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87)화 (87/115)

87화

* * *

라라는 눈을 떴다.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이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며칠이 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미하일… 거기 있어요?”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라라는 묶인 손목을 열심히 비틀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발 풀어주세요……. 이제까지 무슨 말이든 다 따랐잖아요.”

라라는 흐느껴 울었다. 배고파서.

너무 배가 고팠다. 이곳에 나가면 햄버거, 피자, 스파게티, 짜장면 곱빼기, 탕수육, 케이크, 족발, 떡볶이, 튀김, 막창, 치킨 다 조질 것이다. 그래, 일단 나가면 치킨부터 먹자. 치킨을 먹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있을 때,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라? 거기 있는 사람, 라라인가?”

“…라히?”

라라는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항상 굳게 닫혀있던 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나타난 검자줏빛 머리의 사내가 뛰다시피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답지 않게 굳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카를라히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침대에 묶여있는 라라의 모습은 너무나도… R-18 동인지 표지를 연상케 했다.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모른 채 방황하던 카를라히가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흐으긁, 며칠이나 지난 거죠?”

“앞으로 두 시간만 더 지나면 네가 사라진 지 이틀이 된다.”

“…부모님은 제가 그냥 외박한 줄 알겠네요.”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줄 알 것이다. 라라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다가 위에서 들려온 낮은 저음에 고개를 들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이지? 험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카를라히는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를 향한 분노, 그녀를 향한 걱정 등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깊게 파인 미간 위로 여실히 드러났다. 휘몰아치는 깊고 푸른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라라는 대답 대신에 조용히 시트 위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건 카를라히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감정들은 이윽고 한 감정만 남기고 말끔히 사라졌다. 자신을 향한 경멸이었다.

얼마나 한없이 이기적이란 말인가, 자신은. 핏대가 서도록 힘껏 주먹을 말아 쥔 그는 다시 힘을 풀었다. 하얗게 질린 손바닥이 라라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미안하다……. 내 감정만 앞서서 너를 배려하지 못했다. 네게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 괜찮다. 내가 왔으니까 모두 다 괜찮을 거야.”

카를라히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 라라는 서러움을 토로했다. 그에게 매달리듯이, 모두 다 남김없이.

“강제로…, 흐르읍, 저는 하기 싫다고 했는데… 흐윽, 강제로 다이어트 당했어요…….”

“…….”

“억지로… 억지로, 식이 섬유가 풍부한 음식들로만 먹였어요……. 그것도 하루 세 끼, 꼴랑 한 주먹거리로만!!”

“한 주먹거리면 적당한 거 아닌가?”

“무슨 소리세요! 간에 기별도 안 간다구요!!”

라라는 방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외쳤다.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라라를 달래기 위해 카를라히는 쉬쉬 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였다, 열린 문 사이로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온 것은.

“당신은 라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카를라히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떨어진 문 옆에 한 사내가 등을 기대고 서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도 짧은 금발과 하늘색 눈은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한 빛 무리로 이뤄진 것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이 대신전의 교황이자 그녀를 가둬둔 장본인이었다.

카를라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미하일을 굳게 응시했다. 그 시선에 적의가 스며있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예전 모습이 딱 보기가 좋았는데, 너야말로 무슨 소리지.”

“보이는 걸로는 모르죠. 사람마다 적정 체중이라는 게 있어요. 라라는 그걸 초과했습니다. 키에 비해 무게가 상당히 나갑니다.”

“숨은 살이 많다는 건가……?”

“그렇다고 해두죠.”

그녀를 직접 들어보지 않는 이상 백번 말해도 모를 것이다. 미하일은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그러니까 폐하, 라라에게서 그 손 떼세요. 라라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아직 2kg밖에 감량하지 못했어요. 지금보다 3kg는 더 빼야 해요.”

“말했지만, 나는 예전의 라라도 좋다. 아니,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좋다.”

“그런 허울뿐인 말로… 그녀를. 그러면서 라라의 지금 모습에 더 눈이 가겠지.”

확실히 라라는 예전보다 뭔가 더 예뻐진 것 같았다. 평상시 라라가 변신 전 릴리카 짱이었다면 지금 모습은… 변신한 릴리카 짱이랄까. 어느새 자신의 최애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대입하고 있는 카를라히였지만 그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강제로 다이어트를 시키는 것은 그녀를 향한 폭력이다.”

“마, 맞아요! 이것도 엄연한 데이트 폭력이라구욧!”

“아니, 팩트 폭력.”

묵직한 로우킥 한 방이 카를라히의 복부에 꽂혔다.

“다리, 안 묶어놨는데.”

