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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94)화 (94/115)

94화

“…아, 아직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디체스 공작님께서 이번에 가석방되시고 다시 최측근으로 복직하셨습니다.”

집착 소유욕 남주의 복귀였다.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황실 감옥의 뒷문, 한 남성이 걸어 나왔다. 진녹색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사내는 안경알 너머의 세상을 훑었다. 몇 달 만의 풍경이란 말인가. 천천히 흐르는 구름과 흔들리는 나뭇잎, 그리고 그 풍경 끝에 서있는 은발의 여인.

“엘리나1.”

디체스는 한달음에 그녀의 앞으로 달려가 여린 몸을 끌어안았다. 자신을 기다리느라 고생이 많았을 그녀였다.

“역시 그대라면 마중 나와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거 드세요.”

엘리나1은 그에게서 두 발자국 떨어진 채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그 안에 든 하얀 모두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디체스는 자신의 앞에 선 아름다운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은빛으로 찬란히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내내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애인 리올리도, 두 번째 애인 아산드라도, 세 번째 애인 케샨느도, …(생략)…스물한 번째 애인 카트리나도, 스물두 번째 애인 이자일도, …(생략)…일흔다섯 번째 애인 릴리아스도 다 그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그동안 수많은 여인과 관계를 맺어온 디체스였지만 전부 다 얼마 못 가 헤어진 겉치레용 애인에 불과했다. 이토록 자신을 한결같이 바라봐 주고, 자신의 진정한 본모습마저 사랑해 준 여인은 엘리나1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어머니를 애증하여 여성 혐오와 함께 여성 편력이 심했던 이 나이지만,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여인은 그대 하나뿐이라는 걸. 진정 사랑한 여인은 그대 하나뿐이었다는 걸.”

“…아, 디체스.”

엘리나1은 수줍게 볼을 물들였다. 붉게 물든 두 뺨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엘리나1은 유리알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했다.

“알고 있어요……. 아름답고 심성이 곱고 착하며, 어떤 이든 포옹할 줄 알고, 눈물이 많은 감성적인 성격과는 달리 어쩔 땐 똑 부러지며, 현명함도 갖췄으며, 공녀임에도 불구하고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는 여주인공인 저를 어떤 사람이 싫어하겠어요?”

후훗, 하고 엘리나1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조신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저… 이제까지 디체스를 제 인생의 왕자님이라 생각해 오고 있었어요. 하지만 저번에 당신을 찾아갔을 때 모든 환상이 부서져 내렸어요.”

“…엘리나1?”

“저에 비하면 디체스, 당신은 잘생겼지만 심성이 고운 것도 아니고, 남을 집착하고 소유하려 드는 데다, 심지어 저처럼 정조를 지키지도 않았고, 오히려 몸을 엄청나게 굴려대셨고, 그걸 어머니에 대한 애증으로 포장하려 드시고,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빨간 줄이 그어져 계시죠.”

왜 이런 형편없는 남자가 남주인 걸까. 여주는 조금만 민폐여도 마음에 안 든다는 혹평을 받는데, 왜 남주는 방탕해도 인격이 쓰레기여도 남주인 걸까.

“그날 깨달았어요. 당신 하나만의 사랑으로 만족하기엔 전 너무 완벽한 여주라는 걸요. 저처럼 잘생기고, 착하고, 모든 걸 이해해 줄 수 있는 내조 잘하는 남주 정돈 되어야 절 가질 자격이 있지 않겠어요?”

은빛 머리칼을 귓등으로 쓸어 넘기며 엘리나1은 청초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에 얼빠진 채 서있던 디체스는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붙잡았다.

“…어째서, …이 내게도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집착 소유욕 남주라 어쩔 수 없이 집착해야만 했습니다. 아니면, 과거에 이 내가 다른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져서 그런 겁니까? 그 여자들에게는 이제 털끝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러니 나를 떠나지 마십시오.”

“무슨 소리세요, 디체스.”

엘리나1은 그의 굵은 손등 마디를 부드럽게 쓸며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순수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사랑스러운 여인 그 자체였다.

“전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러니 당신도 절 계속 사랑해 주시면 돼요. 절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 돼서요.”

“내 사랑으론 부족하단 겁니까! 말해보십시오.”

“네, 그야 디체스에 비하면 저는 한참 아까운 사람이니까요.”

은빛 날개처럼 긴 속눈썹을 단 눈꼬리가 어여쁘게 휘었다. 주위를 밝히는 환한 미소란 이런 미소를 말하는 것이리라. 엘리나1은 디체스의 손을 놓고서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텅 빈 골목 안에서 디체스는 한동안 얼빠진 얼굴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순 없습니다!! 이럴 순……! 크흡.”

카를라히는 현재 황제 집무실 안에서 들려오는 괴란한 울음소리에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문을 열자 업무 책상에 엎드려 있는 디체스가 보였다. 그 옆에서 하루 할당량의 서류를 갈기갈기 찢고 있던 크리온이 정중히 고개를 들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그보다 체통을 지키지 그러나? 하긴, 공작이 감방에 들어간 것부터가 체통을 잃은 거겠지만.”

