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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88)화 (88/115)

88화

백여 명의 마족 병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쳐들고 계단 위에 서있는 인간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계단에 한 발짝도 올라설 수 없었다. 쏘아져 내린 무시무시한 섬광이 계단에 접근한 마족 병사들을 단숨에 까만 재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천 년에 한 번 나온다는 전설의 성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성력.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성녀 보유국이 곧 대륙을 점령할 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신성력으로 일렁이는 두 눈이 하얬다. 감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든 마족 병사들의 머리 위에 군림한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은빛을 두른 장수였다. 압도적인 신성력과 위압감에 마족들은 패닉에 빠져 있다가 하나둘 그녀의 아래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나의 뜻에 반대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엘리나5는 온 세상에 빛을 퍼뜨릴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새로운 전쟁이 마계에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용만 방대할 뿐, 길고 지루하기에 쓰지 않을 것이다.

* * *

붉은 휘장이 쳐진 화려한 침실 안에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한 명은 이 방의 주인인 악녀 로잘리였고, 다른 한 명은 메이드 차림인 황성 시녀였다. 로잘리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시녀를 무료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모두 불어.”

황제의 약혼녀 수발을 드는 전속 시녀 중 하나를 매수하는 것은 쉬웠다. 거액의 돈을 쥐여주고는 거절하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 협박을 하면 되었다.

로잘리가 시킨 일은 지극히 쉬운 일에 해당했다. 약혼녀 행세를 하는 엘리나2(정확히는 김빙의)를 은밀히 지켜본 후 모든 행동을 제게 낱낱이 보고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첩자였다.

“그년이 요 며칠 사이 어떤 일을 하고 다녔는지 전부 다.”

엘리나2의 몸에 들어간 영혼이 수상쩍었다. 아무 이유 없이 엘리나1을 대신해 제 발로 황성에 기어들어 갈 리가 없었다. 일단 그년의 목적이 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보통… 오후 1시쯤에 일어나셔서 2시쯤에 식사를 하십니다. 그리고 세 시간 정도를 침대에서 보내시다가 해가 질 시간에 밖으로 나가십니다. 보통 황제궁을 지키는 병사들과 담소를 나누시거나, 폐하의 최최최측근이신 크리온 님을 만나러 가십니다.”

“크리온이라면… 대형견 남주일 텐데? 따로 만난다고? 어느새 친해진 거야!”

“저번에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후로 부쩍 사이가 가까워지신 듯합니다.”

“또 다른 건 없어?!”

“그게… 저에게 반말을 하라거나, 부를 때 님 자를 빼고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달라거나,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쓰십니다. 그리고 달릴 때 거추장스럽다며 드레스 아랫자락을 손으로 찢어내시거나, 케이팝이라고 하는 이상한 춤을 추는 등 눈에 띌 정도로 특별한 행동을 자주 하십니다.”

“그러니까…….”

로잘리는 사악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년은 눈에 띄고 싶어 안달 났단 말이지?”

“…네. 밤이 되면 몰래 창문을 넘어서 황제의 침소로 향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매번 다시 걸음을 돌려 황실 감옥으로 가셨습니다.”

“황실 감옥?”

“디체스 공작님께서 수감되어 계시는 곳입니다. 정확히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거리가 멀어 듣지 못했습니다만… 분명 두 분 다 웃고 계셨습니다.”

“웃어? 아, 아아― 이렇게 쉬운 걸 여태 몰랐다니! 호호호홋!”

갑작스레 로잘리의 입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 안이 떠나가라 호호거리던 그녀가 어느 순간 무섭게도 웃음을 뚝 멈췄다.

“그년……! 그년은 남주들을 가로채려 하고 있어!”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로잘리는 히스테릭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근처에 있던 꽃병이 그녀의 손날에 맞아 멀리 튕겨나갔다. 쨍그랑, 꽃병이 깨지는 소리에 전속 시녀는 몸을 더욱 심하게 바르르 떨었다.

“분명해! 황제 남주에게 퇴짜를 맞으니 공작 남주에게 간 것이고, 대형견 남주까지……. 이거 완전 역하렘을 만들려고 작정했잖아?”

로잘리의 핏대 선 두 눈에 광기가 떠올랐다. 감히 언니의 몸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남주들을 상대로 어장을 치고 다닐 줄이야. 로잘리는 까득까득 손톱을 씹으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마음대로 활개 치고 다니게 놔둘 순 없었다.

‘네년 뜻대로는 안 될 거야.’

악녀의 반격이었다.

* * *

3일 후 라라는 약속대로 대신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처음엔 견딜 수 없어서 몇 번이나 탈출하려 했는데 막상 끝나니 상쾌한 기분만 들었다. 어쩐지 몸도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미하일이 내어준 마차를 타고 슈모르드 자작 저택에 무사히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하필 집 안에서 가장 먼저 본 사람이 오빠였다. 거지 같았다. 또 탈영이니 로또니 하면 죽여버려야지, 라라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빠가 내려오는 계단에 올라섰을 때다.

“누구십니까?”

“뭐……?”

