들어섰다. 그는 익숙하게 집무실 안을 가로질러 책상 앞에 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튕기자 사내의 몸을 감싸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로브가 순식간에 검은 마력으로 변해 허공에 사라졌다.

동시에 남자는 허물어지듯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심장에 이는 통증에 입술을 깨물고서 고개를 숙이자 연한 금색 머리칼이 앞으로 흘러내렸다.

‘…마력을 너무 많이 썼나.’

미하일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풀었다. 고통이 점차 물러갔다. 깊이 숨을 몰아 내쉰 그는 고개를 들어 책상 위에 쌓여있는 책들에 시선을 던졌다. 『마법소녀 릴리카 정식 발매본』, 즉 만화책이었다. 현재 나온 권수까지 싹 구해 오라고 명했지만 언제 다 읽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대체 이게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미하일은 5권을 집어 들어 앞표지를 넘겼다. 눈은 왕눈에다가 턱은 완전한 브이자, 거기다 깜찍한 포즈까지 곁들인 이상한 그림이었다.

이런 유치찬란한 그림을 똑같이 3D로 재현해 낸 모형에 왜 그리 집착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명색이 황제라는 것도 피규어를 품에 지니고 있지 않나, 그걸로 라라를 붙잡지 않나, 떨어졌다고 울지를 않나. 더 이상한 것은 라라도 그 피규어에 마음이 약해진 듯 보였었다.

휙휙, 페이지를 의미 없이 넘기던 미하일은 문득 눈에 들어온 어느 그림에 시선이 머물렀다.

‘…뭐야, 이런 캐릭터도 있었던가?’

마법소녀 티샤의 등장 편이었다. 릴리카의 친구이자 평소에는 아파서 학교에도 잘 못 나오는 병약 소녀이지만 제2의 마법소녀로 선택을 받고 릴리카를 돕기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첫 등장은 1권이었지만 그 당시엔 검은 머리에 안경을 낀 칙칙한 모습인지라 미하일의 눈에 띄지 않았었다. 게다가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다는 설정이라 잘 나오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변신 후의 모습은 파격적이게도 연한 금발 머리에 붉은 눈으로, 뒤늦게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캐릭터였다.

그리고 현재 미하일은 티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얜 좀 귀여운데?’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그 귀여움은 배가되는 것 같았다. 동시에 안쓰러웠다. 티샤의 속마음이 나오는 하얀 박스 안의 대사를 읽는 내내 안쓰러운 기분을 느꼈다.

어느새 미하일은 릴리카가 활약하는 부분은 건너뛰고 마법소녀 티샤가 나오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읽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고, 그는 같은 자리에서 단숨에 15권까지 돌파했다.

집무실 창문에 걸린 달이 사라지고 동이 터왔다. 새벽 공기를 들이켜며 미하일은 입을 틀어막았다.

“아, 미친……. 작가 티샤한테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냐고. 하……. 16권 어딨지. 티샤……. 아.”

건강한 릴리카를 오래전부터 동경해 왔던 티샤, 마법이 풀리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티샤, 릴리카와 함께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과 비례해 커져가는 질투, 그런 자신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티샤, 마침내 마법의 힘이 어둠의 힘으로 바뀌고 흑마법소녀로 타락하고 마는 티샤. 어떻게 눈물 없이 읽을 수 있을까.

“티샤…….”

미하일은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절로 벌어진 마른 입술 새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공허함을 뒤로하고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티샤. 티샤. 미하일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였다.

처음엔 변신 후 모습이 귀여워서 눈길이 갔다가, 점점 그녀에게 몰입해 안쓰러워하다가, 이제는 검은 머리에 안경 쓴 그녀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미하일은 티샤의 이름을 불렀다. 부디 그녀가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 마음에 비례해 다음 권을 읽는 것이 더욱 두려워졌다.

* * *

해가 저문 야심한 시각이었다. 황제의 약혼녀가 머무는 별궁 뒷문으로 한 여인이 빠져나왔다. 여인은 신속하게 마차에 올라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끌어 내렸다. 달빛에 반사된 은빛 머리칼이 한 올 한 올 빛나며 흘러내렸다.

엘리나2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시야에 웅장한 공작저가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린 엘리나2는 조용한 걸음으로 공작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오길 기다렸다는 양 디체스가 입구 옆에 몸을 기댄 채 안경을 추어올렸다.

“올 줄 알았습니다, 엘리나2.”

“갑자기 편지가 와서 깜놀했잖아요. 무슨 일 있어요?”

“일단 내 서고로 안내하겠습니다. 그곳에서 얘기하도록 합시다.”

디체스는 그대로 그녀를 서고로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르며 엘리나2는 입맛을 다셨다.

이 상황은 분명 그것이었다. 남주가 쌍둥이 언니를 마음속에서 지워내고, 대신 언니에게 밀려나 평생을 그림자처럼 지내온 쌍둥이 동생을 마침내 바라보게 되는. 그리고 마음을 자각함과 동시에 이제까지의 모든 제 행동을 후회하는.

‘저번에 도와준다고 했던 말.’

남주는 잠시 뜸을 들이고서 말하겠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습니다.’

‘…공작님이 엘리나1을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언니를 붙잡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러니까 저를 이용해서…….’

‘틀렸습니다.’

‘네……?’

자신이 놀라면 남주는 다가와 부드럽게 자신의 어깨를 낚아챌 것이다. 그리고 벽으로 몰아붙이고는 얼굴을 들이밀겠지.

‘엘리나2, 그대는 언제든 자신을 이용하라고 했었습니다만, 나는 당신을 이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왜냐면 그대는… 엘리나1의 대용품 따위가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전 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요……. 언니와는 달라요. 공작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쌍둥이 동생의 자존감 낮은 말에 남주는 기습 키스를 하며 입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진한 키스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즉, 그런 상황인 것이다. 쩝쩝하고 입맛만 다시던 엘리나2는 앞니 중간에 낀 고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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