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감정… 감정.’
물론 닭똥 같은 눈물을 계속 흘리기 위해선 감정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김빙의는 언젠가 본 눈물 참기 챌린지 영상을 머릿속에서 수십 번 재생시켰다.
“어라… 헤헤, 이상하다. 먼지가 들어갔나 봐요.”
하지만 메소드 연기를 펼친 엘리나2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을 땐 그녀를 안아줄 든든한 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칫, 그새 튀었나? 그래도 뭐 됐어! 어차피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있으니까.’
김빙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물로 번진 마스카라로 인해 얼굴은 괴상하게 변한 지 오래였다.
* * *
카를라히는 씹덕후 변장을 하고 황궁 밖에 나와있었다. 탄신 무도회 이후로 줄곧 일에 치여 살았던지라 자유를 얻은 것은 일주일 만이었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 어느 찻집에 들어선 그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라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라, 오랜만이라능. 그간 잘 지냈냐능?”
“저야 늘 잘 지내죠. 호호.”
자신의 정체를 안 이후에도 한결같이 저를 대해주는 그녀의 태도에 카를라히는 새삼스레 마음이 따스해졌다. 라라를 마주하고 앉은 그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드레스 차림이 평소보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코랄색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하얀 귀걸이도, 어딘가 수줍게 떠오른 뺨도, 입술 색도 그녀와 최적화되어 있었다.
‘…지인님 오늘 예쁘시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그녀를 너무 빤히 응시했다는 것을 눈치챈 카를라히는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괜히 크게 울렸을까 봐 신경 쓰였다.
‘왜 이러지. 그보다 무슨 말을 꺼내야…….’
카를라히는 미약하게 인상을 쓰다가 일주일 전부터 벼르던 이야기를 꺼냈다.
“라라, ‘내가 바로 선택받은 온리전!’ 주최 소식 들었냐능?”
‘내가 바로 선택받은 온리전!’은 마법소녀 릴리카 온리전 이름으로, 회지와 동인 굿즈를 판매하는 판매전이다. 아무래도 수도 내에서 가장 주최 규모가 큰 온리전이다 보니 저번 주와 이번 주, 이렇게 2주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주가 마지막이었다.
저번 주는 바빠서 라라를 만날 수 있기는커녕 온리전에 갈 시간조차 없었지만 이번 주는 완벽하게 스케줄을 비워두고 있었다. 언제든 라라의 시간에 맞춰 함께 가기 위해서 말이다.
“마법소녀 릴리카 온리전 이번 주가 마지막이라능. 당연히 같이…….”
“물론, 당연히 다녀왔죠!”
라라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뜻밖의 대답에 카를라히가 잠시 굳어있을 때 그녀는 가져온 휴대용 가방을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서 온리전에서 사 온 동인 굿즈들을 펼쳐놓았다.
“이거랑 이거랑 이거는 릴리카 엽서고요, 이거랑 이거는 회지, 이거랑 이거는 미니 쿠션, 이거는 열쇠고리, 이거는…….”
“그게 다 뭐냐능?”
“뭐긴 뭐예요, 라히 주려고 가져온 선물이죠. 라히라면 진즉에 지난주에 다녀왔을 줄 알았는데 많이 바쁘셨나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유메르 님 신간 한 권 더 사 올 걸 그랬어요.”
“…아, 생각해 줘서 고맙다능. 너무 기쁘다능.”
카를라히는 섭섭함을 느낄 틈도 없이 감격에 차 자신 앞에 내밀어진 굿즈들을 훑어보았다. 비록 그녀와 함께 가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래도 그녀가 자신을 생각해 사 왔다는 것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래, 이건 행복이었다.
애당초 그녀가 먼저 갔다 왔을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왜 자신은 당연하게 그녀와 같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왜 그녀가 당연하게 저를 기다려 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자만했다.
카를라히가 속으로 스스로를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동안, 라라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라히랑 같이 갔어도 재밌을 텐데, 아쉬워요. 아는 지인분이 먼저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아마 라히랑 같이 갔을 거예요.”
“…아는 지인?”
“아, 네! 말씀드렸던가요? 최근에 저 로브신사 코스어님이랑 알게 됐는데요. 이번에 간 온리전도 그분이랑 같이 간 거였어요.”
‘아는 지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 그 가짜가 떠오르긴 했으나, 역시나였다. 카를라히는 왠지 모르게 속이 싸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릴리카를 더 좋아할 뿐 로브신사도 좋아하는 자신일 텐데 이제는 ‘로브신사’라는 단어 자체가 지뢰가 될 것만 같았다.
“그분이 엄청난 존잘님이시거든요. 그래서 이번 행사에서 로브신사 코스 스태프로 활동한 거 있죠? 제 입장권도 얻어다 주셔서 얼마나 감사하던지. 아! 존잘님께 한번 남은 입장권 있나 물어볼게요. 라히도 다녀올 거죠?”
“…….”
“…라히?”
라라는 이상하게 맞은편이 조용하자 그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안경알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저조해져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때 열리지 않을 것같이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 열렸다.