“위로는 못 할망정, 너무하십니다.”

팽, 하고 코를 푼 휴지를 카를라히의 안면에다 던진 디체스는 온갖 근심 덩이를 끌어안은 사람처럼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에 팔꿈치를 올려두고서 그는 메마른 두 손으로 눈물범벅인 얼굴을 문질렀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꾹 닫혀있던 디체스의 입술이 스르륵 열렸다.

“온전히 내 것이 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단 말입니다……. 뭣 하러 집착 소유욕 남주 포지션 따윌 맡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주를 독점하고 싶은 건 남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모든 남주들이 다 너 같은 줄 아나.”

괜히 울컥해 버린 디체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를라히를 응시했다.

“한 번도 집착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없다, 적어도 네놈처럼 추하게 여자에게 매달린 적은.”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

갑자기 치고 들어온 말에 카를라히는 한쪽 눈썹을 휙 휘어 올렸다. 그러곤 시치미 떼듯 태연하게 운을 뗐다.

“내가 누굴 좋아한단 말이지?”

“알고 있습니다. 사실 폐하께서는, 저를…….”

“틀렸다.”

들어볼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카를라히는 잠시 자신이 긴장했단 사실조차 잊고서 디체스를 꾸짖었다.

“업무를 하지 않겠다면 나가라. 그리고 내일 다시 나와.”

“크리온 저자는 출근해서 계속 종이만 찢어대는데 왜 저자는 내쫓지 않습니까!”

“저자의 일이 저거다. 괜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 트집 잡지 말고 너나 잘해라.”

매정한 상사의 말에 디체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보도록 하죠.” 하고 사무적으로 내뱉고서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흉흉한 기세로 긴 복도를 가로지르던 디체스는 복도 코너 끝에서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은색 머리칼에 잠시 굳어 섰다.

“…엘리나1?”

디체스는 곧바로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코너를 돌자 멀지 않은 곳에 은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디체스는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디체스… 공작님?”

여인이 뒤를 돌았다. 엘리나1의 드레스를 입고, 엘리나1처럼 하고 있지만 그녀는 다름 아닌 엘리나2였다.

엘리나2는 모르는 황성 안을 의미 없이 뱅뱅 돌기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클리셰대로 길을 잃은 지 1시간 12분 만에 남주와 맞닥뜨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대…였습니까. 붙잡아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길을 잃어서 곤란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후아~”

“방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엘리나1을 대신해 황제의 약혼녀로서 황궁에서 지낸다는 것은 예전에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디체스는 엘리나2와 함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어딘가 무거워 보이는 그의 얼굴에 엘리나2는 순수하게 질문을 던졌다.

“공작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답지 않으세요. 이럴수록 파이팅! 하셔야죠.”

“그것이 실은… 하, 엘리나1 때문에 그럽니다.”

“아… 그러셨군요.”

엘리나2, 김빙의는 아련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당신의 곁에는 지금 내가 있는데 어째서 나와 똑같이 생긴 나의 쌍둥이 언니를 찾으시는 건가요? 한 번만이라도 나를 봐줄 순 없으신가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엘리나2는 알 수 없는 열등감을 숨긴 채 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헤헤, 엘리나1은 예쁘죠? 저와는 다르게 생각도 깊고, 절약 정신도 투철하고, 세상에 그런 공녀가 또 어딨겠어요.”

“맞습니다. 그런 여인을 독차지하는 것이야말로 남주라고 생각했는데… 독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엘리나1도 다시 돌아올 거예요. 아니,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엘리나2는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에 디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엘리나2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에 차 얘기했다.

“공작님두 참, 뭘 모르시네요, 후후! 요즘에는 후회물 소설이 대세인걸요?”

“후회물… 말입니까?”

“네. 말 그대로 후회하게 만드는 거예요, 엘리나1을!”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디체스가 멍하니 서있는 동안 엘리나2는 약간 머뭇대며 볼을 긁적였다.

“그러니까 저를 이용해서 엘리나1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어떨까요?”

“…….”

“저 괜찮아요. 이용만 당하더라도…, 엘리나1과 이렇게 같은 얼굴로 태어난 것도 이유가 있는 거겠죠. 공작님과 제가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분명 엘리나1도 질투를 느끼겠죠. 엘리나1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땐 저한테 한턱내셔야 해요?! 헤헷, 어라……? 왜 갑자기 눈물이.”

엘리나2는 고개를 숙인 채 갑자기 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이상한 듯 내려다보았다. 쌍둥이 언니의 대용품을 자처하는 활발한 여주라니, 속으로는 언니와 비교당해 오면서 쌓인 열등감을 안고 있으면서 말이다. 어떤 남주라도 이 모습에 애처로움을 느낄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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