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아 어쩐지, 나오는 굿즈마다 다 싹쓸이할 정도면 엄청난 부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디서 그런 돈이 생겼나 했는데 다 내 세금이었다니! 개객기야!”
라라는 그대로 카를라히에게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미하일도, 카를라히도, 그리고 잠시 내용상 잊혔던 젊은 마족도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사건은 벌어졌다.
“…페아?”
카를라히의 몸 위에 엎어져 같이 뒹군 라라는 보고야 말았다. 선글라스가 벗겨진 그의 얼굴을. 지금껏 숨겨왔던 라히의 민낯을.
“…어떻게 페아가…….”
“인간 계집! 당장 내려오지 못하겠…….”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린 채 라라를 자신 위에서 내치려던 카를라히는 순간 자신의 뺨에 떨어진 물방울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가리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익숙하고도, 친근한. 그리고 소중한.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억에 카를라히는 멈칫하고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이 내면에서 터져 나오려는 기억에 의해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소중한… 존재……?’
카를라히는 눈을 감았다. 아니, 떴다. 새까만 내면 속의 자신이 보였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자신은 누구인가. 지상의 황제이자, 마력을 손에 넣은 자, 모든 것을 지배하기에 적합한 남자. 하지만 정녕 그런 것들이 중요하단 말인가. 카를라히는 자신에게 물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어둠 속에서, 순간 희미한 빛 조각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둠을 밀어내며 떠다니는 빛 조각들을 향해 카를라히는 모든 의식을 집중시켰다.
‘…라히. 우리 황자. 똑똑하구나.’
‘…라히 …너는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다.’
‘…라히, 이번에 나온 『마법소녀 릴리카』 신간 말인데요.’
그것은 기억이었다. 내제되었던 소중한 존재에 관한 기억들.
뿌옇던 빛 조각들이 점점 모여 큰 한 점을 이루었다.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모든 어둠이 물러가고, 마침내 그가 잊고 있던 소중한 존재의 얼굴이 빛 무리 속에서 나타났다. 네모난 실루엣 중앙에서 깜찍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아… 내 다키마쿠라!’
카를라히는 번쩍 눈을 떴다. 이번엔 현실이었다. 차디찬 공기가 피부에 맞닿고 흐렸던 시야가 어느 여인의 얼굴로 한가득 채워졌다. 자신의 위에서 인중을 손가락으로 가린 채 앉아있는 라라가 보였다.
“미안해요, 콧물 떨어졌어요.”
카를라히는 뺨에 떨어진 물방울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었다. 소중한 사람의 분비물이니 괜찮았다. 차라리 피보다는 낫지.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를 하고는 품에서 새 손수건을 꺼내 들어 라라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걸로 닦고 나중에 빨아서 주라능.”
어딘가 익숙한 손수건이었다. 라라는 혹시나 싶어 손수건을 뒤집어 보았다. V포즈를 한 릴리카의 눈 옆에 작은 별이 반짝 튀어나온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공식 굿즈였다. 이렇게 소중한 손수건을 제게 콧물 닦으라고 주다니, 자신도 로브신사 손수건이 있긴 하지만 아까워서 꺼내질 않은 걸.
“…킁, 고마워요.”
“코 풀라곤 하지 않았는데.”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보다 라라, 큰일이라능. 신전에서 다키마쿠라를 잃어버린 것 같다능……! 왜 이제야 떠오른 건지, 하.”
“그거 큰일이잖요. 얼른 가봐요. 그리고 이제 다 들킨 마당에 오덕체 안 써도 돼요.”
라라는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했던 사람이 씹덕후였고, 그 씹덕후가 황제고, 그 황제가 좋아했던 사람이라니. 무엇보다도 ‘폐하’를 이제껏 ‘페아’로 혼자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들켰다니……?”
카를라히는 라라의 말에 의문을 느끼다가 뒤늦게 안경이 벗겨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안경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콧대가 쓰라려 보였다.
“내가 황제라는 걸…….”
“네, 그리고 폐아였던 거죠……?”
라라는 머리를 한번 긁적거리곤 그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을 카를라히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가 혹시라도 신분을 숨겨서 그녀가 실망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했다.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입술을 여는 순간, 라라가 먼저 조용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서 가봐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라라, 나는…….”
하지만 그가 말을 이을 틈도 없이 바닥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검은 오라로 뒤덮인 마법진이 카를라히의 몸을 삼키며 보랏빛이 섞인 붉은 섬광을 뿜어댔다.
“바쁘신 일이라면 보내드려야지요. 언제까지 저희 조국이 주인 없이 방치된 꼴을 볼 순 없으니 말이죠.”
미하일은 친절한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카를라히를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마법진이 사라지기 무섭게 그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고통이 찾아왔다.
“큭!”
“수건 가져올게요!”
“아냐, 괜찮아…….”
식은땀이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채였지만 미하일은 괜찮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여유롭게 끌어 올렸다. 보는 라라가 다 걱정될 만큼 새파란 낯이었다.
“아무래도 평소보다 양이 많으신 것 같은데… 오버나이트면 되죠? 금방 다녀올게요!”
