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악녀치곤 융통성이 없지는 않은지 파자마로 갈아입을 수 있게 탈의실로 안내해 주었다. 라라가 편한 파자마로 갈아입고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손님이 도착해 있었다.
“호호홋! 어머나, 이게 누구셔라?”
하늘을 찢을 듯 높은 로잘리의 음성이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무슨 구경이라도 났는지 로잘리의 주변에는 이미 영애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라라는 영애들을 뚫고 로잘리 근처로 다가갔다.
로잘리의 앞에는 익숙한 은발의 인물이 서있었다. 황실 문장이 수놓아진 망토를 걸치고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차림을 한 그녀는 다름 아닌 엘리나2였다.
“파티에 드레스를 입고 오실 줄이야. 정말이지, 품격 떨어지시네요.”
‘…아니, 딱 봐도 파자마 쪽이 품격이 없어 보이는데…….’
“폐하의 약혼녀라면 그만한 격식과 품위를 갖추고 있으실 줄 알았건만, 이런 실수를 저지르시다니! 제가 너무 기대한 걸까요? 오호홋, 실례!”
그렇다. 이 자리는 엘리나2, 즉 김빙의를 철저히 망신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던 것이다.
라라는 약간 흥미로운 눈길로 엘리나2를 바라보았다. 비록 다른 차원의 영혼이 빙의된 상태라지만 여주인공은 여주인공이었다. 어떤 식으로 위기를 모면할까 지켜보는데 갑자기 엘리나2가 드레스를 훌훌 탈의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분노에 의해 정신 줄을 놓은 게 아닌가 싶었으나, 놀랍게도 엘리나2는 드레스 안에 무려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오늘 귀찮아서 안에다 입고 왔거든요. 날씨가 좀 춥기도 했고요.”
“…호호, 그러셨군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로잘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라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복 입고 왔다고 자랑하는 초딩이야 뭐야.
“그보다 곧 있음 폐하의 탄신일이군요, 호호. 약혼녀이신 엘리나1 공녀님께선 어떤 선물을 준비하실 예정이신지요?”
“직접 수를 놓은 손수건을 드릴 예정이에요. 비록 아직 실력은 좋지 못하지만요.”
그렇게 말한 엘리나2는 증명해 보이듯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바늘에 얼마나 많이 찔린 건지 손가락마다 밴드가 수두룩이 붙여져 있었다. 저 정도면 천에 바늘을 찔러넣은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손에다 찔러넣은 게 아닐까.
확실히 피땀 같은 정성이 들어간 선물이었다. 종이학 백 마리만큼 쓸모는 없어도 보통 남주들은 여주가 자신을 생각해서 직접 만들었다고 하면 좋아라 하니까. 아마 엘리나2는 치밀하게도 그것을 노렸을 테다.
“어머… 그러시군요. 저는 직접 뜨개질한 목도리를 선물로 드리려고 했는데, 호호, 조금 겹치네요?”
역시나 악녀였다. 로잘리의 은밀한 견제를 알아차린 건지 일순 엘리나2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녀는 곧 빙그레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이 순수한 미소를 입가에 담뿍 담고서. 발랄한 어조가 이어졌다.
“그럼 내기해 봐요. 폐하께서 누구의 선물을 받고 더 좋아하시는지! 헉, 생각만 해도 꿀잼인 것 같아요.”
“호호, 아무리 그래도 폐하께선 약혼녀이신 엘리나1 공녀님께서 주신 걸 더 좋아하시겠죠.”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인데요. 저희 둘의 선물을 익명으로 보내는 거예요. 그럼 공정하죠? 대박~”
“……!”
이런 블라인드 테스트도 없었다. 순간 어떤 사악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악녀 로잘리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아……. 그러면 되겠네요. 좋아요, 해보도록 하죠.”
“아아, 짱 기대돼요!”
“대신 진 사람은 다신 황제 폐하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걸로. 어떤가요? 혹시 겁먹으신 건 아니겠죠?”
로잘리의 파격적인 제안에 엘리나2는 잠시 당황한 것 같았으나 곧 생긋 웃어넘겼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그려졌다. “당근이죠! 그 정도는 각오해야 꿀잼이니까요.” 하는 발랄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황제 탄신일까지 앞으로 D-6일. 악녀와 여주의 세기의 경쟁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그냥 릴리카 짱 가챠 하나 뽑아서 주면 좋아할 텐데…….’
라라는 조용히 생일 선물을 결정했다.
* * *
묵직한 로우킥을 맞고 정신을 잃은 후 다시 눈을 떴을 땐 자신의 침대 위였다. 누가 옮긴 건지는 뻔했다. 미하일, 그자의 짓이겠지. 카를라히는 까마득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감히 무슨 면목으로 그녀를 본단 말인가. 강제 다이어트를 당하는 그녀를 구하기는커녕 팩폭이라는 심한 말을 해버렸다. 맞아도 쌌다.
“릴리카 짱, 난… 어떻게 하면 좋지?”
카를라히는 다키마쿠라의 부드러운 몸을 끌어안았다. 섬유 유연제의 향에 코를 묻은 채 긴 한숨을 흘릴 때였다. 쾅쾅 하고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폐하, 안에 계시죠?”
