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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의 정석 (78)화 (78/115)

78화

“좋다능! 아니, 포로가 둘이면 저쪽에게도 괜찮은 제안일 것 같다능.”

두 사람은 다시 힘차게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포털에 가까워졌을 무렵, 라라의 눈에 벽 아래에서 아련하게 사진 한 장을 꺼내 들고 있는 마족이 들어왔다. 그는 적응이 안 되는 초록색 피를 다리 한쪽에 흠뻑 적시고 있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카타리나를 다시 한번만 볼 수 있다면. …크큭큭, 이곳에서 죽을 순 없어… 곧 태어날 우리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크큭.”

본인은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암만 봐도 데드 플래그를 세우는 행위였다. 라라와 카를라히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마족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곤란해 보이는데 도와주겠다능……!”

“저희가 부축해 드릴게요!”

“고, 고맙습니다……! 크큭.”

라라와 라히는 나란히 마족을 부축하고 다시 포털로 나아갔다. 뒤에서 건축물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마족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연기가 셋을 휩쓸기도 전에 포털의 문이 닫혔다.

“당장 제압하라!!”

한편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성기사들이 성녀 엘리나5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쓰러져 뒹굴고 있는 마족들이 기사들의 손에 대거 체포되는 상황 속에서 엘리나5는 홀로 우두커니 서서 사라진 포털 쪽을 응시했다.

“…성녀님! 무사하십니까!”

“슈모르드 양과 시민 한 명이… 나를 대신해 마족에게 잡혀갔어요.”

엘리나5는 처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을 지키지 못한 내 잘못이에요……. 차라리 내가, 이 내가 마족에게 납치당했어야…….”

“그런!”

“아무 죄 없는 이들을 휩쓸리게 만들다니, 나는 성녀로서의 자격이 없어요.”

엘리나5의 뺨을 적시는 한 줄기의 눈물을 본 성기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성녀님께서 끌려가셨다면 마계와의 대전쟁이 시작됐을 겁니다……. 그렇게 됐다면 더 많은 죄 없는 이들이 희생을 치렀겠지요.”

“아니요, 모두가 희생을 치르지 않는 방법을 택하겠어요.”

“성녀님……?”

결연한 빛이 엘리나5의 은색 눈동자에 깃들었다. 엘리나5는 곧바로 대신전의 중심부로 향했다.

교황이 지키고 있는 곳인 만큼 중심부는 강력한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다. 엘리나5는 가볍게 결계를 지나 집무실에 들어섰다.

“성녀.”

심각한 낯으로 성기사단 대장과 얘기를 주고받던 교황 미하일이 열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운을 뗐다.

“그대를 찾고 있었어요. 지금 상황에 대해선 들어서 알고 있겠죠.”

“네.”

엘리나5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실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예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막지 못했다.

게다가 바로 눈앞에 있었음에도 지켜내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 이라 하기에는 몇 번 본 사람에 불과하고 단둘이 있으면 조금 어색하지만 나름 친한 존재를.

엘리나5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지난번 자신을 유인하기 위해 교황 성하를 납치했던 그 치욕스러운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바로 이 자신이라는 걸.

“…성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미하일의 눈빛이 닿기 무섭게 엘리나5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놀란 성기사단 대장이 그녀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곧이어 바닥 위에 떨어진 투명한 눈물방울에 멈췄다.

“모두가 저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런 희생을 바라진 않았어요. 성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저 때문에 희생을 치르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요.”

후드득, 떨어지던 눈물이 어느새 소리 없이 멈췄다. 엘리나5는 고개를 들었다. 흰 뺨에는 눈물길만이 남아있었다.

“마계로 가겠어요. 이것이 제가 내린 답이에요.”

“아니 됩니다!”

성기사단 대장이 당장 그녀를 뜯어말릴 것처럼 외쳤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미하일이 운을 뗀 건 그때였다.

“그렇군요.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조금 성의를 보여줬으면 싶을 정도로 김새는 반응에 성기사단 대장은 슬쩍 눈만 움직여 교황을 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하일은 두 손을 깍지 껴 책상 위에 올려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신입 성녀에게 인수인계를 해줬으면 좋겠군요. 신전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 보니,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성하!!”

“본인 의사로 직장을 옮긴다는데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나요.”

“이제까지 뭘 들었습니까! 직장 옮기는 수준이 아니잖습니까. 성녀님께선, 성녀님께선… 지금 마왕의 신부가 되려 하신단 말입니다!”

“…그런.”

미하일은 놀란 듯 눈을 키웠다. 풀리지 않을 것 같던 깍지가 풀리며 그의 턱 아래서 멈췄다.

“언제부터 마왕과 그런 관계였나요. 미리 말해줬어도 됐을 텐데, 함께 일해왔던 사람으로서 조금 섭섭하네요. 아무튼 결혼 축하해요. 하지만 성녀로서의 직책도 내려놓고 갑자기 주부가 되려 하다니… 후회는 없겠나요?”

