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녀에게서 손 떼, 당장.”
“크아아악!”
큰일을 당하는 줄 알고 비명부터 내질렀던 마족 병사는 아무런 고통도 찾아오지 않자 눈을 떴다. 포털에 반쯤 걸쳐져 누워있던 여자도, 금발 남자도 사라져 있었다. 마족은 얼쯤하게 풀려난 채로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이지…….”
“어우, 깜짝이야!”
그러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마족 병사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까지 병풍처럼 서있던 젊은 마족이 목발을 짚고 걸어왔다.
“…무서운 자로군, 크큭. 저 어마어마한 오라에 눌려 한동안 내 존재가 잊혔으니 말이야.”
그냥 작가가 잊은 것 같은데. 마족 병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 * *
마왕성 상층부에서는 심각한 의논이 오가고 있었다. 몇몇 노마족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였다.
“생각해 봐라. D가 엘리나3임이 분명하다. 그럼 엘리나2는 D가 아닐 테고…….”
“아니 크큭큭, 님이야말로 아까부터 뭔 헛소리세요. 엘리나2가 D라니까.”
“크클, 듣자듣자 하니 둘 다 멍청하군. 우리가 찾아야 되는 건 엘리나5!”
“아니 크큭, 그러니까! 엘리나3이 누군지부터 찾아야 엘리나5가 누군지 알 거 아닌가!!”
“이 똥멍청이들, 크크큭! 크하학!”
원로회의 분쟁이 한창일 때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엘리나1, 2, 3, 4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엘리나1은 어디선가 구해 온 뜨개질실로 손수 목도리를 짜고 있었고, 엘리나2는 그런 엘리나1의 어깨에 기대어 졸았다. 엘리나3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여전히 허리춤에 걸린 검에 손을 갖다 대었고, 엘리나4는 마계의 책을 바닥에 한가득 쌓아놓고 읽고 있었다.
“…시바, 이러다 우리까지 집에 못 가겠네.”
엘리나들을 포위하고 있던 마족 병사가 씹어뱉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상사가 퇴근을 하지 않으면 그 아래 직원만 고생하는 것이다.
마족 병사들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져 갈 때쯤이었다. 벌컥, 하고 닫혀있는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그 사이로 찬연한 빛을 받은 것처럼 은빛 머리칼을 고고하게 휘날리며 한 여인이 들어섰다.
“당신들이 찾던 성녀는 여기 있습니다. 당장 나의 자매들을 놓아줘요, 아무 죄 없는 자들마저 희생시키지 말고.”
“우엇! 이제 집에 간다!”
마족 병사들이 환한 얼굴로 외쳤다. 이에 반해 회의 중이던 노마족들의 얼굴엔 분기가 서렸다.
“감히 우리를 속여먹다니, 엘리나4라고 했던가……! 네년만큼은 절대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다!”
“……!”
엘리나3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어느 한 노마족이 마력을 분출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마족들이 덩달아 일어나 노마족을 붙잡았다.
“거 거, 진정하시게나! 그러다 사람 하나 잡겄네!”
“감방 가고 싶나?! 일단 그 마력부터 좀 거두게!”
“…마족 말은 끝까지 들어라. 케헴!”
노마족은 헛기침을 한 뒤 인자하게 운을 뗐다.
“이런 창의적인 인재를 지상으로 보낼 바에는 차라리 죽이는 게 낫겠지. 그 정도로 넘겨주고 싶지 않은 인재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 깊은 뜻이.”
“물론 죽여도 상관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
노마족이 다시 마력을 분출하려 하자 엘리나3은 재빠르게 검을 빼들었다. 엘리나5까지 합세해 신성력을 끌어모을 때 다시 노마족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은 천재를 빨리 데려가는 법. 왜냐면 하늘에서도 천재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과연… 그런 깊은 뜻이.”
“물론 당장 죽여서 하늘로 올려 보내겠다는 말이지만!”
“……!”
노마족이 다시 마력을 분출하려 하자 엘리나3은 한번 놓았던 검을 다시 재빠르게 빼 들었다. 엘리나5까지 합세해 잠깐 흩어졌던 신성력을 눈 쪽으로 집중시킬 때, 노마족이 인자하게 다시 운을 뗐다.
“그래야 그녀가 하루빨리 하늘 위에서 마땅한 영광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녀 같은 천재는 우리에게 있어선 과분한 존재다.”
“과연… 그런 깊은 뜻이.”
“물론 결국 죽인다는 소리이지만!”
다시 돌변한 노마족이 마력을 분출하려는 그때였다. 그를 공격하려던 엘리나3과 엘리나5는 모든 행동을 즉각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 끼어들어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있는 여성으로 인해서 말이다.
“거짓말! 거짓말이잖아요. 당신이 엘리나4를 보는 눈빛에선 깊은 애정이 흘러넘쳤어요……. 왜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모두의 증오를 받으려는 거예요. 어째서……?”
엘리나1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의 진실된 눈물에 노마족은 끌어모았던 마력을 풀었다.
“훌륭하군요.”