카를라히의 인상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매일 밤마다 집요하게 자신의 침실에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매번 내쫓는다지만 오늘은 순순히 물러갈 생각이 없는지 철컥철컥 하고 문을 따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몸을 일으킨 카를라히는 소중한 다키마쿠라를 침대 밑에 숨겼다. 금방 꺼내줄게. 그렇게 들리지 않을 말을 속삭이고서 침대에서 몇 걸음 떨어졌을까, 분명 잠가놓았을 문이 열렸다.
“계실 줄 알았어요, 헤헷.”
머리핀을 들고서 엘리나2는 해맑게 웃어 보였다. 저 사이코 년…, 카를라히가 보기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라지만. 아무리 결혼을 앞둔 약혼녀라고 해도 그렇지,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게 있었다.
“심심해서 놀러 왔어요! 폐하도 심심했죠? 인정? 반박 불가?”
“…나가라.”
“수녀시대 노래 알아요? 아, 헐~ 진짜 몰라요? 내가 불러줄게요.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나가라.”
카를라히는 침대맡에 걸려있는 호신용 검을 집어 들었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검집을 벗기는 와중에도 은발 여자는 두 눈을 앙증맞게 깜빡이며 침대에 걸터앉을 뿐이었다.
“와아, 검 멋지다. 그 검 폐하 거예요? 오오.”
“…당장 나가라. 안 그러면 네 목을 베어 성문에 효수하겠다.”
폭군을 연상케 하는 살벌한 음성이었지만 엘리나2는 전혀 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이걸 기대하고 왔다는 듯이 당돌하게 작은 혀를 놀렸다.
“절 죽이시면요?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요? 천만에요! 처녀 귀신이 돼서 영원히 폐하 곁에 붙어버릴걸요?”
“…….”
“농담이에요. 흠… 재미없어라~ 폐하는 농담을 잘 안 받아주시나 보죠.”
‘…나가 나가나가나가나ㄱ낙가라가아가!!’
카를라히는 속으로 수백 번 검을 휘두르는 상상을 했다. 그만큼 짜증 나고 긴장되었다. 저 해맑은 사이코 년이 금방이라도 침대 밑을 들여다볼까 봐 심장이 벌렁거렸다. 자신의 은밀한 취미는 라라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라라가 아니고서야 이런 취미를 이해해 줄 여인이 제국에 몇이나 있단 말인가.
아니, 이해해 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소중한 릴리카 다키마쿠라를 혐오하듯이 쳐다보는 시선이 싫을 뿐이다. 릴리카 짱이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게 두려울 뿐이다.
“일단 이런 무서운 건 내려놓으세요! 자, 어서요.”
엘리나2는 카를라히의 손에 들린 검을 빼앗고서는 그대로 침대 위로 그를 끌어당겼다.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르는 게 릴리카 짱을 들킬 위험이 적다고 판단한 카를라히는 그 손에 이끌려 앉았고 말이다.
“잘하셨어요. 헤헷,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폐하도 은근히 귀여우시네요.”
“제발 나가다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
“에이, 혼자 있는 것보다 둘이 있는 게 훨씬 더 재밌을걸요?”
그러고는 해달라고 하지도 않은 얘기를 줄줄이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수다가 10분, 20분, 30분을 찍는 동안 카를라히의 혈압도 차차 올라갔다. 혈압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땐 그의 안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몸의 한 부분에 자꾸만 힘이 빠졌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그래서요! 제가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푸하핫, 넘나 웃기죠? 진짜 핵꿀잼이었다니까요~ 아, 핵꿀잼이 뭐냐면 말이죠.”
“…….”
“…움?”
옆이 조용하자 엘리나2, 김빙의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옆에 소리 없이 잠든 그가 보였다.
날렵하게 뻗은 콧날과 얼마나 피곤했는지 하얗게 뒤집어 깐 흰자, 남성스러운 턱과 굳게 다물린 입 새로 흘러내린 게거품. 확실히 빼어날 정도로 잘생긴 외모였다. 그의 얼굴을 섬세한 눈길로 뜯어보던 엘리나2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의 옆에 누웠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옆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겠지? 어젯밤은 어쩐지 푹 잠들어 버렸군. 이 여자 때문인가? 신기한 여자군. 하며 잠든 나를 다정한 눈으로 내려다보겠지. 아, 뻔해~! 뻔해.’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카를라히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날 대낮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그를 이상하게 여긴 시종이 급히 황궁 의원을 불러 진료한 결과 가벼운 뇌혈관 질환 판정을 받게 되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는 우려의 말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카를라히가 장기 입원을 하는 동안 그렇게 탄신 무도회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 *
탄신 무도회 당일, 회장 안은 이미 귀족들로 가득 차있었다. 라라가 무도회장에 들어서자 주위로부터 수많은 눈길들이 쏟아졌다.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한 여인들은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에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고, 미혼 영식들은 그녀의 존재에 술렁였다.
이때 한 영식이 자연스럽게 와인 잔을 들고 라라에게 접근했다.
“이렇게 건강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인은 처음 봅니다, 레이디. 실례지만, 성함이?”
“라라 슈모르드라고 해요.”
수줍게 볼을 붉히며 라라는 대답했다. 영식은 그녀의 이름을 작게 되뇌다가 놀란 듯 크게 눈을 떴다.
“그 오크 같던 영애가……?”
“누가 오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