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째서…….”
남자의 기괴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에 어린 감정들을 시녀장은 빠르게 읽어내었다. 흥분, 광기, 쾌락, 폭주, 집착, 댕댕이 신남, 죄책감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한데 뒤섞여 있었다. 자신을 알아본 것인지 남자의 눈빛이 곧 순하게 변하였다.
“시녀장…….”
“네, 크리온 님. 이제까지 어딜 갔다 오셨나요. 아니, 그보다 어쩌다가 꼴이…….”
“정원에서 산책을 하다 온 참입니다.”
“산책을 대체 어떻게 하셨길래 온몸이 진흙투성이랍니까! 네?!”
“빗물이 고여있기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는 것이 그만, 정신없이 뒹굴어 버렸습니다.”
“이제 주인마님한테 혼나셨어요. 아휴! 진흙탕에서 아주 목욕을 하셨네, 그냥.”
“제 불찰입니다.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죄송함을 표하는 크리온의 머리 위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그녀는 그대로 크리온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쓸데없이 장신이라 뒷덜미를 붙잡는 것도 힘들었다.
“목욕하셔야겠네요. 순순히 욕실로 따라오세요.”
“이거 놓으십시오! 전 목욕하기 싫습니다!!”
크리온은 몸을 한번 크게 털었다. 굳지 않은 검은 진흙덩어리가 사방으로 튀며 시종들을 공격했다.
흑화, 아니 흙화한 크리온은 시녀장의 손길을 뿌리치고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검게 물든 몸으로 크리온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였다. 마계였다.
* * *
드높은 마왕성의 꼭대기 층에선 오랜만에 원로회가 소집된 중이었다. 높은 신분의 마족들은 이번 참사에 대해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성녀 납치 실패, 그리고 백여 명에 달하는 부상자와 수십 명의 사망자. 참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완전히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오. 크큭큭.”
“피해가 극심하오. 이제 와 소득이라 해봤자…….”
“그거야 보면 알겠지. 클클, 끌고 와라!”
자신감에 찬 어조로 노마족이 명령하자 원탁 테이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족 병사들은 미리 지시받았던 대로 포로들을 끌고 들어왔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진 밧줄에 차례로 양 손목이 묶여있는 여인들은 다름 아닌…….
“성녀……?!! 그런데 네 명……?”
엘리나1과 엘리나2, 엘리나3, 엘리나4였다. 물론 마족들의 눈엔 전부 은발의 성녀로 보였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인간계의 신전에서 발견하고 끌고 온 자들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성녀의 생김새와 판박이입니다.”
“하지만 성녀가 넷이란 정보는 입수하지 못했는데…….”
그리 말한 마족의 눈빛이 흔들렸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지켜보던 노마족이 명령을 내렸다.
“재갈을 풀어라.”
엘리나1과 엘리나2, 엘리나3, 엘리나4는 차례대로 재갈에서 벗어났다. 겁 없이 당돌한 차원 이동 빙의녀 아니랄까 봐, 엘리나1의 옷을 입은 엘리나2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성녀를 찾고 있다면 일단 우리 중에 성녀는 없어! 정말이야.”
“우리 중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엘리나4가 조용히 말했다. 마족들도, 엘리나들도 당황스러운 눈으로 엘리나4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일단 제 의견부터 말하죠. 이 중에 엘리나5, 그러니까 성녀가 있습니다.”
“인간 계집,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어떻게 알지?”
“지금부터 힌트를 드리죠, 성녀를 찾을 수 있는.”
마족들이 술렁였다. 엘리나3은 자칫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가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드레스 속에 숨겨놓은 단검을 언제든 꺼낼 수 있게 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긴장감 도는 침묵이 이어졌으나 곧 다시 운을 뗀 엘리나4로 인해 가볍게 깨졌다.
“일단 서있는 순서대로 A, B, C, D라고 칭하죠. 첫 번째 힌트, 엘리나들은 총 다섯 명입니다. 성녀는 그중 단 한 명이죠.”
“우리가 잡아온 건 네 명… 이 안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단 말이군. 큭큭, 도박인가? 재밌군.”
“두 번째 힌트, 모든 엘리나들의 부피는 같지만 성녀는 가장 가벼운 엘리나보다 질량이 15g 더 차이 납니다.”
“그렇담 엘리나들을 전부 저울 위에 올려놓아서 누가 가장 가벼운지부터 알아내야…….”
“조건이 있습니다. 저울은 무게가 표시되지 않는 양팔저울만 사용할 것. 최대 두 명의 엘리나만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5g 무게의 추를 각각 한 번씩 양팔저울에 올려볼 수 있어요.”
노마족은 당장 사람 하나를 올려놓을 수 있는 크기의 양팔저울과 5g 무게의 추 다섯 개를 가져오라 명령했다. 그 와중에도 엘리나4의 힌트는 계속되었다.
“세 번째 힌트, 성녀는 엘리나3보다 근육량이 적습니다. 여기서 엘리나3은 A, B, C, D 중 근육량이 제일 많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아선 모릅니다. 만져봐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근육량과 질량이 비례한다는 가정이 붙습니다.”
“그럼 역시, 일단 이 중에서 엘리나3이 누군지부터 밝혀내야…….”
“네 번째 힌트, 엘리나3은 가장자리에 없습니다.”
