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의 정석 (79)화 (79/115)

79화

“아니에요, 크큭, 아버지!”

라라의 뒤에서 마족이 다친 다리를 절뚝이면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두 팔을 펼쳐 라라와 카를라히를 보호했다. 초록색 피를 한쪽 다리에 흠뻑 뒤집어쓴 젊은 마족의 모습에 중년 마족은 경악스러운 눈을 했다.

“아들아! 크큭, 고귀한 마족의 피를 가진 네가, 어찌 한낱 벌레보다 못한 인간들의 편을 든단 말이냐!! 다리의 그 크나큰 상처는 무엇이고!! 크크큭… 용서할 수 없다…….”

“오해예요, 크큭. 이 사람들이 다친 저를 여기까지 데려와 줬습니다……. 자칫 죽을 뻔한 저를 구해준 사람들입니다! 크큭.”

그 말에 중년 마족은 공격하기를 중단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도 경멸도 없었다. 굵직한 한 방울의 눈물만이 달렸을 뿐이다.

“아이고, 우리 아들을 살려주신 분들이실 줄이야, 크큭…….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크큭.”

“고개 드세요!”

고개를 숙이면서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중년 마족을 라라는 힘겹게 말렸다. 어딜 가나 자식 사랑은 똑같구나. 이상하긴 하지만 어느새 그들 사이로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비 되는 자로서, 크크큭… 어떻게든 사례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그리고 저흰 마계에 포로로 온 사람들이라…….”

“어휴! 포로라니요!! 극진한 대접을 해드려도 모자랄 판에, 크크큭. 두 분 다 이곳에서 편히 머무르시지요. 인간계에 돌아가실 때까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크큭.”

“어머나, 정말 안 그러셔도 되는데…….”

“크큭, 아버지 말씀대로 하세요. 생명의 은인을 그냥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크큭, 저도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크큭.”

중년 마족의 말에 라라와 카를라히는 괜찮다고 거듭 얘기했으나 젊은 마족까지 합세해서 말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쉴 공간을 마련해 주는구나 싶었으나 라라와 카를라히의 상상을 초월한 특급 서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끝내주는 외관을 자랑하는 초호화 저택에, 항시 대기 중인 백여 명의 시종인들, 쌓여있는 금은보화와 산해진미들.

구해준 젊은 마족은 꽤 잘사는 집안의 마족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두 사람은 마계에서 호화로운 힐링 관광 패키지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아… 돌아가기 싫다.”

<로판 꼴 한번 잘 돌아가느니라.>

“아, 깜짝이야!”

라라는 갑작스레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주신의 목소리에 놀라 화들짝 소파에서 등을 떼었다.

<신의 명도 까먹을 만큼 아주 살판났구나.>

‘어, 어쩔 수 없잖아요!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데, 한낱 엑스트라인 제가 뭘 어쩌겠나요?’

<그러니까 한시 빨리 여주와 남주를 이으란 말이다!>

‘알고 있어요! 근데 그게 어디 쉽냐고요! 주신님도 이제껏 지켜봐서 아시잖아요! 집착 남주는 깜빵에 들어가 버렸지, 대형견 남주는 다른 의미로 대형견스럽지!’

<뭐?! 지금 개 같다고 했느냐!>

‘제가 언제 개 같다고 했어요! 생사람 잡는 것도 정도가 있죠, 참 나!’

도도하게 턱을 세우며 라라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다시 우아하게 잔을 드는 라라에게 신성하고도 비장한 음성이 내려왔다.

<너의 오빠를 구하기 위해선 반드시 여주와 남주를 이어야 함을 명심하거라, 선택받은 자여.>

‘저 근데 생각해 보니까요. 오빠, 굳이 구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뭐…, 뭐?!!>

‘처음엔 어떻게든 오빠를 원래대로 돌려놔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지금 오빠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고 해도 뭐랄까,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아요. 그 망할 쓰레기가 어느 날 갑자기 저를 과보호하고 다정하게 굴면 으, 끔찍하다. 미친미친.’

심한 욕이 방언처럼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왔다. 혐오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오, 시발. 이로써 이 세계는 종말에 접어드는 것인가.>

유일한 이 세계의 협력자마저 신의 뜻을 배반해 버리자 주신은 점차 기운을 잃기 시작했다. 클리셰의 희망이 사라져 갔다. 그렇게 세상은 종말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 * *

빛도, 물도, 소리도 없는 새까만 세상이었다. 마치 태초의 세계를 보는 듯했다. 그때 태동처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하고도 일정한 리듬을 간직한 소리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아, 여보세요?”

자애롭고도 선량한 목소리였다. 태초의 어머니, 여자의 목소리에 세상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네, 작가님. 지금 통화 가능하실까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네. 괜찮습니다, 담당자님.”

“메일로 보내주신 원고 파일 확인했는데요.”

“네.”

“…음, 예전에 연재하셨던 내용과는 많이 다르네요. 그, 제목은 ‘엘리나의 다섯 남자들’인데 왜 주인공 엘리나가 다섯으로 늘어났는지 초반부터 살짝 이해가 안 가는 데다, 전체적으로 좀 소설의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리고 로맨스 맞죠?”

