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카를라히가 자리에 앉자 자신의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선물 상자가 보였다. 하나는 은색 포장지에 은색 리본이 묶여있었고, 다른 하나는 붉은 포장지에 새빨간 리본이 묶여있었다.
“저것들은 누가 보내온 것이지?”
“그것이 수취인만 적혀있을 뿐, 누가 보내온 것인지는 적혀있지 않아 따로 빼둔 것입니다.”
황실 시종의 대답에 카를라히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선 손가락을 까딱였다.
“열어보아라.”
황실 시종은 먼저 은빛으로 반짝이는 선물 상자를 개봉했다. 안에는 자수가 놓인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서툰 솜씨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것이 분명했다. 황실 시종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천천히 손수건을 살폈다.
“어떤 중학생인지는 모르겠사오나 가정 수행 평가를 실수로 넣어 보낸 듯합니다.”
“그거 큰일이군. 전국에 알려라. 가정 수행 평가에 제출할 손수건을 잃어버린 학생을 황궁에서 찾는다고 말이지.”
“네, 알겠사옵니다.”
다음에 개봉된 붉은 선물 상자 안에는 서툰 뜨개질 솜씨로 완성된 목도리가 들어있었다. 황궁 시종은 목도리를 살피고서는 천천히 자신의 소견을 입 밖으로 내었다.
“어떤 중학생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이번에도 가정 수행 평가로 제출할 목도리를 잘못 보낸 듯합니다. 아마 수행 평가 과제가 다른 것이 다른 중학교인 것 같습니다.”
“한 명도 아니고 둘씩이나. 가정 수행 평가의 제출 시기를 놓치면 어떻게 되지?”
“그것이 아마도 최하점……. 기말고사와 합산하여 점수를 내니 내신에 영향이 갈 게 분명합니다.”
“그것참, 큰일이군. 전국에 알려라. 가정 수행 평가에 제출할 손수건과 목도리를 잃어버린 두 학생을 황궁에서 찾는다고 말이지.”
“네, 알겠사옵니다.”
시종이 두 상자를 동시에 들고 나가는 것을 멀리서 목격한 로잘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마음에 든 선물을 자신의 방으로 따로 옮겨놓으라고 지시한 것 같았다. 제 것과 함께 옮겨지는 은색 상자를 본 로잘리는 입술을 깨무는 힘에 더 힘을 실었다.
‘무승부인가……. 빙의 년 제법이잖아?’
로잘리는 붉은 입술을 휘어 올렸다. 하지만 남주는 황제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제가 하늘을 보고 짖었더니 근처 나무에서 그자가 떨어졌습니다. 다람쥐라고 하는 자더군요. 그자는 굉장히 몸집이 작고 날래서 쫓는 동안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아, 실례. 영애께서 듣기엔 많이 지루한 얘기가 아니었을까 싶군요.”
“그런! 전혀 아니에요. 크리온 님은 정말 재밌는 분이신 것 같아요.”
뭔 개소리야. 방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던 로잘리였지만 금세 능숙하게 표정 연기에 들어갔다. 붉은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로잘리는 정말 순수하게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착해진 악녀 여주’를 연기했다.
“그, 더 얘기를 듣고 싶어요! 오늘 밤 저희 저택에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물론 불편하시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으세요.”
“알겠습니다.”
젊은 나이에 황제의 최최최측근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사내였다. 뭐가 뛰어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주 중 하나인 만큼 미리 사로잡아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이 자를 통해서 황성을 들락날락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말이다.
회장 안의 분위기가 달궈지기 시작하자 카를라히는 남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재킷 안에 손을 넣어 피규어를 만지작거렸다. 따뜻했다. 마치 생명이 깃든 것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피규어란 얼마나 작고 애틋한 존재란 말인가. 카를라히는 아무도 없는지 살피고선 피규어를 꺼내어 피규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뭔가 부족하군.’
마음 같아선 자신에게 이런 귀중한 선물을 준 그녀의 이마에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라라가 당혹스러워하겠지. 카를라히는 다시 소중히 피규어를 품 안에 넣고 서둘러 발코니로 향하는 걸음을 빨리했다. 얼른 가서 라라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라라?”
하지만 도착한 발코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를라히는 발코니 안을 둘러보다가 테이블 위에 붙여져 있는 메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라의 필체였다.
[라히에게.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서 먼저 돌아가 볼게요ㅜㅜ 그리고 오늘 생일 축하해요. 즐겁게 보내세요! ―라라]
카를라히의 눈에는 뒤 문장은 들어오지 않았다. 갑자기 속이 안 좋다니, 많이 안 좋은 걸까. 상한 음식이라도 먹은 게 아닐까. 그럼 큰일이 아닌가. 의원에게 상태를 보였을까. 그냥 잤다가 내일 더 심하게 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모두 그녀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급히 발을 돌려 발코니를 나갔다. 한번 그녀를 보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딱 상태만 보고 오자. 그래야 자신의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무도회장을 몰래 빠져나온 그는 씹덕후 차림으로 갈아입고 바로 마차에 올랐다.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창밖 풍경이 오늘따라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조급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카를라히는 입술만 조용히 깨물었다.
