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85)화 (85/115)

85화

그리고 그 흔적은 어느 곳을 향해 작게작게 이어지고 있었다. 엘리나2가 대리석 위에 묻은 진흙을 쫓아 걸어간 곳 끝에는 어느 불 켜진 방이 존재했다. 물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은 다름 아닌 황제의 침소 가까이에 붙어있는 욕실이었다.

“…더 이상 그만… 놓아주십시오. 이만하면 됐지 않습니까…….”

첨벙첨벙, 사정없이 물 표면을 때리는 질척한 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옴과 동시에 어느 미성의 중저음이 울렸다. 엘리나2는 걸음을 멈추고 놀란 듯이 닫힌 문틈 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몸이 엉망진창이로군.”

“아흑! 폐하, 제발 그곳만큼은!”

"폐하, 싫습니다!"

"잠깐, 가만히… 발버둥 치는 모습도 귀엽다지만……. 후우, 날 너무 힘들게 하는군. 얌전히 있어라."

귀에 들어간 진흙을 빼는 과정이란 여간 쉬운 법이 아니었다. 카를라히는 자꾸만 욕실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최최최측근의 몸을 힘으로나마 물속에 집어넣었다. 거칠게 물이 철썩거리는 소리는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었지만, 엘리나2의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있었다.

'저것들, 욕실에서 뭐 하는 거야!'

이미 검술 대회에서 한번 눈치챈 사실이었지만, 역시나 폭군 황제와 공녀 가문에 얹혀사는 대형견 남주는 비밀 연인 관계였다. 그리고 현재 욕실에서 하하호호 BL 노블레스를 찍고 있었고 말이다.

이 세계를 이대로 BL 장르로 내버려 둬도 된단 말인가. 엘리나2는 어둠 속에서 까득까득 이를 깨물었다. 이렇게 공녀의 몸에 빙의까지 했는데 그저 게이들에게 휘둘리는 조연1로 남을 수는 없었다. 억울해서 뒈질 것 같았다.

BL 소설 속 비중 없는 공녀의 몸에 빙의해 버렸다☆ 그런데 게이 남주들이 어째서인지 나에게 들러붙기 시작한다? 난 그저 조연으로서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라구! ―반드시 이 흐름대로 가야 했다.

‘어서 빨리 차원 영혼 이동 빙의녀의 엉뚱하고 깨발랄한 모습을 드러내야겠어. 지금은 게이지만… 두고 봐. 성적 정체성도 바꿀 만큼 이 나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할 테니까! 그것이 로판!! 절대, 이긴다!!’

일단 지금 이 부분이 절대 책에 묘사描寫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여주 될 자가 지켜야만 하는 금기禁忌.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無看), 아무것도 몰라야 하며(無知), 아무것도 꾸며내지 않았다(自然).

그래야 순진純眞하고 깨발랄한 매력으로 게이 남주들을 이성주의 로판의 세계로 이끈 여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까지의 상황을, 무無의 경지로 되돌려야 한다.

엘리나2는 들어왔던 형적形跡을 완전히 지우고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물 흐르듯 조용한 동작動作과 이에 반해 흉흉하게 그녀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투지鬪志는 로맨스 판타지보다는 무협물에 적합한 것 같았으나 아무튼 엘리나2는 나갔다.

하지만 엘리나2는 알지 못했다. 이 소설의 클리셰는 ‘죽음’ 상태라는 것을.

* * *

새벽 3시 45분. 일에서 해방되자마자 페레우스는 텔레포트를 해서 마왕성의 침실로 들어섰다.

몸도 마음도 녹초였다. 상사인 황제도, 동기인 크리온 씨도 무단결근해서 자신이 전부 일을 맡아 처리해야만 했다.

페레우스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내일이 주말이 아니라니, 오전 9시까지 또 출근을 해야 된다니……. 가족 같은 회사, 발 족足 같은 회사. 같은 말을 주문처럼 되뇌다가 페레우스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제야 해방되었나 보군…….”

동시에 페레우스의 또 다른 인격이 깨어났다. 그는 뮤직 비디오 주인공처럼 드높은 천장을 응시하다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그의 붉은 눈이 조금 가늘게 접혀졌다. 문밖에서의 인기척을 알아차린 것이다. 조용히 기다린 지 3분도 채 안 되어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라.”

페레우스는 오만하게 고개만 돌려 말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어둠의 휘장을 가르고 은빛 머리칼의 미인이 들어섰다.

“마계의 왕이시여, 저는 성녀 엘리나5라 합니다.”

엘리나5는 살짝 머리와 무릎을 굽혀 예를 취해 보였다. 사근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얌전한 움직임과는 달리 눈은 당돌하게도 페레우스의 붉은 눈을 일직선상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부로 당신의 신부가 된 지상의 제물입니다.”

“지상의 성녀라…….”

움직임이 없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긴 다리로 인해 어느새 그녀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확실히 길들이는 맛이 있겠군.”

마왕 페레우스의 손끝이 엘리나5의 턱을 쥐고선 들어 올렸다. 그녀의 은빛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던 붉은 눈은 얼마 안 가 손길과 함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네가 아니야.”

흥미를 잃은 듯이 단조로운 음성이었다. 페레우스는 그녀를 마왕의 신부로 받아들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깨어났을 때 그를 지배했던 어느 기억만 없었다면 말이다.

