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표독스럽게 허공을 노려보던 로잘리는 곧 흥분을 가라앉히고 몸을 일으켰다. 검은색 망사 장갑을 낀 손을 우아하게 허리 아래에 모으고서 붉은 입술을 휘어 올렸다.
“이 내가 엘리나2 언니를 원래대로 돌려놓겠어. 그 간사한 영혼 년을 쫓아내고서 말이야! 호호호!”
“잠시만요. 빙의는 나쁜 영혼이 아니에요!”
“이거 놔!!”
엘리나1의 손을 뿌리친 로잘리는 그대로 엘리나1의 오른뺨을 때렸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나1의 몸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와서 다른 영혼 따위가 차지하는 걸 두고 볼 것 같아! 절대 인정 못 해… 이 내가!!”
“아아…….”
발갛게 손자국이 남은 뺨을 움켜쥐고서 엘리나1은 응접실을 나서는 붉은 머리 여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디체스… 전 이제 어떡하면 좋죠?”
남주를 포기하라고 악녀에게 협박당한 여자 주인공처럼 엘리나1은 무력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늘따라 그가 더욱 보고 싶었다. 하지만 감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그였다. 이렇게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도 그는 알아차려 주지 않는다. 제 앞에 나타나 주지 않았다.
만나러 올 수 없다면 자신이 만나러 가면 된다. 엘리나1은 곧바로 나갈 채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 황성 감옥으로 향했다. 황성 감옥의 내부 안에 만들어진 조그마한 면회실에서 엘리나1은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철문 너머로 교도소 사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수 번호 254. 디체스 씨 면회 시간 10분입니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파란 죄수복을 입은 사내가 진녹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들어섰다. 이지적인 검은 눈빛이 자신을 향해 오자 엘리나1은 마음이 욱신거렸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란 말인가.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엘리나1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와 자신을 가로막는 투명한 유리로 인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대신 구멍이 숭숭 뚫린 유리에 최대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제가 보고 싶지 않았나요……?”
“당연히 보고 싶었습니다.”
디체스는 유리창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얼굴을 낱낱이 훑어 내리던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뺨이 부었지 않습니까……. 누구의 짓입니까?”
그는 화가 난 듯 보였다. 이제까지 보였던 차분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엘리나1은 잠시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뺨이 가라앉기 전에 보여줄 생각으로 그에게 온 건 맞았다. 하지만 막상 바로 입질이 오니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그게… 실수로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대체 계단에서 어떻게 넘어지면 뺨이 붓습니까!”
“그게… 계단 아래로 떨어지면서 밑에 있던 사람의 손에 뺨이 부딪쳤어요.”
“아, 그렇습니까.”
디체스는 쉽게 납득하며 분기를 가라앉혔다. 엘리나1은 그가 조금이라도 제 말에 의심하며 꼬치꼬치 캐물어 주길 바랐으나 그 뒤로 아무 질문이 없자 괜히 어색해졌다.
아니면, 자신 몰래 뒷조사를 하시려는 걸까. 자신이 누구에게 뺨을 맞았는지 알아낸 후 그 악녀를 조용히 벌하려 할지도 몰랐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나서서 막을 것이다. 악녀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
“…그, 저는 이만 가볼게요.”
“벌써 가는 겁니까?”
“네, 나중에 또 올게요.”
엘리나1은 그가 바로 뒷조사에 들어갈 수 있게 배려했다. 개국 공신가이자 한 나라의 공작인 그라면 설령 감옥 안에 있더라도 심복들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럴 권력과 재산이 그에게는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면회실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디체스의 굵고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얽매었다.
“엘리나1!”
“…디체스?”
“초코파이랑 핫팩 좀 넣어주십시오. 그 건빵도, 별사탕이 들어가 있는 걸로 부탁하겠습니다.”
그녀의 왕자님은 죽었다.
* * *
귀족 저택이 늘어선 고풍스러운 거리. 그곳에 돌연 군복을 입은 마족 무리가 나타났다.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화려한 군복 차림의 마족을 앞장세운 채 그들은 근처 저택부터 닥치는 대로 뒤지고 다녔다.
“누구시죠?”
“잠시 가택 수색이 있겠다, 인간.”
“네? 이봐요! 지금 어딜 들어가시는…….”
강제로 저택 안에 들어서는 마족들을 말릴 힘이 시녀장에게는 없었다. 마족 병사들은 주방으로 침입했다. 요리 기구들이 놓인 선반과 화덕, 찬장을 빠짐없이 샅샅이 살피더니 동그란 프라이팬 두 개를 찾아내 밖으로 나갔다.
시녀장은 어이없는 눈으로 사라져 가는 마족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프라이팬 가지겠다고 저 난리를 피운 거야? 하지만 시녀장은 몰랐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프라이팬이 아니라, 그 프라이팬의 주인이라는 것을.
“마왕 폐하, 스물다섯 번째 프라이팬입니다.”
페레우스는 자신에게 대령한 프라이팬을 들어 올렸다. 손에 들린 프라이팬을 오만하게 깐 붉은 눈으로 요리조리 돌려 보다가 뒤에 대기해 있던 마족 시종의 손에 넘겨주었다.
“대보아라.”
마족 시종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페레우스의 검은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훤히 드러난 뒤통수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움푹 팬 흉터를 향해 프라이팬을 천천히 가져다 댔다. 작았다. 흉터보다 프라이팬의 아랫면이 훨씬 작았다.
