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로잘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노에 의해 붉게 물든 낯을 반대로 이용해 마치 첫날밤에 수줍어하는 여인 같은 얼굴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한 손은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은 그의 옷깃을 붙잡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먼저 씻으실래요?”
“목욕 싫습니다!!”
격렬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줄행랑을 치려는 크리온을 로잘리는 가까스로 붙들었다.
“아, 이상한 의미는 절대 아니었어요. 절대로……! 씻고 싶지 않다면 씻지 않아도 좋아요! 크리온! 제발, 진정해요.”
“…목욕 싫습니다.”
“네, 안 시킬게요. 약속할게요.”
제자리에 서서 경계하듯이 바짝 어깨를 세운 남자를 로잘리는 질린 듯이 응시했다.
“밤이 늦었어요. 오늘 하룻밤은 여기서 자고 가세요.”
너무 개 같아서 짜증 나기는 하지만, 개 같은 대형견 남주이기에 오히려 이건 기회였다. 자신같이 매혹적인 여인과 한 침대를 쓰는데 발정이 안 날 리가 없었다. 로잘리는 크리온의 옷을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그를 침대로 불러들였다. 완벽한 유혹이었다.
‘자, 본능에 충실해져 봐, 멍멍아. 사정없이 덤벼들어 보라고!’
로잘리는 야릇한 미소를 지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을 맞춰오는 입술은 없었다. 침대 위가 조용해지자 로잘리는 슬쩍 눈을 떴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 몸 위에 있던 남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로잘리의 시야에 그녀의 발밑에서 웅크려 자고 있는 거대한 금발 남자가 들어왔다. 그녀와의 친밀도가 아직 낮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 * *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 한복판에 라라는 서있었다. 그가 언제 올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라라의 시야에 어느 사내가 들어왔다.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등장한 남자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자신의 앞에 멈춰 섰다.
“학, 존잘님, 오늘도 멋지시네요. 하앍.”
라라는 두 손을 말아 쥐고 거칠게 숨을 내뿜었다. 밤에 봤을 때도 멋있었지만 대낮에 보니 퀄이 상당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망토 자락은 만화를 찢고 나온 것만 같았다.
라라는 그와 함께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마차를 타도 되겠지만 그러면 그와 있을 시간이 줄어들까 봐 라라는 나란히 걷기를 택했다. 코스프레라 눈에 띄긴 했지만 같은 덕후가 아닌 이상 알아볼 리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남의 시선은 들어오지 않을 만큼 라라는 현재 들떠있었다.
‘존잘님과 첫 데이트라니, 하아… 죽어도 좋아.’
그가 발코니에 찾아온 날, 설마 그날의 만남이 이런 식으로 바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데이트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가 제게 건넨 쪽지에는 장소와 시간이 적혀있었다. 바로 오늘 낮, 이곳 수도 고급 상점가에서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기대해 버린 라라가 한 시간 먼저 와서 기다린 꼴이 되었지만, 그만큼 라라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존잘님은 마법소녀 릴리카에서 어떤 커플 파세요? 헤테로? GL? BL? 저는 지뢰는 거의 없는 편인데요. 일단 공식 커플 위주로 파는 편이에요. 로브신사X릴리카 케미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죠?! 그 마법소녀 릴리카 공식 캐릭터 설정 북에서 로브신사의 과거 설정이라든지, 아 정말정말 파면 팔수록 좋아진달까, 인생 본진이랄까요.”
“…….”
“일부러 그런 장면을 연출했다는 건 아무래도 두 사람의 관계를 더 돋보이려 한 게 분명해요. 아, 근데 존잘님은 최애가 누구세요? 로브신사 코스어이시니까 로브신사가 최애신가요? 로브신사 과거편 진짜 끝내주지 않았어요? 하앍하앍, 저 그 편에 엄청 치였잖아요……. 넘 멋진 거 있죠. 아, 일단 저기 들어갈까요?”
라라는 은백색의 고급스러운 2층 석조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입구부터가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 화원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갖가지 아름다운 꽃향기가 맡아졌다.
“정말 예쁘네요. 저 꽃도요.”
이제야 좀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가 나오는 건가. 로브 속에 감춰진 연한 푸른빛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역시 꽃이라 하면 에로디스의 꽃이죠. 봉인 장미, 하앍… 처음엔 이 봉인 장미를 사이에 두고 로브신사와 릴리카가 라이벌 구도로 그려지잖아요? 그때도 캐미가 너무 죽여줬었어요. 하앍, 그 케미는 웬만한 연애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쫄깃한 맛이 있다니까요. 다시 볼 때마다 얼마나 설레는지.”
새하얀 데이지꽃을 한 송이 집어 든 라라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보던 로브신사가 곧 손을 움직여 근처에 있던 푸른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딱딱한 손끝이 세심하게 귓등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 후 꽃을 꽂아준 것은 한순간이었다.
잠시 놀라있던 라라는 곧 눈을 부릅 하고 치떴다.