첫 만남은 그래…, 강렬한 섬광이 머릿속에서 튀는 것만 같았었다. 흐릿한 기억, 초록색 피로 물드는 시야 너머로 보이던 어느 인간 계집의 모습이 자꾸만 그를 뒤흔들었다.

고작 인간 계집 주제에 자신을 공격했었다. 그리고 공격당했었다. 마계의 왕인 자신을 때린 여자는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찾고 말 것이다.’

페레우스는 비단실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들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뒤통수를 더듬는 단단한 손끝에 이윽고 오목하게 패인 흉터가 만져졌다.

힌트는 이것뿐이었지만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곧 그 인간 계집을 이 눈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늦은 점심, 리니엇 공작 저택으로 들어서는 마차가 있었다. 웅장한 저택 입구 앞에서 마차는 멈춰 섰다. 마부가 문을 열자 그제야 안에 착석해 있던 여인이 도도한 걸음으로 내려섰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붉은 머리와 새침하게 올라간 눈꼬리, 화려한 인상과 잘 어울리는 가슴 노출된 드레스는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악녀 로잘리였다.

로잘리는 공작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섰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엘리나2가 살포시 고개를 들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

“언니! 그동안 어떻게 된 거야? 전혀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다고! 나를 여기까지 걸음하게 만들다니!!”

성큼성큼 다가온 로잘리는 그대로 손을 쳐들어 엘리나2의 뺨을 내리쳤다. 엘리나2는 그 손을 붙잡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오른뺨을 내어주더니 왼뺨까지 내줄 기세로 조용히 웃으며 앉아있을 뿐이었다.

“…언니? 너, 너! 엘리나2 언니가 아니지?”

언니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제 손목을 움켜쥐었을 것이다. 저 자애로운 여신상 같은 년은 누구란 말인가. 로잘리는 경악하며 외쳤다.

“당장 말해!! 넌 누구지?! 누구냔 말이야!!”

“…미안해요.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역시, 언니가 아니었어!! 감히 언니의 탈을 쓰고 날 속여!”

히스테릭한 외침과 동시에 로잘리는 손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빠르게 하강하던 손이 엘리나2의 탈을 쓴 자의 뺨을 후려치기 전에 먼저 가짜 엘리나2가 운을 뗐다.

“때리고 싶다면,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세요.”

“…뭐?”

움칫, 로잘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자애와 용서, 순수, 진실됨, 세상 모든 것을 포옹하고도 남을 이 여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시기와 질투로 이뤄진 악녀 자신과는 정반대의 물질로만 이뤄진 것만 같았다.

“넌 대체… 뭐야?”

“전 엘리나1이에요.”

“엘리나1이라면… 이 나라 폭군과 약혼한 그 엘리나1이잖아? 분명 황성에서 지낸다고 들었는데! 왜 지금 황성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거지? 엘리나2 언니는 어디 있고!”

“그게…….”

줄곧 조용히 미소 짓던 엘리나1의 얼굴에 울음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감정은 점점 격해졌다. 진동 안마기를 댄 것처럼 덜덜 떨리는 어깨, 지켜줘야 될 것만 같은 가냘픈 체구의 그녀는 마치 물에 젖은 새 같았다. 엘리나1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저 때문이에요. 다 저 때문이에요. 엘리나2는 저를 대신해서 폭군의 신부가 되기 위해 황성에 갔어요……. 흐으윽, 전 엘리나2로서 이곳에 남은 거구요……. 흐흑.”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 못 해?!!”

앙칼진 음성이 호되게 엘리나1의 귀를 내리쳤다. 엘리나1은 손을 내려 무릎 위에 얹었다. 드레스 자락이 작은 손 안에서 사정없이 구겨졌다.

“…엘리나2는 제 행세를, 저는 엘리나2 행세를 하고 있단 거예요…….”

하얀 손등 위로 눈물이 투툭 떨어져 내렸다. 흐느낌이 이어졌다.

“그리고 당신이 찾는 엘리나2는… 더 이상 엘리나2가 아니에요. 엘리나2의 몸속엔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어요.”

“그딴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바른대로 말 못 해?!”

“당신이 모르는 것도 당연해요……. 저희 가문에서 이 얘기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았으니 아는 자는 극히 소수일 거예요.”

엘리나1은 흥분한 로잘리를 눈앞에 두고 호흡을 골랐다. 뭐부터 얘기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고운 드레스 자락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엘리나1은 입술을 열었다.

“…엘리나2는 마차 사고를 당했었어요. 마차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크게 다쳤죠……. 한동안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어요. 그리고 일어났을 땐 엘리나2의 몸속엔 다른 영혼이 깃들어 있었어요. 그녀의 이름은… 김빙의라고 했어요.”

“…김빙의? 너, 이 얘기 확실한 거지?”

“네에, 모두 다 사실이에요.”

“용서 못 해……. 감히 엘리나2 언니의 몸을 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멋대로 행동하고 다니다니…….”

로잘리는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러 댔다. 혹시나 이 안에 있을지 모를 영혼을 향해 그동안 악녀로서 연마해 온 불꽃 싸대기를 가감 없이 선보였다. 휙휙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응접실 안을 크게 울렸다. 물론 얼마 못 가 제 풀에 지쳐 양팔을 늘어뜨리고선 씩씩거렸지만.

“감히, 영혼 주제에!! 빙의 따위로 나의 언니를 넘봐? 감히!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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