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91)화 (91/115)

91화

라라는 아니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카를라히는 기절까지 한 주제에 전혀 아프지 않았다느니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말이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서 생긋 웃어버렸다.

“아, 이거 생일 선물이에요. 생일 축하해요, 라히.”

“뭘 이런 걸 다……. 안 챙겨줘도 되는데 고맙군.”

“열어봐도 돼요.”

작은 선물 상자를 조심스레 건네받은 카를라히는 그 자리에서 리본을 풀기 시작했다. 상자를 열어 안을 확인한 그의 눈이 심 봉사 눈 떠지듯 크게 떠졌다.

“이건…, 53번 돌려도 안 나와서 잠시 포기하고 있었던 마법소녀 릴리카 동물 콜라보 미니 피규어 시리즈 넘버312이잖아……? 이런 귀한 걸 내게 줘도 되나? 정말로……? 하아, 나 너무 감동받아 버렸다능. 하아… 진짜 지인님 세상 사랑해요.”

“뭘요, 한 번 돌리니까 나오던걸요?”

“나중에 가챠 돌려서 로브신사 나오면 주겠다능. 정말 고맙군… 라라.”

“헉? 정말요? 로브신사 주면 정말 감사하죠. 와, 지인님 최고.”

라라와 카를라히는 곧바로 ‘마법소녀 릴리카 동물 콜라보 미니 피규어 시리즈’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마법소녀 릴리카 동물 콜라보 미니 피규어 시리즈 중에서 넘버175 여우와 넘버46 토끼 버전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둥, 다음 콜라보는 과일 시리즈로 정해질 것 같다는 둥, 일반인이라면 질색할 만한 내용이었다.

“미니 피규어 시리즈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건 뭐니 뭐니 해도…….”

“폐하, 안에 계십니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라라가 조용히 옆으로 비켜서자 조금 뒤 문이 열리며 훤칠한 금발 사내가 들어섰다. 대형견 남주 크리온이었다.

“이게 누군가. 최최최측근이 아닌가. 그새 노크를 배우다니 기특하군.”

“과찬이십니다.”

“다시 노크, 노크해 봐라.”

카를라히가 박수까지 치며 재촉하자 크리온은 다시 문을 열고 나가서 노크를 했다. 똑똑, 선명한 노크 소리에 카를라히의 얼굴이 밝아졌다. 매일 문을 긁어놔서 수리비가 장난 아니게 들었는데 이젠 수리를 맡기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었다. 카를라히는 품에서 육포를 꺼내 들었다.

“아이구, 잘했다. 이건 상이다.”

“감사합니다.”

딱딱한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서있는 크리온을 라라는 이상한 눈으로 힐끗 곁눈질했다.

“그보다 무슨 일이지?”

“폐하, 약혼녀 엘리나1 공녀님께서 방금 막 회장에 도착하셨습니다. 황실 무도회의 전통에 따라 폐하께서는 파트너와 함께 사교 댄스를 추셔야 되겠습니다.”

“알고 있다……. 준비한 것은 가져왔겠지?”

지금 가봐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운지 카를라히의 미간에는 옅게 주름이 져있었다. 양해를 구하는 그의 눈길에 라라는 괜찮다면서 어서 가보라며 미소 지었다. 그동안 크리온은 카를라히가 준비해 놓으라고 미리 명령해 두었던 신발 상자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여기 있습니다.”

“수고했다.”

크리온에게서 건네받은 상자를 연 카를라히는 남성 구두 두 켤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교 댄스를 앞두고 신발을 갈아 신는 그를 눈앞에서 지켜보며 라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예요…, 그 고문 기구 같은 건……?”

그것은, 신발이라 부를 수 있는 게 못 됐다. 강철로 뒤덮인 구두 겉면 위에는 길이 15cm는 되어 보이는 바늘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누군가를 죽이거나 고문할 때 쓰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라라의 의심스런 눈빛을 알아차린 건지 카를라히가 신발 끈 매듭을 꽉 조이며 나긋한 음성을 냈다.

“아, 이건 특별히 주문한 것이다.”

“네? 주문한 거라고요……? 그런 흉흉한 걸 대체 왜…….”

“약혼녀가 조금 덜렁대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춤추는 도중 내 발을 밟는 실수를 해서 그녀가 대중 앞에서 망신을 당할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아니, 이 정도면 약혼녀 발을 더 걱정해야 될 거 같은데요.”

“라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년은 죽어도 싸…….”

“라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라라는 그가 조금 달라 보인다고 느꼈다. 분명 다정하고도 친근한 얼굴일 텐데,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 보였다. 대체 자신이 모르는 사이 약혼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라라가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커다란 음성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것은… 폭군의 각성이니라! 드디어, 폭군 남주가 폭군다움에 눈을 떴단 말인가!!>

갑자기 들려온 신의 음성에 라라는 끙 하고 이마를 짚었다. 로맨스 판타지는 이제 포기한 줄 알았는데 주신은 아직 이 세계를, 희망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클리셰대로였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폭군이었을 자이니라. 그것도 시체 수집가라는 또 다른 이명을 가진 폭군 말이지. 사람 목숨은 그의 앞에선 단순한 장난감에 불과하니라.>

‘시체… 수집가요……?’