“…큿, 그냥 여기 있어.”
“그래도…….”
“심장에 무리가 조금 간 것뿐이야. 하루 쉬면 괜찮아지겠지.”
“…심장이요? 방광이 아니라요?”
“자꾸 토 달래?”
평소의 신경질적인 면이 튀어나오자 라라는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되었다. 평소와 어딘가 다른 것 같아서 위화감을 느꼈는데 아무래도 기분 탓인 듯싶었다.
“그보다 라히… 아니, 폐하는 어디로 보낸 거예요?”
“황궁으로 보내드렸어. 그보다 너 정말, 눈치 못 챈 거냐? 안경 하나 썼다고 눈치를 못 채다니, 너도 어지간히 둔감하네.”
“아… 폐하요?”
라라는 애매하게 웃어넘겼다. 아니, 웃어넘기려 했지만 자꾸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배신감이 들어서도, 마음이 아파서도, 허탈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불현듯 그날의 입맞춤이 떠올라서였다.
페아와의 입맞춤은, 그러니까 폐하와의 입맞춤은 사실 라히와의 입맞춤이었던 것이다.
‘근데 릴리카와 로브신사의 첫 키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능.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고 달콤한 맛이 나진 않았지만 뭐랄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능.’
라히의 첫키스썰 상대도 알고 보니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입술에 모든 신경이 향했다. 입꼬리가 애매하게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안면 마비가 온 것 같은 라라가 마음속으론 울고 있다고 생각한 미하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널 속여왔다는 건 결국 그런 관계밖에 되질 않았단 거겠지. 인상 펴. 어차피 약혼녀도 있는 남자잖아.”
‘약혼녀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분의 마음속에 이미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걸요…….’
라라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아냈다. 릴리카 짱 다키마쿠라와 함께 대신전에 영원의 맹세를 하러 온 그의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엘리나1과 공식 약혼식을 올리기 전에 마음을 다잡고 싶었던 거겠지.’
라라는 일찌감치 신을 돕는 걸 포기해서 다행이었다고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씹덕후가 남주인 이상 인간 여주와 이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세상 어떤 인간도 2D를 이길 수는 없었다. 2D 애인은 영원불변의 진리니까.
“그렇게나 마음이 복잡한 거냐고.”
그녀의 한숨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미하일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가 어느샌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난 네게 어느 것 하나 숨기지 않았어. 내 약점도 내 비밀도 네게만 모두 털어놨지. 난 너 하나만 옆에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왜 넌 아닌 건데?”
“미하일?”
어느새 다가온 커다란 손이 자신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라라는 슬며시 그 손을 풀려고 했지만 얼마나 악착같이 붙잡았는지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손등의 살을 꼬집어 360도 비틀자 그제야 악 소리를 내며 놓아줬지만.
“…그자는 널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지만, 난 달라. 널 이렇게 구하러 왔잖아.”
“그건 감사해요. 하지만 지금 하는 대사, 흑막 보스로 드러난 서브 남주 같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됐어. 어차피 지금 네 곁에 있는 건 나니까. 일은 대강 해결된 것 같으니 우린 대신전으로 돌아가자.”
“네? 저는 집으로 돌아가야…….”
이상함을 감지한 라라가 조용히 그의 곁에서 떨어지려 할 때였다. 시야가 핑 돌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라라의 대갈통이 단단한 바닥에 의해 깨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허물어진 몸을 붙잡아 주는 팔이 있었다.
“나와 함께하는 거야, 영원히.”
라라를 품에 안아 든 미하일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새빨간 달을 닮은 눈동자가 가늘게 떠졌다. 그는 그대로 텔레포트 마법진을 허공에 만들어 냈다. 라라를 안고 들어가면 됐지만 그 혼자서 이대로 옮기기엔 조금 힘이 부쳤다.
원래 사람이 기절하면 몸무게가 더 나간다고 했던가. 아니면 원래 무게가 이 정도 되는 것일까.
‘보기와는 다르게 묵직하네.’
피처럼 붉은 눈을 내리깔며 미하일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라라의 무게를 지탱하던 양팔이 미약하게 떨리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잠깐 라라를 양탄자 위에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근육이 무리한 기분이었다.
다시 텔레포트 마법진을 띄우고 라라를 먼저 텔레포트 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양탄자도 함께 딸려오게 되었지만 라라가 바닥에 긁히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절반 정도 일이 진행됐을 때 문이 열리며 소란을 감지한 마족 병사가 들이닥쳤다.
“어후, 이게 다 뭐야. 이사하시나 봐요.”
“뭐 그렇죠.”
미하일은 상황이 키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충 말을 받아주었다. 그러나 마족 병사는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혼자 옮기기 힘들어 보이시는데 도와드릴까요? 크큭.”
그렇게 말한 병사가 마족 좋은 얼굴로 라라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엘리베이터에 무거운 짐을 실으려는 이삿짐센터 직원을 돕는 정겨운 풍경이 그려지기도 전에 강력한 마력이 병사의 몸을 포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