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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96)화 (96/115)

96화

“소개할게요, 이분이 로브신사 존잘코스어님…….”

“저기, 자리가 내 옆에도 있다만 굳이 거기 앉는 이유가 뭐냐능?”

그때, 어딘가 신경질적이고 고압적인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튀어나왔다. 라라는 떨떠름하게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로브 속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카를라히에게 닿자, 카를라히는 갈라진 입술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 잔뜩 벼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능.”

‘자그마치 보름을 기다렸다, 이 가짜 새끼야…….’

자신의 계정을 해킹해서 자신인 척하고 썸녀에게 들이댔다고 생각한다면 그 어떤 인간도 이 만남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의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해소하려는지 카를라히의 입에선 거르지 않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 친한 지인분께 들러붙은 건지는 몰라도 이것도 오늘로 끝이라능. 그동안 재밌었냐능? 네놈 목적과 신상, 죄다 파헤쳐질 준비는 됐겠지? 그보다 보통 4인석이면 남자는 남자끼리 앉아야 하는 거 아니냐능?”

“…….”

“애인도 아니고, 굳이 라라 곁에 앉으려 하냐능? 아, 혹시 그거냐능? 라라에게 관심이 있냐능? 그래서 혹시라도 팔꿈치에 라라의 몸이 닿지 않을까 기대하고 붙어 앉은 거라능? 개새끼가 라라의 몸에 관심이 있냐능?”

“…….”

“아, 물론 농담이라능. 하하. 분위기 죽창내지 말고 웃으라능. 농담이라고 하지 않았냐능?”

“…아니, 저기 라히?”

라라는 살벌함이 흐르는 공간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라히가 낯설게 느껴졌다. 시체 수집이라느니, 폭군이라느니, 피규어라느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애써 지워낸 사실들이 현재 거칠어진 라히의 생소한 모습에 다시 떠올랐다.

“이봐, 말 못 하냐능? 그보다 내가 내 옆에 앉으라고 하지 않았냐능.”

“…그만― 그만하세요.”

손을 들어 급히 둘 사이에 끼어든 라라는 중재에 나섰다. 다행히 존잘님이 가만히 계셔서 험악한 몸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말려야만 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세요… 라히. 오늘은 아무래도 쉬셔야 될 것 같아요. 스트레스 많이 받으신 거 같은데.”

“왜 나를 보내려 하냐능? 저 자식이 가야지, 왜 나를……? 아, 나랑 같이 나가자는 뜻이었냐능. 미안하다능, 내가 알아듣지 못해서.”

“아뇨, 가야 되는 건 라히예요.”

카를라히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듯 라라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외면하듯이 고개를 내린 그녀는 가짜 로브신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라.”

어째서 그녀의 시선이, 마음이, 다 저 가짜에게 간 것만 같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좌절감에 온몸의 힘이 빠졌으나 반대로 그의 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절박한 심리 상태 그대로 카를라히의 손은 솔직하게 라라에게 가있었다.

그는 강제로 라라의 손목을 붙잡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린 릴리카 미니 피규어를 그녀가 볼 수 있게 내밀고 있었다. 라라가 생일 선물로 줬던 그 피규어였다.

이걸 품에 넣고 다니다니, 역시 시체 수집하는 폭군이란 건가. 라라가 가늘게 눈을 뜬 채 피규어를 내려다볼 때였다. 카를라히의 목소리가 닿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친애하는지, 알고 있지 않냐능? 저 가짜보다 우리 사이가 더 가까운 게 아니었냐능? 어째서……. 진짜는 난데, 너와 진심인 관계는 바로 난데.”

“아, 알겠으니까 이제 돌아가세요. 제발, 라히.”

“네가 이걸 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능. 네가 날 얼마나 깊이 생각해 주는지 알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던지. 라라, 그러니까 나를 보내선 안 된다능. 네가 보내야 될 상대는…….”

“그거 가지고 가라니까요!”

라라는 자꾸만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카를라히의 손을 세게 탁, 내쳤다. 동시에 그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던 미니 피규어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녀로서도 참을 만큼 참은 상태였다. 제가 폭군이든지! 시체 수집가든지! 처음엔 클리셰대로 가면 어쩌나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그동안의 정이 있으니 좋게 넘어가려 했으나 도저히 구질구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라히가 이런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동안 사람 좋은 척 연기했던 거예요?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실 줄이야! 제 지인님께 사과할 거 아니면 그냥 가세욧!”

새침하게 눈을 뜨고선 쏘아붙이던 라라는 조용히 몸을 숙이는 카를라히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그놈의 피규어를 제 앞에 내밀고서 안 간다고 버티면 창밖으로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그럼 줍기 위해서라도 찻집을 뛰쳐나가겠지.

그러나 라라의 예상과는 달리 카를라히는 한쪽 무릎을 꿇어 피규어를 집어 들고는 그대로 작은 피규어를 두 손에 감싸 쥘 뿐이었다. 뒤늦게 그의 안경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라라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무려 울고 있었다. 폭군이라는 남자가 작은 피규어를 소중한 듯 꼬옥 쥐고서 서럽게 말이다.