미하일은 뒤늦게 그 사실을 쓰러진 카를라히에게 말했다. 침대 아래에 기절한 채 엎드려 있는 카를라히를 알지 못한 채 라라는 바득바득 이를 갈며 외쳤다.

“지금 내가 살쪘다는 거예욧?!”

“아니, 넌 살찌지 않았어. 그저 지금보다 좀 더 보기 좋은 건강한 모습으로 만들려는 거지.”

이제껏 멀리서 보고 있던 미하일이 운을 뗌과 동시에 침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다리 아래에 쓰러져 있는 황제를 힐끗 내려다본 미하일은 만족스러운 미소 지은 채 라라에게 말을 걸었다.

“라라, 나를 믿고 3kg만 더 감량하자. 지금 식단으로 3일만 더 지속하면 돼.”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요. 이런 것들로만 먹다간 정말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구요!”

“무슨 소리야, 매일 세 끼 꼬박꼬박 먹으면서.”

미하일은 정색했다. 하지만 라라는 계속해서 절박하게 그에게 매달리는 어조를 사용했다.

“제발요, 미하일. 치킨이 먹고 싶어요……. 너무, 너무 기름진 것들이 먹고 싶어요.”

“그거 알아? 가짜 배고픔이라고 말이야.”

그는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줄곧 외면해 온 진실들을 낱낱이 까발려 주었다. 잔혹할 정도로 직설적인 독설과는 달리 유연한 혀였다.

“넌 충분히 하루 먹을 양을 다 채웠어. 영양도, 열량도. 그런데 더 먹고 싶은 건 네가 이제까지 유지해 온 식습관이 잘못됐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만큼 열량을 소비하지도 않지. 게을러서 매일 누워서 뒹구는 게 다잖아.”

“…그, 그건…….”

“더 이상은 듣지 않겠어. 내 말에 따라.”

조금의 토를 다는 것도 용서치 않겠다는 듯 그는 라라의 말허리를 잘랐다. 하지만 강압적인 태도와는 달리 이어진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넌 그러면 되는 거야.”

* * *

엘리나5는 마왕성 첨탑 꼭대기 층에 서서 마계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족들이 살고 있을 수많은 저택들이 보였다. 불빛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지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는 건 어디든 똑같았다. 다만 누구의 통치를 받느냐의 차이일까.

그녀의 은빛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깃들었다. 곧이어 결심으로 바뀐 것인지 그녀는 걸음을 돌려 첨탑 계단을 내려섰다. 엘리나5가 새하얀 의복을 휘날리며 향한 곳은 마왕성의 1층 중앙 홀이었다.

1층에 길게 시립해 있던 백여 명의 마족 병사들은 하나같이 엘리나5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마왕님의 신부로 왔다가 마왕님께 차인 인간 계집이었다. 아직까지 지상에 안 가고 여기서 뭘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그들은 가만히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엘리나5는 거대한 성문과 연결된 중앙 홀을 가로질러 붉은 카펫이 깔린 성 계단에 올라섰다. 계단 끝에서 다섯 칸 정도를 남기고서 선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들으세요.”

엘리나5는 눈을 내리감았다.

“아시다시피 전 마왕의 신부로 이곳에 왔습니다. 지상과 마계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사근사근한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엄격한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정략혼은 표면상의 이름일 뿐, 세계를 위한 평화 협정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지상의 대표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마왕은 단순한 변덕과 유희를 좇아 이 중요한 일을 일방적으로 그르쳤습니다.”

이렇게 쉽게 물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물로 바쳐진 마왕의 신부를 보자마자 그냥 다시 돌려보낸다?

약한 인간 계집치고 꺅꺅대지 않아서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마왕성의 방 하나 내어주고 무관심하게 방치하다가 여러 사건을 겪고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면서 마침내 인간 계집에게 마음 한편까지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초반부터 퇴짜를 당했다. 로판 사상 희대의 무개념 짓이었다. 마왕 남주는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를 건드렸다. 그가 남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겠다면 자신이라도 자신만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이다. 이것은 자애로운 성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보복이었다.

“저의 제국은 물론, 모든 지상의 대륙을 우롱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녀의 권한으로 마계와의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아무 죄 없는 자들이 큰 희생을 치르겠지요. 마계의 운명을 그런 몰상식한 자의 손에 맡긴 탓에 말이죠.”

그녀가 말하는 몰상식한 자가 누구를 뜻하는지 마족 병사들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몇몇 마족 병사들은 이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바입니다. 약속은 강제로라도 이행하겠습니다. 마계의 안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마계의 주인이 돼서라도 말이지요.”

“그게 무슨! 마계를 얕보는 것이냐!”

“인간 계집이 우습군……. 크큭!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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