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다시 라라에게 덤벼들려고 준비 자세를 취하던 카를라히가 순간 멈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발에 밟힌 애벌레처럼 괴로운 듯 몸을 비틀었다.
“…으으윽!”
“뭐야, 왜 저래…….”
라라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슬며시 뒤로 물러섰다. 조용히 방을 나서려던 그 순간, 먼저 문이 벌컥 열리며 젊은 마족이 들어섰다. 한쪽 다리를 깁스한 상태로 뛰어왔는지 붕대 위로 초록 피가 살짝 묻어나와 있었다.
“어디선가 불규칙적인 마력이 느껴진다 했더니… 크큭, 그렇군요. 흑화주를 마셨군요.”
“흑화주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갸웃하는 라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젊은 마족은 손을 뻗어 어느 술병을 가리켰다. 아까 라히가 따라 마셨던 술이었다.
“마계 귀족들만 마시는 최상급 와인입니다, 크큭. 마력이 들어가 있는 술로, 마족의 몸에는 해를 끼치지 않지만 평범한 인간이 이 독주를 들이켰다면……. 크크큭.”
“들이켜면 뭐요! 오글거리게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씀해 주세요!”
“인간의 몸은 마력을 담기엔 그릇이 약해요. 크큭… 곧 마력의 폭주가 시작될 겁니다.”
“그럼 라히는 어떻게 되는 거죠!”
“…마력에 잡아먹히게 됩니다. 크큭.”
젊은 마족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라히의 몸을 두르고 있던 검은 기운이 새까만 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놈의 구, 라라는 짜게 식은 눈으로 새까만 구를 응시했다. 그 안에 라히가 공중 부양한 채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저 안에서 벌거벗는 건 아니죠……?”
“변신물을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큭, 크크큭.”
“아니, 댁네 왕이 예전에 저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있었다구요!!”
“마력의 폭주를 막을 방법은 단 한 가지, 몸 주인 스스로 정신을 되찾는 것입니다. 큭크큭. 마력은 기본적으로 숙주의 정신을 지배하니까요……. 큭. 몸 주인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마력도 저절로 몸에서 빠져나갈 겁니다.”
‘말 돌리는 것 좀 봐…….’
라라의 눈이 한층 더 식어갔다. 그때 강한 바람이 일었다. 검은 구 주변에 휘몰아치는 기운이 라히의 몸속으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었다.
* * *
“크아아아악!”
신전 깊숙한 지하. 고통스러운 비명이 연신 울려 퍼지는 곳은 다름 아닌 지하에 숨겨진 고문실이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은 비위가 약한 자는 단 5분조차 버틸 수 없을 만큼 곳곳에 비릿한 피 냄새가 배어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총 세 사람이 있었다. 의자에 묶여있는 마족과 도무지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환한 금발을 한 갈래로 차분히 묶어 내린 교황, 그리고 희귀한 은발 머리의 성녀 엘리나5였다.
“다시 한번 더 묻겠어.”
운을 뗀 건 묶여있는 마족 앞에 서있는 교황이었다.
“마계로 어떻게 가지?”
“…크큭, 하찮은 인간 버러지에게 알려줄 정보 따윈 없다. 크크큭.”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미하일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어딘가 비틀어진 미소라는 걸 마족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고통은 찾아들었다. 배꼽에서 일직선으로 뻗어진 신성력이 그대로 마족의 무릎에 꽂혔다.
“아아아아악! 크윽……!! 아악!!”
마족의 비명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미하일은 신성력을 퍼부어 댔다. 애초에 그러려고 입고 온 크롭 티였다. 배꼽을 드러내는 잔혹한 차림 위에 녹색 핏방울이 튀었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마계로 가는 방법을 불어, 당장.”
왼쪽 무릎이 파열된 채 신음만 흘리고 있는 마족을 미하일은 메마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비, 동정심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금 신성력을 방출하려는 그를 보다 못한 엘리나5가 막아섰다.
“그만, 이제 그만하세요. 신성력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시면 신에게서 부여받은 힘의 권한이 얼마 못 가 사라질 겁니다.”
“말하지 않아도 잘 압니다, 성녀. 그러니 말리지 마세요.”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엘리나5는 진정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남주라면 여주가 납치되었을 때 이런 흑막 같은 반전 매력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이 마왕 신부가 된 것이라면 몰라도 멀쩡히 제 옆에 있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 혼란스런 눈빛을 읽었는지 미하일은 평소의 인자한 교황의 모습을 했다. 부드러운 미소가 미묘하게도 괴기함을 낳았다.
“인자한 교황인 척 구는 것도 지겨웠거든요. 이 타고난 신성력 때문에 선천적으로 병까지 앓게 됐으니 제겐 이런 힘은 지긋지긋할 뿐이에요. 이참에 신성력이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진심…이신가요?”
“네. 그래도 한 번이라도 제 인생에 도움이 되어야죠, 이런 강력한 힘이라면.”