“왜, 왜 울고 그래요. 혹시 부서졌어요……? 미안해요, 다시 사 줄 테니까…….”

“미안하다능…….”

“…네? 그보다 얼른 일어나요. 사람들 보잖아요.”

“…나만 소중하다고 생각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이 피규어가 너무 좋아서 그만. 이걸 보여주면 라라 너도 내 진심을… 알아줄 거라… 그리 생각하고, 저지른 행동이었다.”

카를라히는 뿌옇게 눈물이 어린 눈으로 피규어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지인님이 준 선물엔 작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안도할 만한 일인가 싶으니 그의 입술이 어이없어 살짝 올라갔다.

자신은 이미 지인님께 미움받아 버렸는데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가 심하게 자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와 같이 다정한 목소리였다.

“후후, 라히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죠. 피규어 하나 때문에 울다니 역시 전설의 덕후답네요.”

“아…….”

카를라히는 고개를 들었다. 가짜 로브신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지인님만이 세상에 가득 차 보일 뿐.

“저도 심하게… 대해서 죄송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뚝 그치시고 나가요, 라히. 저도 같이 나갈 테니까.”

“알겠다능……. 사랑한다능. 지인님, 제가 많이 사랑해요.”

말 끝나기 무섭게 눈물을 그친 카를라히는 흘러내리려는 안경 뒤에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걸러지지 않고 순수하게 튀어 나간 말이었다.

현재 두 사람은 카를라히의 덕질용 비밀 저택에 와있었다. 아무래도 덕질을 하려면 이곳이 제일 나았으므로.

“이 한정 굿즈 머그 컵 꼭 보여주고 싶었다능? 물론 쓰진 못하지만. 저번에 라라 네게 선물 받았던 굿즈들도 아까워서 차마 쓸 수가 없다능. 그것보다 이거 보라능. 얼마나 영롱하게 빛이 나는지, 하앍.”

투명한 유리에 그의 입김이 뿌옇게 어렸다 사라졌다. 라라가 유리 찬장 너머에 소중하게 진열되어 있는 굿즈들을 훑는 동안 카를라히는 그녀의 옆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떠들어 대었다. 아까 질질 짜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이번에 발매된다는 로브신사 굿즈 소식 들었냐능?”

“아뇨? 로브신사 굿즈 새로 발매돼요?”

“그렇다능. 어제저녁에 발표된 따끈따끈한 소식이라능. 무려 여심 공략 찻잔 세트라능. 로브신사 실루엣이 새겨진 티 포트랑 찻잔, 티스푼 구성이라능. 한정 판매로 10일 후부터 예약 들어갈 거라능.”

“꺄악, 정보 감사해요! 저 꼭 살 거예요!”

카를라히는 흥분한 라라를 뿌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역시 업무 중에도 틈틈이 로브신사 정보를 알아보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아, 혹시 로브신사 굿즈 중에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달라능. 오늘 너무 추태 부린 것에 대한 사과라능……. 헤헤.”

뒷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하는 카를라히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라라는 슬며시 운을 뗐다.

“그보다 라히,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응? 뭐냐능? 뭐든 말만 하라능.”

“심각한 일은 아니고 조금 걸려서요. 아까 존잘님한테 가짜라고 했잖아요? 진짜는 자신이라고, 그게 대체…….”

“아… 그, 그게.”

카를라히는 뜨끔하고 눈을 굴렸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었던가. 너무 흥분한 상태로 속에 있는 말을 내뱉었던지라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뜸을 들이고 있을 때, 작은 손이 다가와 그의 두꺼운 안경을 벗겼다.

“제 시선 피하지 말고요. 저한테 뭐 숨기는 거라도 있어요?”

안경이 사라지고 어느새 제 시야에 라라가 가득 들어차자 카를라히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알 수 없는 침묵이 깔리며 자신의 미칠 듯이 뛰는 심장 박동 소리만이 크게 들려왔다.

“…그, 너무 가깝지 않냐능.”

“아, 아! 죄송해요…….”

“미안할 것까지야……. 그냥, 좀.”

‘지인님을 똑바로 못 쳐다보겠어.’

홧홧 안면이 달아오르자 카를라히는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비끼듯 내렸다. 가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역시 오늘은 라라 네 말대로 쉬어야 될 것 같다능. 그… 같이 있어준다고 했는데 미안하다능. 마차는…….”

“아, 제가 나가서 잡을게요. 어차피 오후에는 다과회에 참석하기로 해서 괜찮아요.”

“그렇냐능.”

좀 더 함께 있고 싶다, 카를라히는 애써 아쉬운 마음을 숨기기 위해 미소 지었다. 나가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서던 그는 퍼뜩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맞다. 다음 주 사냥 대회에 같이…….’

사냥 대회에서 활약하는 제 모습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카를라히는 문을 열고 나서는 라라를 다급하게 불렀다.

“라라!”

라라가 멈춰서 뒤를 돌아보자 그는 다시금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러 사냥 대회에 와달라는 것은 너무 속셈이 뻔하지 않을까. 수코나 온리전도 아니고, 분명 지루할 것이다. 애당초 그녀의 입장에선 이런 개인적인 약속은 부담스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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