“…라라, 그 지인이라는 로브신사 코스어와 만나게 해줄 수 있겠냐능?”
“네? 아, 당연하죠. 안 그래도 소개시켜 드리고 싶었거든요. 분명 셋이서 만나면 재밌을 거예요!”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듯이 라라는 활짝 미소 지었다.
* * *
카를라히는 최근 들어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틀 전 라라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무엇이 이토록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건지 그 자신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카를라히는 인정하지 않았다.
‘…집착? 독점욕? 아니아니… 내가 그런 추잡스러운 남자일 리 없다.’
고개를 저으며 카를라히는 몸을 뒤로 기댔다. 서걱서걱, 가직한 곳에서 들려오는 펜 소리에 그는 넌지시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업무 책상에 앉아서 무언가를 거칠게 휘갈겨 쓰고 있는 디체스가 보였다.
“엘리나1! 나를 돌아보게 만들겠습니다! 하하하, 창작의 욕구가 마구 샘솟는군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서 엘리나1이 뼈저리게 후회를 하게 되고, 내가 여기서 이렇게 해서……!”
‘그래, 내가 저 집착남과 동급일 리가 없지.’
카를라히는 미미하게 인상을 쓰며 디체스를 바라보았다. 조만간 쾅, 소리와 함께 디체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까만 글자로 가득 채워진 원고지를 높이 쳐들고서 그는 만족스럽다는 양 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 제가 밤낮을 지새워 탄생시킨 희대의 명작입니다. 읽어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이지?”
“아름다운 공작꽃, 후회물 소설입니다. 후회물이 인기라고 해서 한번 써봤습니다.”
디체스는 능력 있는 사무관답게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사랑을 하는 동안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공작 디체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 엘리나1에게 차이고 폐인 생활에 들어갑니다. 이때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서브 여주이자 다정벤츠녀 엘리나2가 그를 위로해 주며 다가옵니다. 즉, 새 사랑이 찾아온 겁니다. 그리고 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똥차인 엘리나1 앞에서 보여줌으로써 공작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렇군. 업무는 안 하고 이딴 거나 써재끼고 있었단 말인가?”
카를라히는 턱 아래를 느른하게 쓸며 눈을 깊이 감았다 떴다. 푸른 눈동자엔 서리보다 차가운 분노가 맺혀있었다. 카를라히는 검을 빼 들었다. 동시에 예리한 검 끝이 종이를 꿰뚫고 허공에 멈췄다.
“공작, 목 잘리고 싶나?”
“…역시 폭군 클라쓰 보십시오.”
“직장에서 쫓겨나고 싶냐는 의미로 쓴 것이다. 어디 무서워서 관용구도 못 쓰겠군그래.”
검을 거두며 카를라히가 말했다. 이에 “그렇습니까?” 하고 낮게 대꾸한 디체스는 스윽 등을 돌린 채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쥐고선 아련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붙잡지 않는 것입니까. 디체스는 힘없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젠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집착남도, 당신의 최측근도 아닙니다. 후회 남주로 새롭게 태어났으니 말입니다.”
“후회 남주가 그런 뜻이었나? 후회 남주라고 하기엔 그냥 후회물 쓰는 남주이지 않나……?”
“잠시나마 폐하를 믿었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폐하는 엘리나1과 별반 다르지 않은 똥차입니다.”
“지금 폐차 직전 똥차가 누구보고 똥차라는 거지?”
“반드시 제 진가를 발휘할 날이 오겠죠. 그리고 부디 이날을 뼈저리게 후회하십시오.”
디체스는 현재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짓고서는 문을 열었다.
“후회물 소설의 대가가 되어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몸 건강하시길.”
“아니, 일을 하란 말이다! 일을!!”
격해진 감정과 혈압에 의해 목소리 끝이 갈라진 외침이 들려왔지만 디체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안녕히. 폐하.
* * *
“라히, 요새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이런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좀 받아서…….”
라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를라히를 바라보았다. 변장 중이라고는 하지만 잔뜩 흐트러진 머리와 안경 밑으로 짙게 진 다크서클, 심하게 부르튼 입술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꼭 만성 스트레스를 앓고 있는 사람 같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세요…….”
“라라 네가 위로해 주니 정말 힘이 난다능. 고맙다능.”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이라도 파스스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아련한 모습으로 카를라히는 미소 지었다.
쉬어야 하는 게 아닐까, 라라는 애써 마주 미소 지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존잘님과의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억지로라도 황성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상태가 뭔가 불안정해 보였으니 말이다.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고, 부서질 것만 같은 그런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연신 불안한 눈길로 카를라히의 상태를 살피던 라라는 찻집으로 들어선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아, 여기예요, 존잘님.”
오늘도 거무튀튀한 로브를 뒤집어쓴 채 나타난 로브신사 코스어는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기엔 충분했다.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설정에 충실하게도 그는 묵묵하게 제 옆에 다가와 앉았다. 라라는 웃으며 로브신사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