노마족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짝짝짝, 낮은 박수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그의 주변에 둘러앉아 있던 마족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넓은 공간을 채우는 박수 소리에 엘리나들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엘리나1은 눈물을 거두고 순진하고도 청순한 눈빛을 드러냈고, 엘리나2는 침을 흘리며 자다 급히 눈을 떴고, 엘리나3은 여전히 주변을 경계했고, 엘리나5는 소리 없이 신성력을 거두었다.
그 순간 노마족이 걸어 나와 책을 읽고 있는 엘리나4 앞에 멈춰 섰다.
“사실 이 모든 상황은 납치를 가장한 저희 사의 면접이었습니다.”
“…….”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지켜보기 위함이었죠. 엘리나4, 귀하는 성녀 엘리나5는 물론 다른 자매들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런 잔꾀를 내었습니다. 그 결과, 아무도 다치지 않게 되었죠.”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던 사실이에요.”
다른 엘리나들이 놀란 와중에도 엘리나4는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
“예전에 이 사의 직원분께 이직 제의를 받았거든요. 마계로 끌려왔을 때, 혹시나 이것이 저를 채용하기 위한 큰 그림의 연장선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무모한 잔꾀를 펼쳤던 것이고요.”
“예상했을 줄이야……. 과연, 천재라 할 수 있군요. 거기다 엘리나4, 당신이 주위로부터 얼마나 큰 신뢰와 사랑을 받는지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의 행실이 그만큼 성실하고 바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엘리나4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엘리나3과 엘리나4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력으로 맞서려던 자매들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따스해졌다.
“알아본 결과, 마법 관련 자격증과 수상 경력이 많으시더군요. 저희 사로 오신다면 높은 직급은 물론, 극상의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 필요한 서적, 연구 재료, 마왕성에서 모두 다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확실히 마법학을 익히기에는 마계만큼 좋은 곳도 없었다. 자신은 모든 분야의 천재가 되고 싶지만 그중에서도 마법에 관심이 많으니까. 하지만 마계로 간다면…….
엘리나4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차있을 때 단호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귀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인재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증명하죠.”
“엘리나5……?”
“저희 엘리나4를 믿고 보내겠습니다. 늘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어서 다소 딱딱하다고 생각되실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이 굉장히 여린 아이예요. 귀신을 보면 까무러칠 정도로요.”
“어서 가봐. 너에겐 지상은 좁다.”
어느새 다가온 엘리나3까지 합세해서 멋있는 대사를 날렸다.
엘리나4가 뭐라 운을 떼기도 전에 그녀의 등을 세게 밀어주는 수많은 손들이 있었다. 엘리나1, 엘리나2와, 그리고 왜 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퇴근을 앞두고 약간 밝아진 얼굴의 마족 병사들의 손이었다.
“모두들…….”
저마다의 손에 밀쳐져 엘리나4는 앞으로 전진했다. 손길 하나하나가 마치 특성화고 선생님들의 따스한 손길과도 같았다. 일단 취업부터 시키고 보는구나. 답지 않게도 그녀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 *
라라는 눈을 떴다. 까마득한 천장이 보였다. 샹들리에를 놔두고 촛불을 켠 것인지 방 안은 어두침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정도의 어둠 속에서 라라는 어떤 실루엣을 발견했다.
멀지 않은 곳에 놓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남성은 다름 아닌 미하일이었다. 미하일? 그를 부르려 했으나 으읍읍? 하는 소리만 입에서 날 뿐이었다.
“으읍으으읍? 으으읍으응읍으읍?!! 읍으읍!!”
뒤늦게 라라는 자신의 입에 웬 천이 물려 있는 걸 알아차렸다.
“으으읍!! 으으 읍읍읍?! 으으읍 으읍 읍읍으읍? 으으읍읍으읍으으으읍으으으읍? 으읍읍읍읍읍, 으읍? 읍읍 읍읍읍 읍읍읍 으 읍읍읍읍. 읍읍읍 으읍 읍읍 읍읍 읍읍읍읍!!”
‘미하일!! 이거 뭐예요?! 미하일 듣고 있어요? 누가 제 입을 천으로 막아놓은 거예요? 아오, 오빠 새끼죠, 분명? 그 새끼가 다녀간 게 분명해요. 저한테 이런 엿을 먹일 새끼는!!’
라라는 오빠를 향해 이를 갈았다. 위로 눈을 치뜨니 손목까지 침대에 묶여있었다. 정말 철저한 새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보다 어쩌다 자신은 이곳에 있는 것일까. 미하일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은 미하일의 침실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라라는 약간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 새끼가 어떻게 교황의 침실까지 올 수 있는 거지?
그때,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던 미하일이 몸을 일으켰다. 라라는 다시 눈을 내렸다.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미하일이 보였다.
“으으읍?”
‘미하일?’
“글쎄, 과연 누구의 짓일까, 라라.”
“으읍읍 읍읍읍 으으읍으 읍읍읍?”
‘그보다 어떻게 알아들은 건데요?’
미하일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침대가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연한 하늘색이었던 그의 눈이 점차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읍읍읍……?”
‘미하일……?’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라라가 흠칫 하고 어깨를 떨 때 그녀의 아래턱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가만히 있어.”
어느새 허리를 숙인 미하일이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점점 눈가 근처로 다가오는 손끝에 라라는 두려운 듯 턱을 떨었다.
“읍읍… 읍읍 읍읍? 으 읍읍읍 읍읍읍 으으읍! 읍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