이윽고 도착한 슈모르드 자작저 앞에서 마차를 내린 그는 부러 뒷문을 찾아 들어섰다. 불이 꺼진 저택은 조용했다. 달빛에 의지해 저택 외벽을 따라 걷던 카를라히는 작은 정원에 들어섰다. 풀을 밟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 정도로 선명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카를라히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보고 싶었어요. 왜 이제까지 안 나타나신 거예요?”
라라의 목소리를 따라간 시선 끝에는 2층 발코니가 있었다. 편한 원피스 차림의 라라가 발코니 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줍은 표정으로 볼을 붉히고 있고, 그런 그녀의 앞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새카만 로브 자락이 밤바람을 맞고 펄럭거렸다. 그것은 단순한 로브가 아니었다. 로브신사의 로브를 똑같이 재연해 낸 로브였다.
“어떻게 하면 뵐 수 있을까 수코 소식도 찾아보고 그랬단 말이에요.”
“…….”
“역시 말씀이 없으신 건 여전하시네요. 후훗, 그거죠? 정체를 들켜선 안 되는? 저번에 제 발코니에 하얀 장미 꽃다발을 놓고 가셨을 땐 정말정말 감동받았어요…….”
‘그자가 아니야…….’
몸을 배배 꼬며 감사의 말을 전하는 라라를 멀리서 지켜보는 카를라히는 장이 다 배배 꼬일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카를라히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간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증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비밀을 그녀에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저자가 무슨 목적으로 로브신사 코스를 하고 라라에게 접근한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자신이 나서는 것은…….
“고마워요, 로브신사 존잘님.”
라라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이에 가짜의 손이 유연하게 움직여 그녀의 뺨에 닿았다. 바짝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카를라히는 근처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집어 들어 힘껏 던졌다.
툭, 하고 로브신사의 등을 맞고 떨어진 도토리를 발견한 라라가 몸을 쭈그려 앉아 도토리를 집어 들었다.
“아, 다람쥐인가 봐요. 귀여워라.”
“…….”
“다람쥐 안 좋아하세요?”
라라의 물음에 로브신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로부터 등을 돌린 후 1층 정원의 한 곳을 뚫어져라 노려볼 뿐이었다.
* * *
무도회장을 채우고 있던 귀족들은 새벽이 되자 하나둘 모습을 감추었다. 대부분 눈이 맞은 남녀들이었다. 그중에는 로잘리와 크리온도 포함되어 있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에 거대한 체구, 그리고 부드러운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그야말로 대형견 남주에 걸맞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겉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도 대형견스러웠다. 마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도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 댔다.
소파 가죽을 손톱으로 파바바박 긁는다든지,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큰 목소리로 “사람입니다! 보입니까!!” 하고 크게 외친다든지. 아무튼 정신없었다.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크리온은 가장 먼저 마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저택을 향해 내달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로잘리도 뒤따라 허겁지겁 뛰어야만 했다. 개 산책을 시키고 돌아온 것처럼 지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로잘리가 저택에 들어서자 벽기둥에 코를 묻고 있던 크리온이 고개를 들었다.
“목이 마릅니다. 영애, 어서 제게 물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크리온은 뭐랄까, 정말 활기가 넘치시는 것 같네요……. 헤헤, 일단 제 방으로 갈까요?”
“알겠습니다.”
자연스레 방으로 유도하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아무래도 개 한 마리를 집에 들인 기분이었다.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금발의 남자를 힐끗 올려다보며 로잘리는 속으로 온갖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이윽고 방에 도착한 그녀는 크리온을 돌아보며 순수함을 가득 담아 싱긋 웃어 보였다.
“물 따라드릴 테니 앉아계세요.”
“네.”
“아니, 바닥 말고요.”
“네.”
크리온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곧 침대 이불을 긁는 모양인지 파바바박 하는 소리가 울렸지만 로잘리는 아예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으므로. 대신 물 주전자를 들어 적당히 잔에 물을 따른 후 그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정중한 손길로 잔을 건네받은 그가 입으로 잔을 가져갔다. 곧이어 혓바닥으로 물을 튕겨서 입에 머금는 그를 로잘리는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쩌지, 죽일까. 멀지 않은 곳에 아침 식사에 사용했던 버터를 바르는 용도의 나이프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나이프를 들고 휘두르려는 그녀를 막은 것은 다름 아닌 크리온의 목소리였다.
“화장실은 어디입니까?”
“저기예요. 침실 안쪽이요.”
힘겹게 충동을 억누르고서 로잘리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마주 웃어주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잠시 영역 표시 좀 하고 오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보다 저, 저기, 크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