들려온 뜻밖의 말에 라라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눈으로 카를라히를 좇았다. 크리온과 함께 발코니를 나서는 그가 보였다. 이윽고 그도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한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담고 있었다.

<마음에 든 여인의 시신을 박제해 은밀히 수집해 두는, 그런 폭군 말이니라.>

카를라히의 손에 쥐어진 릴리카 피규어가 라라의 시선에 꽉 들어찼다.

회장 안으로 돌아온 카를라히는 영애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의 약혼녀를 찾았다. 한 영애가 자신을 발견하고는 “폐, 폐하?” 하고 말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찔리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뿐 아니라 다른 영애들도 놀란 듯 고개를 조아리고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내 약혼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그것이 오늘 같은 경사스러운 날에 폐하의 약혼녀 되시는 분께서 옷차림이 하도 수수해서 말이죠. 약간의 조언을 드린 참입니다.”

딱 봐도 악녀의 오른팔처럼 얍삽하게 생긴 영애가 나서서 말했다. 카를라히는 그제야 그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약혼녀를 제대로 응시할 수 있었다.

자투리 천들을 꿰매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은발의 여인이 보였다. 그것도 무려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인지 손이 엉망이었다. 카를라히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게 너무 쪽팔렸다.

방금 ‘내 약혼녀’라고 발언했던 것을 철회하고 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 지나가고 싶었다. 그런 카를라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나2(김빙의)는 볼을 붉히며 당당히 얘기했다.

“이거 제가 직접 만든 드레스예요. 헤헤, 어때요? 잘 만들었죠? 아직 실력은 좀 서툴지만요. 헤헤.”

“…드레스 맞추라고 디자이너도 직접 궁으로 불러줬을 텐데?”

“아, 물론 왔었죠. 근데 드레스 한 벌에 무슨 500만 원이나 한다는 게 아니겠어요! 고작해야 한 번 입을 드레스인데, 괜히 황궁 예산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라리 그 돈으로 케이크 500조각을 먹는 게 더 이득이랄까요!”

‘왜 500만 원 주고 드레스 맞추는지 알겠다, 시벌.’

괜히 디자이너가 있는 게 아니라고 카를라히는 새삼 깨우쳤다. 완벽한 드레스 한 벌을 만들기 위해 드는 시간과 재료, 기술, 디자인, 정성을 생각한다면 치르기엔 부족함이 없는 금액인 것이다.

이 헌 옷 수거함도 수거해 가지 않을 것 같은 허접한 천 쓰레기를 입고 케이크 500조각을 먹을 바에는, 자신이라면 차라리 장인이 만든 아름다운 드레스 한 벌을 사겠다. 가치관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카를라히는 정말이지 이 여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크~ 공녀가 절약 정신 투철한 거 인정? 다른 귀족 영애들과는 다르다는 거 인정?’

반면에, 김빙의는 그가 자신을 ‘이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타입의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자신에 차있었다.

흔히 볼 수 없는 타입의 여자인 것은 맞았다. 다만 흔히 볼 수 없는 만큼, 앞으로는 정말 볼 수 없는 여자가 되었으면 하고 그가 바란다는 것은 몰랐지만.

“한 곡 추지 않겠나?”

“지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요? 이런 거 처음이라 넘나 떨리는 것! 이거 레알 반박 불가 빼박캔트 버벌진트 버켄스탁인 부분 팩트체크 들어가면 샘 오취리도 놀라서 에취 하고요 충격 실화 감동 실화 real story인 부분.”

추면 쉴 수 있다. 추면 쉴 수 있다. 빨리 추면 빨리 쉴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카를라히는 댄스 플로어 중앙으로 약혼녀를 리드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앞에 선 약혼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조금의 원망도, 수치스러움도, 분노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광활한 우주를 담아놓은 것처럼 공허했다.

부드러운 연주 소리가 흘러나오자 두 사람은 천천히 리듬을 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를라히가 한발 내밀면 엘리나2의 발이 한발 물러서고, 다시 카를라히가 물러서면 엘리나2가 다가서는 형식이었다.

엘리나2는 언제 그의 발을 힘껏 밟아야 할지 타이밍을 살폈다. 실수로 여러 번 남주의 발등을 밟아서 남주가 수차례 인내하는 것으로 로맨스 판타지는 성립하는 것이었다.

지직, 지지직, 그때였다. 이상한 소리가 엘리나2의 귀에 잡히기 시작한 것은. 분명 자신의 드레스 아랫자락에서 나는 소리였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늘에 찔린 채 몇 갈래로 찢어지기 시작하는 아랫단이 보였다.

‘…이 신발 새끼가?’

남주의 신발 상태가 이상했다. 징이라 하기엔 소름 돋을 만큼 날카롭고 긴 바늘들이 구두 위에 세워져 있었다. 실수라도 황제의 발등을 밟았다간 다신 못 걸을 것 같았다.

“아하하……. 폐하, 그 신발 간지 나네요?”

“고맙군. 그대가 마음에 들어 할 거라 생각했다.”

엘리나2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눈앞에 있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남자의 속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무(無)였다.

“계속 출 텐가.”

“아뇨, 괜찮아요, 신발. 정말 멋지시네요, 신발.”

귀족들의 화교술을 이용한 은근한 디스에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약혼녀를 놓아주고선 회장 상석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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