오빠 로렌스가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을 멍하니 내려다보는 게 아닌가. 오빠 새끼가 또 되도 않는 장난을 치려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판단한 라라는 오빠에게서 최대한 거리를 둔 채 그를 지나쳐 올라갔다.

그러나 곧 빠르게 뻗어져 온 손에 의해 손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뒤를 돌아보자 몽롱한 얼굴의 오빠가 천천히 입술을 여는 게 보였다. 극혐 샷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숙녀분은 처음 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오빠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서 가장 더러웠다. 라라는 그대로 오빠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힘껏 밀쳐냈다.

“죽어!!”

라라는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갔다. 붙잡힌 손목을 확인하니 닭살이 돋아있었다. 소름이 끼쳤다. 한시 빨리 이 집에서 나가든가 해야지, 조용히 중얼거리다가 라라는 자신의 방에 세워진 전신 거울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거짓말.”

천천히 거울 앞에 다가와 선 라라는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뭐지, 이 건강한 아름다움은? 얼굴에서 찬란한 광이 흐르고 있었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셀룰라이트로 뒤덮여 있던 팔과 다리가 매끈하게 뻗어져 있었고 아랫배에 붙어있던 묵직한 살덩이가 사라져 있었다. 말 그대로 잘록한 허리 라인에 라라는 기함할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나라고?”

고작 5kg 감량하고 역대급 변화가 찾아온 어느 엑스트라의 이야기였다.


11장 탄신 무도회의 정석

이틀 뒤 라라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어 왔다. 악녀 로잘리가 보낸 것으로 자신의 가문에서 파티를 여니 부디 참석해 달라는 내용의 초대장이었다.

라라는 곧장 드레스 숍에 들러 평소 노출이 두려워 입어보지 못했던 등허리가 파인 디자인의 드레스를 골랐다. 그렇게 이틀은 미하일이 추천해 준 식이 요법과 마사지로 철저히 몸 관리에 들어가고 마침내 당일이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라라는 마차에서 사뿐히 내려 대저택에 들어섰다. 악녀 로잘리의 가문이 황실에서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대상인 집안이라는 건 수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었다.

아름다운 주택 내부를 걸으며 라라는 연신 감탄했다. 이런 곳에서 열리는 파티는 얼마나 황홀할까.

이윽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도달한 곳에는 하얀 문이 있었다. 라라는 살며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이미 방 안에는 수많은 영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었다. 심지어 파자마 차림이었다.

‘…파티 맞긴 한데, 너무 없어 보이잖아!’

거대한 무도회장은 어디 가고 로잘리의 방 풍경만이 펼쳐져 있었다. 벽과 천장에 풍선이 달려있고 네모난 탁자 위에는 피자와 치킨, 탕수육 등 배달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심지어 잔들은 검은 탄산음료와 투명한 탄산음료, 주홍색 탄산음료 세 종류로 채워져 있었다.

‘누구 생일 파티인 줄 알겠네.’

“로잘리 양, 생일 축하해요.”

‘…아, 맞구나.’

라라는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선물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굴기엔 뭐하기에 조용히 구석에 앉아있는데 하필이면 드레스 차림이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 해도 파자마 군단 사이에 있으면 당연히 띌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저 영애는 누구죠?”

“그러게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영애들의 시선에 라라는 모른 척 벽과 천장만 번갈아 응시했다.

“라라 슈모르드 양?”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진다 했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티 주최자인 로잘리가 와인색 파자마를 입은 채 도도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편 자신의 이름을 들은 건지 영애들 무리가 크게 술렁였다.

“…슈모르드라면 그 자작 영애 아냐?”

“그 오크 같던 영애가……?”

소곤소곤하고 저들끼리 주고받는다지만 다 들렸다.

“누가 오크 같다고욧?! 말 다 했어요!!”

라라는 벌떡 일어나 그대로 ‘오크 같던’이라는 망언을 내뱉은 영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서로 바닥을 뒹굴며 “네년이 먼저 놔!”를 외쳐댔을까,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구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끌고 가.”

“로잘리 양!! 제발! 자비를! 아직 피자 한 조각밖에 못 먹었는데……!”

다행히 파티에서 퇴출당한 건 자신이 아닌 망언을 한 영애 쪽이었다. 라라는 바닥에 끈적한 피가 섞인 침을 퉤 하고 뱉고서 손에 넣은 갈색 머리칼 한 뭉텅이를 세게 말아 쥐었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것도 잠시, 옆에서 도도한 목소리가 울렸다.

“흠, 그보다 슈모르드 양이라고 했죠? 누굴 닮은 거 같은데.”

“호호홋, 처음 뵙겠습니다. 기분 탓일 거예요. 호호.”

“하긴, 영애가 평민 기사로 남장을 하고 저와 동거했었을 리가 없겠죠.”

뜨끔, 라라는 이 정도면 그녀가 모든 걸 다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로잘리의 관심은 다른 데로 넘어갔다.

“그보다 오늘 파티에 대해 못 들으셨나 봐요. 안에 파자마가 준비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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