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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84)화 (84/115)

84화

‘눈병… 걸린 거죠? 그 손으로 만지지 마세요! 제발…….’

라라는 발버둥 쳤다. 그의 새빨개진 눈 상태를 보건대 평범한 눈병 같지는 않았다. 닿으면 백 퍼센트 신종 결막염에 감염될 것이다. 라라는 그렇게 판단하고선 눈을 질끈 감았다.

“으읍 읍읍 읍 읍읍으 읍읍읍… 읍읍 읍 읍으브으읍읍읍?”

‘제가 혹시 뭘 잘못한 거예요…….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라라의 눈에서 그렁그렁 눈물이 흘러넘쳤다. 어떻게든 병균이 눈에 들어가지 않게 나름 눈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널 해칠 생각은 없어, 라라. 네가 순순히 내 말에 따라준다면 말이야.”

“읍읍, 으읍 읍읍읍 읍읍으읍 읍읍읍.”

‘아니, 진짜 어떻게 알아듣는 건데요.’

미하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손을 거두었다. 억지로 눈을 건드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알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이 추운 날씨에 푹신하고 따스한 침대는 국가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었다. ‘아, 조금만 누웠다가 해야지.’ 하고 침대에 누웠다가 그렇게 아침을 맞이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라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끔뻑끔뻑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어느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라히는… 지금쯤 다키마쿠라를 찾았을까.’

아마 모든 병사들을 동원해 다키마쿠라를 찾는 데 여념이 없을 그를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 한편이 울렁였다. 질투?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찾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라라는 알았다. 그는 그 무엇보다 다키마쿠라의 안전을 우선시할 거라는 것을.

최소 10년은 물고 빨고 했을 베개를 자신이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술렁이는 마음은 여전했다. 라라는 다시 기나긴 잠에 빠져들었다.

라라의 예상과는 달리 황제 카를라히는 모든 병사들을 총동원해 다키마쿠라를 찾고 있지 않았다. 대신전에서 잃어버렸으니 어딘가에 떨어져 있겠지. 내일 대신전 문이 열리는 대로 분실물 센터에 들러보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릴리카 짱 다키마쿠라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상했다. 다키마쿠라 없이 잠든다는 사실에 조금도 불안하거나 조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른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으니 불안감 따위를 느낄 새도 없는 것이다.

‘…지인님 지금쯤 많이 실망하고 있겠지? 황제가 씹덕이라서? 씹덕이 황제라서? 아니, 그보다 그녀를 속였으니까……. 하아.’

바닥을 뚫고 내려갈 것만 같은 깊은 한숨이 그의 가느다란 입 새로 흘러나왔다.

카를라히는 침대에 엎드려 누운 채 사춘기 소년처럼 고뇌했다. 내일 그녀를 찾아간다면 뭐부터 말을 해야 할지,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을 피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머리가 다 지끈거릴 정도였다.

‘만약…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이제 누구와 함께 마법소녀 릴리카 짱에 관한 덕질 수다를 열렬히 떠들 것인가? 신간 발매 소식은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하지? 굿즈에 대한 감상은 누구와 함께 공유한단 말이지. 자신의 흑마법사 지뢰 발언을 이해해 주고, 로브신사X릴리카 커플링을 함께 파주는 그녀가 없다면 자신은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혼자 하는 덕질이 당연한 것이었을 텐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러질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덕질을 해도 즐겁지 않을 것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은 카를라히에게 있어서 처음이었다.

몸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혹은 영혼의 반절이 소멸되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허무했다. 그저 허무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함께 덕질을 할 상대가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이토록 마음 깊이 통하였던 상대는 인생을 통틀어 지인님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라라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파바바바박― 하는 문 긁는 소리가 들린 것은.

“…라라?”

이 야밤에 무슨 소름 끼치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카를라히는 혹시라도 라라가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에 몸을 일으켰다. 물론 공포 소설이었다면 십중팔구 죽으러 가는 행위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은 이미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라라? 라라 맞지?”

카를라히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쇳덩이의 감촉이 손바닥을 감싸기 무섭게 알 수 없는 전율이 몸을 훑었다.

카를라히는 눈을 질끈 감고 문고리를 돌렸다. 부디 문 앞에 라라가 서있기를, 귀신만은 아니기를. 귀신이면 로판 남주 최초로 심장 마비로 죽을 것이다. 그런 영광은 사양이었다.

끼이이익―

평소 아무 소리 없이 잘만 열리던 문이 기괴한 소리를 연출했다. 귀신 각인가. 납량 특집 할 시기는 이미 지났을 텐데……. 하지만 그의 처절하리만치 간절한 부정은 강한 확신이 되어 돌아왔다.

문 앞에는 새까만 형체가 자세를 낮춘 채 문을 긁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카를라히의 심장에 무리가 오며 정신이 아득하게 변하려 할 때 새까만 형체가 부르르 머리를 털었다. 동시에 진흙 덩어리가 카를라히의 뺨에 철썩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접니다! 폐하!”

늦은 밤 윗집에서 항의가 들어오기에 문제없을 만큼 우렁찬 목소리였다. 카를라히는 최대한 귀신과 눈을 안 마주치기 위해 천장으로 쳐올렸던 푸른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까만 진흙이 떨어져 나간 그 사이로 황금빛 머리칼 몇 올이 흘러내린 해맑은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크리온?”