“이 프라이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아니다라…….”
페레우스의 입술이 섬뜩하되 매력적인 곡선으로 휘어 올려졌다. 그의 주위로 불길한 검은 오라가 솟구쳤다.
“기다리지 못하겠다. 이 내가 직접 그 인간 계집을 찾아보도록 하지.”
“하나 마왕 폐하!”
“이 나의 길을 막겠다는 것인가? 크큭…, 재미있군. 그대의 피가 어떤 색으로 이뤄졌는지 알아보고 싶지 않나?”
손을 들어 올린 페레우스는 자신의 손날을 혀로 핥아 올렸다. 마치 직접 그의 목을 베어내고 튄 피를 음미하는 것처럼. 마족 병사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서는 곧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더러웠다.
페레우스의 주위로 아무도 다가오지 않자 그제야 페레우스는 만족한 듯 걸음을 옮겼다. 느긋하게 인간들의 거리를 둘러보며 걷던 그는 어느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슈모르드 자작 저택이었다.
페레우스는 발을 들어 대문을 한번 걷어찼다. 손쉽게 대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왜냐면 대문 자체를 잠그지 않았으니까. 가끔 바람에도 끼익끼익대며 잘 열렸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페레우스는 자신의 끓어 넘치는 힘을 과시했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비열하게 끌어 올렸다. 그에게 있어 인간들은 개미보다 못한 약한 존재였다. 그는 정문 앞에 서서 다시 발을 휘둘렀다.
쾅, 하고 문을 세게 찼으나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페레우스가 다시 긴 다리를 들어 쾅쾅 문을 찬 순간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문 사이로 갈색 머리의 시녀복 차림인 여자가 프라이팬을 들고 뛰쳐나왔다.
“어떤 새끼예요! 남의 집 문을 발로 찬 게! 문 닦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모니카는 뉘 집 애새끼인지는 몰라도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한 애새끼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웬 장신의 흑발 남자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모니카는 단숨에 그를 알아보았다. 그야 자신이 프라이팬으로 뒷머리를 쳐서 죽였으니까. 무려 살아 돌아온 시체를, 그녀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너, 그 프라이팬, 내놔라.”
자기 딴에는 강한 명령조를 표현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외국인이라서 말을 끊어서 하는 건지는 몰라도 남자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니카는 두 손으로 강하게 쥐고 있던 프라이팬을 천천히 남자의 손에 넘겼다.
남자는 기묘한 붉은 눈으로 프라이팬을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자신의 뒷머리에다 프라이팬을 갖다 대었다. 둥근 아랫면 한 부분이 그의 머리에 난 자국과 딱 들어맞았다. 마치 흉터의 주인은 이 프라이팬이라고 말하듯이.
“크크, 크크큭. 너로군…, 여자.”
그의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웬 미친놈이라 여긴 모니카가 재빨리 문 안으로 들어가 잠그려 했으나 그전에 커다란 손이 뻗어져 와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이 나를 공격했던 겁 없는 인간 계집이 너였군……? 어떤 당돌한 얼굴의 계집일까 싶었건만 생각보다 평범하게 생겼군.”
“당신… 죽은 게 아니었어요?”
큭큭, 하고 페레우스는 그녀를 비웃었다. 비틀어 올린 긴 입술에 농밀한 쾌락과 광기가 스며들었다.
“인간 계집, 너는 이 마왕 페레우스 슈란 엑사이오스의 눈에 들었다. 그렇기에 넌 오늘부터 내 신부가 되어야 한다. 강제로 말이지……. 크하학!”
“그럼 저 마계의 왕비가 되는 건가요? 할게요.”
“그래, 발버둥 쳐라! 겁에 질려 거부해 보아라! 내게서 벗어나려고 해도 너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아니, 한다고요.”
“…뭐? 한다고?”
“네, 마계 왕비 할게요. 와, 인생 역전, 잠시만요. 와.”
계속 의미 없는 감탄사를 터뜨리던 모니카는 머리에 쓰고 있던 시녀 머리띠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제까지 엑스트라의 증표나 마찬가지인 이딴 걸 고분고분하게 쓰고 있었다니, 기가 찼다. 이 인생의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자기 자신일 텐데 말이다!
밀가루가 묻은 앞치마를 허공을 향해 높이 던져버린 그녀가 향한 곳은 슈모르드 자작 부부가 있는 서고였다.
“얘 모니카, 방금 누구니? 쫓아냈으면 차 좀 더 가져오렴.”
“하하하, 그걸 내가 왜 해요! 난 이곳에 취직을 했지 차 심부름꾼 따위가 아니라고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그렇게 목마르면 당신들이 직접 갖다 마셔!”
“…얘 모니카? 라라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네가 상심이 큰 건 알겠다만…….”
“난 오늘부터 시녀가 아니에요! 아무도 날 부려먹을 순 없다구요! 하루 종일 부려먹으면서 월급은 코딱지만 하게 주질 않나! 하하, 이 지긋지긋한 저택 때려치우고 새 인생 살러 갑니다!! 모두 안녕!!”
강렬한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모니카는 저택을 떠났다. 그녀의 커다란 웃음소리만이 한동안 메아리처럼 저택 안을 메우다 사라졌다. 완벽한 신데렐라 스토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