미하일이 힘을 불어넣기 무섭게 배꼽에서 하얀빛이 튀어나갔다. 마족의 복부를 통과하기 무섭게 마족을 구속하고 있던 구속구도 함께 금이 갔다. 마족의 주위에 넘실대던 마력이 주인을 지키듯 얇은 검이 되어 미하일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목덜미가 긁히고, 목 옆을 가지런히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묶은 윗부분이 잘려나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끝까지 발악할 줄이야…….”
미하일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목에서 일자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곧이어 하복부가 싸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큿.”
힘을 너무 많이 썼다. 무리하고 있음을 스스로도 어느 순간 알아차렸지만 결국 한계가 오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물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요실금 팬티를 적시고도 남았을 텐데 축축함은커녕 오전에 갈아입고 난 후의 산뜻함만이 남아있었다.
‘설마… 끝난 건가.’
제게 주어졌던 무한한 신성력도 이것으로 끝인 것 같았다.
여름의 찝찝함도, 수시로 갈아줘야 하는 불편함도, 혹시나 냄새가 날까 봐 밤에 샐까 봐 걱정했던 것도, 수영장이나 바다에 못 갔던 것도, 오늘로서 전부 끝인 것이다. 체내에서 방광을 압박하고 있던 무한한 신성력들이 바닥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를 한평생 괴롭혔던 고질병도 사라진 것이다.
미하일은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고작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 한평생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았던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그때였다. 마지막 발악을 하고 숨을 끊은 마족의 주위로 마력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력들은 고스란히 미하일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베인 상처 사이로.
“…이건.”
엘리나5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단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상처 사이로 대량의 마력들이 흡수되고 있었다. 동시에 목덜미의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큭……! 심장이…….”
“성하!”
미하일은 차디찬 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 그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손안에 움켜쥘 정도면 최소 75C컵은 되어야겠지만, 아무튼.
엘리나5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닿았다.
“마력이 왼쪽 가슴에 들어찬 모양이에요. 당장 빼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심장에 무리가…….”
“잠깐만…, 큿. 아무것도 하지 말아봐…요.”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성하의 목숨에 지장이…….”
“…아뇨, 괜찮으니까……. 버틸 수 있어요.”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지만 미하일은 자신을 구하려는 엘리나5를 부러 제지했다.
마력, 신성력과는 반대되는 사악한 힘이라는 걸 미하일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력이든, 마력이든, 보통 스스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몰려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몸에 맞지 않았다면 진즉에 심장이 파괴되고도 남았으리라.
애초에 고통은 그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차라리 고통스럽더라도 방광보단 심장이 고통스러운 게 더 나았다. 이쪽이 더 옳은 느낌이었다.
제자리를 찾은 느낌, 고통은 점차 사라지고 평안함이 서서히 그의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성하……?”
엘리나5는 바닥에 엎드려 있다시피 쓰러져 있는 남자를 불렀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미하일이 걱정되어 한 발짝 다가간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은빛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긴 속눈썹을 찌르는 머리카락에 엘리나5는 잠시 눈을 감았다. 강한 바람이 한차례 일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엘리나5의 눈앞에 거대한 포털이 생겨나 있었다. 믿기지 않게도, 마계로 향하는 포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포털의 바로 아래, 방금 전만 해도 쓰러져 있던 미하일이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앉아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잘린 상태 그대로 흘러내린 연한 금색 머리칼 사이로 두 눈이 떠졌다.
“괜찮네요, 이 힘도.”
붉게 물든 눈이 포털 너머의 세계를 담고 있었다.
* * *
사방이 암흑으로 뒤덮인 밤. 리니엇 공작 가문의 후문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검은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들어선 장신의 남자는 온몸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을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한때 황금보다도 밝게 빛나던 금색 머리칼은 먹색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아아……. 더 원합니다.”
남자의 입술이 나붓한 미소를 그리며 올라갔다. 이성을 잃은 눈을 한 채 긴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남자의 시야에 한 시녀가 잡혔다.
“몸이 근질근질하는군요……. 어서, 어서 나에게.”
빨랫감을 쌓아 올린 바구니를 들고 가던 시녀는 갑작스레 들려온 저음의 목소리에 바구니를 내렸다. 동시에 커다란 손이 시녀의 안면을 덮쳤다.
“그것은 한번 맛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원합니다. 더, 더욱더……!”
“꺄악!”
시녀는 얼굴을 뒤덮은 끈적끈적한 물질에 기겁하며 뒤로 넘어졌다. 새된 비명이 천장을 뒤흔들었다. 사악한 사탄의 짓이 분명했다.
자신의 얼굴이 타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혹은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은 아닐까, 시녀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저 얼마 못 가 얼굴 위에서 힘없이 툭툭 떨어져 내릴 뿐이었다.
“퉤, 퉤.”
시녀가 얼쯤하게 입에 들어간 검은 물질을 뱉어내고 있을 때 어두컴컴하던 복도가 순간 환하게 밝혀졌다. 비명 소리를 들은 시종들과 시녀장이 뛰쳐나온 것이다.
“거기 무슨 일이지!!”
시녀장은 복도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두 사람을 응시했다. 한 명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참 시녀였고, 다른 한 명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