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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90)화 (90/115)

90화

라라는 까치발을 들어 영식의 짧은 머리채를 한 움큼 붙잡았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전투력이었다. 전부 오빠 덕분이었다. 서로 바닥을 뒹굴며 “야, 야! 먼저 놔!”를 연발하던 중 라라는 자신의 뒷덜미를 붙잡아 올리는 손에 뒤를 돌아보았다.

“소란을 피운 자는 즉시 퇴장이오.”

“저 사람이 먼저, 그랬다구요. 씩씩…….”

“먼저 달려든 건 그쪽이잖수.”

황실 경비병은 어깨를 으쓱하며 라라를 바깥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뒤늦게 자신의 손바닥에 한 움큼 쥐어진 머리칼의 주인이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귀족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더러운 신분 사회. 라라는 흉흉하게 이를 갈며 끌려 나가다가 멀리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반짝 고갤 돌렸다.

“그녀는 내 친구입니다. 고작 머리카락 몇 올 뽑은 게 퇴장의 사유가 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교황 성하…….”

“그리고 그녀 말대로 저 영식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알아들었으면 그녈 놓아줘요.”

경비병이 순순히 자신을 놓아주자 라라는 재빠르게 미하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역시 이런 게 신분 사회의 맛이지. 빠른 태도 변화였다.

“고마워요, 미하일. 그보다 오늘 멋지네요.”

늘 저택에서만 지내 창백한 피부와 연한 금발은 새하얀 연미복과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미하일은 제 칭찬에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님 대수롭지 않은 건지 한번 피식하고 웃고 말 뿐이었다.

“너도 예쁘네, 오늘.”

“아… 고마워요.”

뜻밖의 칭찬에 라라는 머쓱하게 웃음을 흘렸다.

“잠깐 여기 기다리고 있어. 마실 것 좀 가져올게.”

미하일은 평소의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으나 그의 귓불은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이걸 들킬 바에야 차라리 잠시 자리를 벗어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와인 진열대에 도착한 그가 잔에 손을 가져간 순간, 반대편에서 다른 손이 뻗어져 왔다.

“…교황 성하?”

그 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악녀 로잘리였다. 평소완 다르게 앙칼진 눈매를 순진하게 뜬 채 로잘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놀란 듯이 두 눈을 껌뻑이다가 곧 수줍게 손을 거뒀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 지난번에 신세를 졌었죠. 한번 인사를 드린다는 게 못 드렸네요. 헤헤.”

미하일은 제 앞에 선 붉은 머리의 여인을 응시했다. 육감적인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옷만 입던 그녀가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왔는지 무려 하얗고 청초한 분위기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뭔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았지만 제 알 바는 아닌지라 미하일은 무심히 눈길을 거뒀다.

잔을 가로채고 다시 라라의 곁으로 가려는데 그 전에 로잘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붙잡았다.

“그때는 제가 좀 이기적이었었죠. 난폭한 데다가 시기 질투만 해대고…….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그리고 아버지께서 무리하게 저희의 약혼을 추진하려 하시는 것 같지만 저, 교황 성하께서 싫으시다면 제 선에서 어떻게든 막아볼게요.”

“그게 무슨…….”

“믿어주세요.”

로잘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동안의 악행을 생각한다면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저는 달라졌어요……. 아니, 달라지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그리고 저로 인해 상처받고 피해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에요.”

실제로 로잘리는 자신에게 뺨을 맞았던 718명에게 피해 보상금을 지불하는 등 말뿐이 아닌 진심 어린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덕분에 악녀라 평해지던 세간의 평판도 좋아진 상태였다. 최근에 열었던 파티도 영애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일 중 하나였고 말이다.

그런 그녀의 진심이 닿은 것인지 미하일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을 내놓았다.

“괜찮습니다.”

“네?”

“영애와의 약혼, 이대로 유지하는 걸로 하죠.”

“그런, 하지만…….”

“반대로 묻죠. 로잘리 양은 제가 싫나요?”

“그건 아니에요, 절대요……. 성하께서는 저에겐 오히려 과분한 상대죠.”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는 로잘리의 말을 들으면서 미하일은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느 틈에 라라의 주변에는 수많은 귀족 남성들이 몰려있었다. 물론 곧이어 “누가 오크라구욧?!” 하는 째지는 외침과 함께 남성의 머리채를 잡는 그녀가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귀족 남성들의 눈은 좀처럼 라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오히려 아름다워진 그녀의 손에 머리채를 잡히길 기다리는 것처럼 멍하니 서서 연신 감탄사만 터뜨려 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이어트 따위 시키지 않았어야 했다. 강제 감량을 시키더라도 자신만 볼 수 있는 곳에 그녀를 가둬뒀어야 했다.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로잘리 양, 약혼은 최대한 빨리 진행했으면 좋겠군요. 그럼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서 이만.”