“이 장면, 『마법소녀 릴리카 6권』에 나왔던 그 전설의 장면을 따라 한 거죠?! 꺄악! 세상에, 로브신사 존잘님께서 이 장면을 재연해 주실 줄이야! 이 꽃 가보로 간직할게요, 끄흐읇.”
“…….”
아닌데. 손을 내리며 로브신사, 아니 미하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같은 자국어로 얘기하는 중일 텐데 그녀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아듣는다 해도 그녀를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마법소녀 릴리카가 만화라는 건 알지만 이렇게 열광할 만한 내용인 건지, 그 작중 인물은 어차피 픽션일 텐데 어째서 이렇게 몰입하는 건지. 엄연한 일반인인 미하일로서는 공감 능력이 지극히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습으로라도 너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해, 라라.’
마력으로 로브신사의 겉모습을 완벽하게 재연해 내는 것은 쉬웠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마력 껍데기에 반해있는 것이지만 미하일은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와 단둘이 있는 이 상황이 그로 하여금 황제로부터 그녀를 완전하게 얻었다는 희열을 느끼게 만들었다. 물론 뭐라는지 좀 알아들었으면 좋겠지만.
“다케우리 히나코 작가님은 정말 천재이신 것 같아요! 만화라는 개념이 없는 이 세계에 처음으로 만화를 탄생시킨 희대의 천재 작가! 하지만 한 번도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으셨죠. 54화에 실렸던 인터뷰 코너에서…(생략)…정말 뵙고 싶은데 말이죠. 현재의 마법소녀물의 시초이자 모든 2차계의 존경의 대상이랄까요!”
“…….”
원래 이렇게나 말이 많은 성격이었던가. 미하일은 알지 못했다. 아무리 평소 조용한 사람도 자신의 장르를 얘기할 때는 방언 터지듯 말이 나온다는 것을.
사이좋게 거리를 걷던 라라와 미하일은 길거리 중앙에 멈춰있는 작은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천막을 친 마차 안에선 무언가를 파는지 손님이 들어갔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포장마차였다.
“저기서 뭐 파나 봐요. 한번 가봐요.”
미하일이 로브 속에서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라라는 곧장 가벼운 발걸음으로 포장마차로 향했다. 포장마차의 천막 위에는 웬 커다란 문구가 붙어있었다.
[몸에 좋은 흑임자와 검은콩이 들어간 웰빙 ‘흑붕어빵’]
“흑붕어빵? 새로 나온 건가 봐요. 저기, 흑붕어빵 3천 원어치 주세요.”
“네! 어서 오십쇼!”
“…어라? 당신은?”
라라는 포장마차 안에서 붕어빵 틀에 검은 반죽을 붓고 있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로 길게 내려오는 그는 다름 아닌 마왕 페레우스였다.
“페레우스 씨? 투잡도 하시는 거예요?”
“오랜만이군요. 사실은 그게… 직장을 그만뒀습니다. 하하.”
“네? 그만두다니요?”
“최근에 과로를 한 탓인지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났거든요.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잠에서 깨면 항상 다른 곳에서 눈을 뜹니다. 그리고 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 말로는 제가 오글거리는 행동을 했다고 하더군요.”
“헉… 그 정도면 몽유병 아닌가요?”
“…예전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어서 병원에 가봤는데 병원에서는 뇌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대신 자아가 두 개일 가능성이 있다고 정신과를 추천해 줬었죠.”
“…아, 뇌에는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네요.”
모니카에게 프라이팬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아 후유증이 남은 것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라라는 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페레우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런 몸 상태로 계속 황성에 다니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사직서를 쓰고 나왔습니다. 당분간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건강 관리에 힘쓸 생각이었습니다만…….”
페레우스는 말끝을 흐렸다. 어느새 눈빛은 어두워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제 집(마왕성)의 소유자가 바뀌었다고 그러더군요.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내몰리게 됐죠, 뭐. 하하… 돈은 벌어둔 게 조금 있어서 당장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앞으로 살아가려면 뭐라도 시작해야 했습니다.”
“아, 그래서…….”
“네, 얼마 안 되는 자본금으로 시작한 게 이 장사입니다. 하하, 마침 흑화라는 창업 아이디어가 있어서 기존의 붕어빵을 흑화시켜 봤습니다. 건강과 맛 둘 다 잡은 거죠.”
그렇게 말하는 그는 표정이 한층 밝아 보였다. 퇴사하고 이제 막 새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 젊은 창업주는 현재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 장사가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하하,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고요. 그땐 왜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 악착같이 회사를 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남들이 보기엔 조금 불안해 보이는 길일지는 몰라도 전 지금 이 길에 만족한답니다.”
“멋있으세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하하, 부끄럽군요.”
긴 호선을 그린 붉은 입술에서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났다. 페레우스는 붕어빵 겉면이 타지 않게 일일이 붕어빵 틀을 뒤집었다. 빠른 손놀림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라라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럼, 지금 페레우스 씨의 업무는 누가 담당하고 있는 거죠? 새로운 분을 뽑으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