“그렇담 A, D는 아니고 B, C 둘 중 한 명이란 소린데…….”
“C와 B의 질량을 비교했을 때 B쪽이 더 나갔었다……. 그렇담…….”
“하지만… B가 엘리나3이라고 했을 때… 그렇담 A가 성녀일 가능성은…….”
“…수천 년 동안 머리가 이렇게 아픈 적은 처음이군…….”
원로회의 마족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싸매고 자신들의 추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한 마족이 분노하며 자리를 박치고 일어섰다.
“제길, 종이를 가져와! 펜도!!”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가는 동안 마족들은 집에도 가지 않고 문제를 푸는 데 열중했다. 방 탈출 게임이 따로 없었다.
* * *
“크아아아악! 크흐흐하학!”
“…그래서 언제쯤이면 끝나는 거예요?”
라라는 1시간 32분째 흑화하고 있는 라히를 지켜보았다, 방 안 소파에 앉아서.
검은 구 안에 있는 그에게 접근할 수 있기는커녕 강제로 꺼내줄 수도 없기에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것만이, 현재 라라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마족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그의 내면에서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라 했다. 처음엔 그의 밝은 면이 승리하기를 바랐지만 한 시간이 넘어가자 이제 어느 쪽이든 좋으니 빨리 승부를 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흑화, 오늘 안에 끝나긴 하는 거죠?”
“아직 1시간 32분밖에 안 지났습니다. 크큭, 보기완 다르게 성질이 급하시군요.”
젊은 마족은 라라의 반대편에서 여유롭게 차를 들이켰다. 라라는 식은 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갑작스러운 진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심상치 않은 떨림이 검은 구로부터 전해져 오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되었군요.”
“…아니, 뭘 또 시작해요?”
“아니, 이제 끝났다고요. 새 탄생의 시작이란 말이었습니다. 크큭.”
라라를 안심시킨 마족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옆에 세워둔 목발을 집어 들었다. 서서히 검은 기운이 거둬지면서 그 안에 숨어있던 라히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동글뱅이 안경에서 선글라스로 바뀐 것 빼곤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마족은 무언가를 감지한 건지 두 팔을 과하게 활짝 벌렸다.
“크큭, 마력을 받아들였군요. 나의 형제여, 새 몸은 어떠십니까. 크큭큭.”
“크크큭… 이것이 마족의 몸……. 엄청난 마력이 용솟음치는걸?”
라히는 오글거리게 아무 변화도 없는 손을 괜히 주먹 쥐었다가 펼쳤다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눈을 치떠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날 타이밍을 놓치고 어정쩡하게 앉아있는 라라를 응시했다.
“저 인간 계집은 뭐지?”
“…설마, 나를 기억 못 하는 거예요?”
라라는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가 놓았다. 이제까지 1시간 32분이나 기다려 줬는데. 시바.
“이 나를 위한 선물인가? 크크큭, 신선한 인간 계집, 마음에 드는군.”
“일단 저는 피곤해서 이만 집에 갈게요.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정신 되돌아오면 저한테 찾아오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
라라는 마족을 돌아보며 꾸벅 인사했다. 명백한 무시에 라히는 우습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감히 한낱 인간 계집에게 자신의 존재를 전면 부정당하다니, 한편으론 화가 치밀면서도 작고 평범한 계집이 아주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딜 간다는 거지?”
돌아가려는 라라의 앞을 눈 깜짝할 새 막아선 라히는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짙은 술 향기가 훅 콧속으로 끼쳤다. 라라가 큼지막이 눈을 떴다가 그를 밀어내기 위해 가슴팍에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그 손 떼시죠, 폐하.”
“미하일?”
라라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짧은 금색 머리의 미하일이 있었다. 항상 단정하게 묶여있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약간 거칠게 잘려있었는데 그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그래서 라라는 그의 말의 이상함을 아주 뒤늦게 눈치챘다.
“…폐하라니?”
라라의 얼떨떨한 목소리에 미하일은 예상했다는 듯이 매끄럽게 말을 뱉어냈다.
“이제까지 정체를 숨긴 채 너에게 접근한 거야. 너를 가지고 논 거지.”
그러고는 라라의 허리를 두른 카를라히의 팔을 세게 붙잡아 그녀로부터 떼어냈다. 혼란스러운 사실에 라라는 저절로 뒷걸음질 쳤다. 자연스레 어깨가 미하일의 가슴팍에 닿았다.
“진정해.”
미하일은 미소 지은 채 작은 어깨를 잡아 눌러 제게 기대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두 눈은 카를라히를 향해 도발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왜요?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주 치밀하게도 숨겼나 봅니다, 폐하.”
“…틀렸다.”
“우습지도 않군요. 어떤 변명을 둘러댄다 한들 당신이 이제껏 거짓으로 라라를 대해온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게다가, 이미 약혼녀가 있는 몸 아니시던가?”
“가소롭군. 네 말 자체가 틀렸단 거다. 감히 내가…, 정체를 숨기는 번거로운 짓 따윌 할 것 같나?”
선글라스가 걸쳐진 날렵한 콧날 아래,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걸렸다. 모든 것을 내려다볼 것 같은 고귀하고도 오만한 미소였다.
“그래, 크큭큭……. 내 이름은 카를라히, 제국의 황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