“문 열어주십시오!”

“문을 열어달라고 그렇게 시끄럽게 긁어댄 거였나? 귀엽군.”

자신의 측근 중 하나인 크리온을 흐뭇한 눈으로 응시하며 카를라히는 기꺼이 자신의 침소 안으로 그를 들였다. 하나 크리온은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 뒤에 무언가가 있는지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상체를 숙여서 좁은 문 틈새로 무언가를 끙끙대며 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을 더 열어주기 위해 다가간 카를라히의 눈에 이윽고 그 물체가 들어왔다. 크리온은 사람만 한 크기의 베개 모퉁이를 이로 물고 있었다. 다름 아닌 ‘릴리카 짱 다키마쿠라’였다.

진흙이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여태껏 이로 물어서 끌어왔는지 다키마쿠라에는 약간의 진흙도 묻어있지 않았다. 물론 뒷면의 천은 바닥에 의해 다 갈려서 간간이 솜이 튀어나와 있었지만.

“이걸 대체… 어떻게…….”

“마계에서 어떤 마족이 소유하고 있던 물건입니다. 그는 대성전 작전에 참전했던 군인으로, 대성전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전리품으로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아, 그 전에, 그를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해 드려야겠죠.”

크리온은 점잖게 두 팔과 두 다리로 걸어와 그대로 카를라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황제의 발치에 다키마쿠라를 내려놓았다. 누가 본다면 베어진 적장의 목이라도 내려놓은 것처럼 한없이 드높은 충의를 표하는 자세였다.

“그는 마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저를 친히 저택으로 데려와 음식을 준 자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정보는 며칠간 그의 저택에 있으면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그는 일을 다녔습니다. 저택에 남아 심심해할 저를 위해 장난감으로 던져준 물건이 바로 그가 주웠던 전리품, 즉 이 베개였죠.”

“…….”

“이것에서 폐하의 냄새가 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폐하를 떠올리고 곧장 이곳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카를라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냄새 하나만 의지해서 이 먼 길을 쫓아온 것이란 말인가. 하얀 마음, 그 자체였다. 진돗개, 그 자체였다. 더 이상 말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 그의 눈물을 쏙 빼었던 하얀 진돗개 이야기가 떠올랐다.

“크리온 경, 그대의 높은 충성에 짐은 감동받았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단조로운 저음이었으나 알게 모르게 황제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그대는 한 나라 황제의 측근 자리에 머무르기에 아쉬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대에게는 제국에서 가장 값지고 영광스러운 표창을 수여하지. 그리고 오늘부터 최최최측근으로 임명하는 바이다.”

“영광입니다, 폐하.”

크리온은 자신을 최대한 낮춘 무릎 꿇은 상태에서 그대로 바닥에 뒤집어 누웠다. 배를 긁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은 그만한 신뢰의 증표가 아닐 수 없었다.

“배를 긁기 전에 먼저 이 진흙부터 걷어내야겠군.”

“……?”

목욕이란 단어가 들어가지 않았기에 크리온은 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맛있는 간식을 손에 쥔 카를라히를 쫓아 쫄래쫄래 욕실로 따라 들어갈 뿐이었다.

그로부터 10분 후, 아무도 없는 침소에 한 여인이 들어섰다. 엘리나4의 마법 덕분에 마계에서 바로 황실 침소로 텔레포트한 엘리나2였다. 정확히는 폭군과의 정략혼 희생양인 엘리나1로 분장을 하고, 엘리나2의 몸을 빌린 김빙의였지만.

‘폭군 남주는 어딨지? 이왕이면 침대 위로 떨어뜨려 주지 뭘 모르네~’

폭군의 침대 위에 갑작스레 떨어지는 것만큼 환상적인 상황은 없었다. 여기서 폭군이 ‘감히 겁도 없이 짐의 침소에 발을 들인 것인가?’라는 저기압적인 대사를 뱉으며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밀거나 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여기서 사생활 침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개겨야만이 그의 눈에 들 수 있을 테다. 폭군같이 성질이 흉포하고 고집스러운 남주 스타일은 고분고분한 여주보다는 좀 개기는 여주한테 끌리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정말 법정 싸움으로 간다면 자신 쪽이 불리하다.

물론 안전은 보장되어 있었다. 마족의 대신전 침탈로 인해 약혼식은 무산되어 버렸으나 식을 치르지 않아도 이미 서류상 약혼 관계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수를 생각해 두어도 현실과 이상은 거리가 먼 법이었다.

쓸데없이 화려한 방 안의 모습은 분명 이 나라 황제의 침실이 맞아 보였지만 침대 위는 휑하니 비어있었다. 타이밍이 나빴다. 엘리나2는 작은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침대에 앉아 그를 기다릴까, 아니면 기다리다가 지쳐 잠든 것처럼 대놓고 자버릴까.

“에라~ 모르겠다.”

엘리나2가 침대에 풀썩 누운 순간이었다,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복도 너머?’

엘리나2는 몸을 일으켰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무작정 가로지를 때 그녀의 발에 무언가 축축하고 질척한 것이 소량 밟혔다. 그것은 진흙이었다. 도저히 황제의 방에서 나올 수 없는, 나와서는 안 될 진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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