미하일은 로잘리에게 처음으로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어주며 자리를 떴다. 라라의 질투를 끌어낼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이용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로잘리는 그저 수줍게 볼만 붉힌 채 서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미하일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로잘리는 손을 들어 올려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었다. 순진하게 뜨고 있던 눈 위로 어느새 짙은 짜증이 어려있었다.

‘남주라는 게 줏대 없기는……!!’

평소 성질대로였다면 연속 싸다구 200대 감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일이 계획대로 술술 진행되고 있었다. 로잘리는 속으로 사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좀 착해졌다고 바로 이 꼬락서니라니, 호호홋! 이 나라 남주들의 수준도 알 만하네!’

이제 남은 남주는 총 네 명. 김빙의가 어장을 완성하기 전에 어떻게든 어장 속 물고기들을 빼돌려야 했다.

악녀 로잘리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김빙의를 부순다, 그것도 철저히.

“라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라라는 자신의 손에 잡힌 머리털을 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척에서 미하일이 두 개의 잔을 든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고마워요.”

라라는 와인 잔을 받아 들고서 미소 지었다. 그녀가 와인을 음미하는 데 정신이 팔린 동안 미하일은 주위에 서있는 사내들을 둘러보며 ‘아직도 볼일이?’ 하는 눈빛을 보냈다. 적나라할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꼬리를 내리고 흩어지는 귀족 영식들을 라라는 눈치채지 못한 채 시무룩이 중얼거렸다.

“정말… 다이어트하기 전에 제 모습이 그렇게 오크 같았어요? 으으, 왜 하나같이 다 오빠 새끼 같아 보이는지. 남이 살을 빼든 찌든 관심 좀 끄면 안 되나, 지들 보라고 뺀 것도 아닌데!”

“살 좀 쪘다고 오크거리는 놈들이라니, 그 수준 알 만하네. 신경 쓰지 마.”

“고마워요. 역시 미하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라라의 말에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하며 눈짓을 주었다.

“아까 남자들 중에 괜찮았던 남자는 없었나 봐?”

있다면 뒤에서 몰래 처리할 속셈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한 라라는 크게 눈을 뜨며 반문했다.

“네? 없어요, 절대! 저런 사람들이 제 이상형일 리 없잖아요. 전 말이죠, 정말 눈에 띄는 분을 좋아하거든요.”

“예를 들자면?”

“당연히 로브신사 님 같으신 분이시죠. 아, 얼마나 낭만적인지 몰라요. 망토 자락을 휘날리면서 제게 꽃송이를 건네는 모습을 상상하면 하악……. 헛,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호호.”

라라는 자신도 모르게 로브신사 찬양을 늘어놓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이게 다 라히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항상 덕질 얘기로 자연스레 흘러가 버리니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선물.’

라라는 탄신 무도회의 주인공을 떠올리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따라 황제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다. 클리셰대로라면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기 힘든 귀하신 몸이니 당연했다. 일단 미하일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직접 찾아 나서야 될 것 같았다.

“저, 잠깐 어디 좀 가볼게요.”

“누구에게 가는데?”

곧바로 손이 뻗어져 와 자신을 붙잡자 라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화, 화장실이요.”

‘어라… 나 왜 거짓말하는 거지?’

마치 괜히 찔려 서브남을 보러 가는 것을 남주에게 숨기는 여주 같지 않은가. 그리고 남주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독점욕이 극에 달해 여주를 감금하고……. 라라는 소설을 너무 봤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화장실도 가려고 했으니 완전히 거짓말도 아닌 것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한마디를 남기고 라라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보통 높은 신분의 남주들은 오히려 이런 무도회에서 보기 힘든데, 왜냐면 그들은 이런 자리를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발코니 구석 같은 음침한 곳에서 홀로 고독을 씹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라라의 예상은 철저히 빗나갔다.

유난히 사람들로 북적이는 댄스 플로어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리듬을 타고 있었다. 검자줏빛 머리칼에 매달린 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반짝거렸다. 카를라히는 투명한 음료를 들고서 젖은 머리를 흔들다가 멀리 서있는 라라를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곧바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라라에게 다가갔다.

“라라? 어디서 왔지?”

“뭐라고요?! 안 들려요! 일단 다른 데로 가요!”

“알겠다! 발코니로 가지!”

두 사람은 2층 발코니로 자리를 바꿨다. 라라는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서 카를라히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의 젖은 앞머리가 천천히 흩날리는 가운데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라히, 아니 이젠 폐하라고 불러야 될까요?”

“라히면 된다. 계속 라히로 불러줬으면 해.”

카를라히는 조용히 웃으며 말하고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긴장한 듯 침묵을 지키던 그가 뒤늦게 다시 말을 이었다.

“저번에는… 미안했다. 널 구하러 가놓고서 너에게 팩폭이라니, 그런 심한 말을 해버렸으니…….”

“저도 로우킥을 날려서 죄송했어요. 홧김에 그만…….”

“아니다. 널 화나게 만들었으니 맞아도 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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