이방인의 물음에 태초의 어머니, 주신은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이제까지 자기가 싸지른 것이 글인지 똥인지 알 수 없는 마당에 그런 것을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대로라면 출간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요.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노력해 보겠지만, 작가님께서 이 뒤의 이야기를 좀 더 보강해 주셨으면 합니다. 요새 로판 시장이 워낙 경쟁률이…….”

“…아, 예예, 그렇군요.”

태초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건필하시고, 잘 좀 부탁드릴게요.”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세상이 다시 검게 물들었다.

* * *

엘리나5는 눈을 떴다. 땀에 젖어 관자놀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성녀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처리하고 있던 서류가 겹쳐진 팔 밑에 깔려있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너무 급작스러운 꿈이었다.

“…신의 계시인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엘리나5는 기괴한 꿈 내용에 몸서리치며 성급히 몸을 일으켰다. 문밖으로 걸어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성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성녀님, 밤이 늦었습니다.”

“성하를 뵈어야겠어요.”

“저도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상황의 심각함을 눈치챈 성기사는 군말 없이 앞장섰다. 이윽고 도착한 집무실 앞에서 성기사는 대기하고 엘리나5만 안으로 들어섰다. 미하일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마치 그녀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느긋한 태도로 고개를 들었다.

“왔나요, 성녀.”

“마계로 가는 법은 찾으셨나요?”

“아직, 조사 중이에요.”

“방금 이상한 꿈을 꿨어요. 계시가 내려졌어요. 서두르지 않는다면 이 세계가… 위험해질 거예요.”

성녀의 불안한 눈빛에 미하일은 침묵을 지키다가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미하일은 책상을 돌아 나와 서재 앞에 섰다. 서재의 여덟 번째 칸에 손을 올린 그는 특징 없이 검은색 가죽으로 제본된 책을 집었다.

“다만, 이제부턴 교황으로 불릴 자격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책을 잡아 빼자 서재가 옆으로 밀리며 비밀 통로가 드러났다. 끝을 알 수 없는 새카만 공간 속에 미하일이 발을 들인 순간 확 켜진 등불이 그의 옆얼굴에 드리워졌다. 불길한 기운이 엘리나5를 사로잡았다.

“가죠.”

* * *

라라는 창가에 앉아 마계의 붉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내주는 절경이었다. 술을 홀짝이며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그녀의 뒤로 카를라히가 다가왔다.

“라라, 뭐 하냐능?”

“아, 그냥 달구경 중이었어요. 여긴 달이 빨개요. 보세요.”

옆으로 다가온 카를라히를 올려다보자 뭐가 웃긴지 그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지 왠지 예상이 갔다. 분명 멸치 똥처럼 짧고 가느다란 눈으로 따뜻한 눈빛을 하고 있겠지. 멸치 육수처럼 깊게 우러난 웃음기를 담은 채.

“빨간색 좋아하냐능?”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특이하잖아요. 지상에선 볼 수 없는 달이기도 하고요.”

“그런가. 라라 넌 나랑 취향이 정반대인 것 같다능.”

취존 영역이라구요, 라라가 그렇게 쏘아붙이려 할 때 카를라히가 먼저 운을 뗐다.

“그런데도 이렇게 잘 맞는 거 보면 신기하지 않냐능.”

“뭐예요, 낯간지럽게.”

“낯간지러우라고 하는 소리라능.”

라라는 바람 빠지듯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카를라히도 따라 웃으며 근처에 진열된 술병 중 맨 위에 있는 술을 꺼내 들었다.

“이제까지 줄곧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첫 지인이 너라서 정말 다행이라능.”

잔에 술을 따르자 새까만 빛의 액체가 넘실거렸다.

“난 이제까지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틀어박혀 지냈다능. 모든 굿즈들을 싹쓸이하고 전시하고, 그게 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다능.”

라라는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술을 들이켠 그가 잔에서 입술을 뗐다.

“그런데 너와 공유하면서 기쁨도 즐거움도 두 배가 되었다능. 마음 맞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닫게 됐다능.”

곧 그의 손이 뻗어져 라라의 뺨에 닿았다. 라라는 뜨거운 손의 온기에 흠칫 턱을 떨었다. 매끄럽게 피부를 쓸며 떨어져 나가던 커다란 손이 라라의 턱 아래로 향했다.

“줄곧 말하고 싶었다능. 라라… 죽어라!!”

“컥!”

목을 조르는 라히의 손에 라라는 놀라 반사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은 정통으로 카를라히의 복부에 먹혀 들어갔다. 그는 목을 놓고서 잠시 뒤로 주춤하는가 싶더니 크크큭, 하는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바로 했다. 검은 기운이 라히의 몸 주변에서 넘실댔다.

“이런 미친놈이었다니, 사람 한참 잘못 봤네요!”

라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도를 지나쳤다.

“하찮은 인간 계집…….”

“하! 그쪽도 인간이면서!”

“하찮은 오덕 계집…….”

“전설의 오덕은 그쪽이잖아요!”

“하찮은 엑스트라 계집 따위와… 어울릴쏘냐. 크크큭.”

“아, 네! 엑스트라라서 죄송하게 됐네요! 이제 다신 보지 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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