“주부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마는, 성하!! 성녀님이 이대로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기혼 여성의 경력 단절, 아주 심각한 문제지요.”

“…맞는 말이군요.”

‘처맞는 말.’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서 성기사단 대장은 두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결정한 일이라 미처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집들이하게 되면 부를게요.”

‘…성녀님도 좀 받아주지 마시지.’

“드릴 말은 이게 전부랍니다. 저 대신 잡혀간 라라와 일반인 한 분을 꼭 책임지고 이곳으로 돌려보낼게요. 성녀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다 하…….”

“방금 뭐라고……. 라라가 여기서 왜 나오나요, 성녀.”

그때 골드웨이브로 2키 정도 낮춰진 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까지의 성의 없던 태도는 어디 가고 답지 않게 심각한 낯을 한 미하일이 성녀를 응시했다.

“진작 말했어야죠! 제길…….”

힘을 뺀 주먹을 내려치듯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미하일이 고개를 숙였다. 쓸려 내려온 연한 금발 머리 사이로 유유함 따윈 사라진 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나도 함께 가겠습니다.”

미하일이 몸을 일으켰다. 그럴 거라 여겼는지 엘리나5는 조용히 그 뒤에 섰다. 이를 지켜보던 성기사단 대장은 문득 든 의문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마계로 가는 법 아시는 분……?”

한동안 깊은 침묵이 방 안에 깔렸다.

미하일은 어두워진 방 안에 앉아있었다. 심복들을 풀어 마계로 가는 방법을 최대한 빨리 조사해 오도록 했으나 아직까진 아무런 수확도 없는 상태였다.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포한 마족들을 고문해서 알아내는 방법이 하나 남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부 반발이 커서 당장 실행할 수가 없었다. 신을 모시는 대신전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고위 신관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마족도 생명이다, 인간에게 인권이 있다면 마족에겐 마권이 있다, 부정 탄다 등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태연하게 있을 순 없어.’

라라가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가만히 자리나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악랄하기 이를 데 없는 마족에게 어떤 짓을 당하고 있을지 쉽게 가늠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무사히 돌아오긴 글렀을지도 모른다. 넓은 방 한가운데에 앉아 미하일은 자신의 지독한 무능함에 괴로워해야만 했다.

* * *

“꺄아아아아악!”

“으윽……!”

미하일의 예상대로,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선 잇따라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울렸다. 비명 소리의 주인공은 라라였다. 이를 악문 듯이 반쯤 새어 나오는 남자의 신음 소리는 그 옆에 있는 카를라히의 것이었고 말이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있었다. 주변은 어두웠고 촛불 하나에 시야를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카를라히는 자꾸만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려 했으나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일단 라라의 상태를 살피려 하는데 그 전에 째질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팔이 빠질 것 같아요! 아아아악!! 그만해요! 제발 놓아주세요!!”

“크큭, 벌써부터 이 난리라니……. 듣던 대로 나약한 인간답군. 크큭큭, 더욱더 고통스러워해라……! 그래야 어깨 뭉친 부위가 풀어진답니다.”

그렇게 말한 마족은 라라의 양팔을 뒤쪽으로 최대한 젖혔다. 라라는 다시금 비명을 내질렀다. 얼마나 어깨가 뭉쳤으면 저럴까, 카를라히는 조금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자신의 어깻죽지를 힘껏 내리찍어 그대로 문지르는 엄지에 신음 소리를 억눌러야만 했다.

“최근 근육을 사용하지 않았나 보군, 크큭……. 이제 아로마테라피 마사지로 넘어가죠. 크큭.”

카를라히는 그대로 뻗었다. 포근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자 다음 마사지로 넘어갔다.

‘시원해.’

아픔도 잠시, 전신을 감도는 개운한 감정에 카를라히는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어느새 까무룩 잠들기까지 한 그는 한 시간 뒤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마사지 체험복에서 가운으로 갈아입은 라라가 보였다.

“전신 마사지는 끝이래요. 다음은 VVIP 회원만 받을 수 있는 스페셜 코스라는데, 받고 갈래요?”

“알겠다능. 나도 옷 갈아입고 오겠다능.”

“그럼 저 대기실에서 차 마시면서 기다릴게요, 호호.”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인자한 얼굴을 한 라라는 대기실로 들어섰다. 숍 직원이 준비해 놓은 고급 허브차를 들이켠 후 폭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정확히는 마계지만.

이제까지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인간? 크큭, 크크크큭, 귀축과 다름없는 저열한 인간 버러지들이! 감히 마계에 발을 들이다니……!!”

포털을 갓 넘어온 라라와 카를라히를 기다린 것은 새로운 위기였다. 물론 지상에서 겪은 위기 수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중년 마족은 진심으로 경멸에 찬 눈을 하고 있었다.

“나의 저택에 더러운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지!! 크크큭! 이것들을 당장 잡아들여야…….”

금방이라도 무슨 해코지를 할 것 같은 중년 마족의 제스처에 라라가 질끈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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